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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의 세 가지 의미 1 - 기술력으로서의 청동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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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의 세 가지 의미 1 - 기술력으로서의 청동기

새샘 2024. 8. 12. 17:24

세계사에서 거대한 하나의 문명 청동기시대를 이루었던 청동기는 단순히 기능적인 의미만 담고 있지 않다.

청동기에 포함된 의미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기술력으로의 상징, 두 번째가 무기로의 능력,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제사용품으로서의 의미다.

 

고조선의 역사를 스스로 기술한 자료은 없으며, 현재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중국에서 발견된 몇 가지 사료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당시 사회상을 모호하게 뭉뚱그려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청동기는 당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도록 돕는 중요한 역사적 상징물이다.

 

그러면 청동기의 세 가지 의미를 상세히 살펴보자.

먼저 기술력이다.

 

청동기는 고급 기술을 습득한 장인만이 주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청동기 기술은 청동기가 가장 발달했던 고대 유라시아와 초원 지역에서 시작되어 시베리아 대륙을 거쳐 만주 쪽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먼 지역을 돌아서 들어올 수 있었을까?

 

현대로 시계를 돌려 고도의 휴대폰 개발 기술을 보유한 개발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인재가 경쟁 기업에 소속되어 있다면 큰돈을 주더라도 기꺼이 스카우트를 제안할 것이다.

만약 그 개발자가 기술 이상의 시스템 운용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것까지 포함해서 어마어마한 거액을 제시하고 데려올 수도 있다.

청동기도 마찬가지였다.

거푸집과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해 스카우트하면서 청동기 기술은 점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시베리아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기와 청동기를 만드는 도구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위 사진을 보자.

서부 시베리아 Siberia 소프카 Sopka-2 64호 고분은 서기전 18~20세기 무렵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장인의 무덤이다.

이 고분에서는 수많은 청동기와 함께 청동기를 만드는 기구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무덤은 망자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대변하므로, 이 무덤의 주인은 생전에 청동기를 만든 기술자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무덤에 망자가 생전에 쓰던 거푸집을 함께 넣었을까?

껴묻거리로 도구를 넣은 이유는 이 사람의 기술력이 신분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기술을 비밀로 묻고 죽을 때도 같이 가지고 간 것이다.

 

청동기가 상류층의 상징으로 대두되고 계급이 높을수록 많은 청동기를 보유하게 되자, 청동기를 다루는 기술자들의 신분 역시 나날이 상승했다.

이들을 사방에서 스카우트하는 과정에서 기술은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북경 근처와 만주에 위치한 청동기 기술자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사진 출처-출처자료1)

 

바로 위 사진은 왼쪽부터 북경 근처의 중국 허베이(하북河北)성, 네이멍(내몽골内蒙古) 자치구, 다시 허베이성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들이다.

출토된 유물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거푸집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로써 이 무덤의 주인 역시 살아 있을 때 청동기를 만들던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중국 랴오양 근처 유적지 위치와 (아래)이곳에서 발견된 사람 얼굴이 새겨진 거푸집(사진 출처-출처자료1)

 

그렇다면 이 기술이 그대로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까지 이어졌을까?
유라시아의 청동기 기술이 고조선으로 전래되었다는 증거는 상당히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약 10년 전, 중국 랴오닝(요령辽宁/遼寧)성의 한 도시인 랴오양(요양辽阳/遼陽)의 유적지에서 청동기 기술자가 고조선 지역으로 넘어온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에는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확실한 고조선 귀족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랴오양은 중국 선양(심양沈阳/瀋陽)의 아래쪽에 위치한 곳으로, 타완춘(탑만촌塔湾村)이라는 동네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옛날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약 2,500년 전의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도 있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거푸집에는 반전이 하나 숨어 있었는데, 뒷면에 고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얼굴이 양각으로 새겨진 것이다.

 

바로 위 사진의 아래 왼쪽 거푸집 뒷면에 양각으로 새겨진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사람은 상투를 틀고, 광대가 도드라진 투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섬세하진 않지만 마치 만화에서 개구쟁이를 표현한 듯 귀엽고 친숙하다.

이는 2,500년 전 살았던 고조선인의 얼굴로, 전형적인 북방 유라시아의 몽골인종들이 공유하는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이 사람의 이름이나 신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물을 꼼꼼히 살펴보면 추측할 만한 몇 가지 단서가 발견된다.

원래 거푸집은 청동기의 형태를 잡아줄 수 있게 무른 돌인 활석을 사용해 음각(글자가 그림을 안쪽으로 들어가게 새기는 것)으로 무늬를 새긴다.

그런데 이 얼굴은 음각이 아니라 양각(글자나 그림이 바깥쪽으로 튀어나오게 새기는 것)으로 새겨져 있다.

즉, 청동기 제작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순수한 장식으로 만든 것이다.

 

돌을 양각으로 새기는 일은 쉽지 않다.

조각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주변부를 모두 깎아낼 때는 어렵고 복잡한 공정이 필요하다.

즉, 물건에 엠블럼(엠블렘 emblem: 상징, 표상, 문장 등)을 넣는 것과 같은 단순한 장식이라고 하기에는 꽤 긴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심지어 이 조각은 청동기를 제작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무덤에 껴묻거리로 넣은 만큼 소중한 물건이다.

거푸집에 새겨진 고조선인의 얼굴에 무언가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추측하기로 이 얼굴은 청동기 장인들이 신봉하는 신이나 숭배하는 조상의 얼굴일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는 고대의 하이-테크놀로지 Hi-technology(하이 테크 High-tech: 첨단기술)다.

거푸집에 조각을 새김으로써 소수가 공유한 비밀스러운 기술에 성스러움을 더하고, 앞으로의 발전을 기원하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도 바퀴를 만드는 제륜신提輪神이 표현되어 있는데, 고대의 기술자들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도의 기술을 지켜가기 위해 자신들의 신을 숭배하는 제례를 지내며 자부심을 가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 거푸집에는 얼굴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 거의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밑에 있는 얼굴선이 더 갸름하고 곡선적이다.

그래서 이 두 얼굴이 부부인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 이유를 추적할 만한 단서는 그와 비슷한 시기인 서기전 6~5세기 무렵에 있었던 오나라와 월나라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자성어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이 지역은 청동기 장인들이 많아 명검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월절서越絶書≫, ≪오월춘추吳越春秋 같은 역사서에는 장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함부로 검을 만들지 않았으며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샤자덴 상층문화의 대표 유적지 난산건에서 발견된 음양검(사진 출처-출처자료1)


유명한 장인 가운데 간장干將과 막야莫耶라는 부부도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의 몸을 끓는 청동 물에 던져 천하의 명검인 음양검陰陽劍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에밀레종 같은 설화다.

여기에 후대에 계속 지어낸 이야기가 더해졌는데, 이런 기록으로 비추어볼 때 청동 기술이 부부라는 음양의 조화로 표현되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고조선과 이웃한 샤자덴(하가점夏家店) 상층上層문화에서는 손잡이 양쪽에 남녀가 표현된 음양검이 발견기도 했다(바로 위 사진) .

 

이 음양검은 샤자덴 상층문화의 대표적인 귀족 무덤이 있는 난산건(남산근南山根) 유적에서 발견된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새겨진 칼이다.

이 칼날은 고조선의 것과 같은 비파형이지만 손잡이는 초원 지역과 고조선의 중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형태만큼이나 독특한 점은 손잡이에 새겨진 사람이다.

앞뒤 면에 각각 남자와 여자의 특징을 뚜렷하게 나타낸 인물이 표현되었다.

이 장식은 남녀 청동 장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실제 전쟁에서 사용하기에는 활용도가 떨어지므로 의식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거푸집에 새긴 고조선인의 얼굴은 바로 당시 사회 고위층이었던 청동 장인들이 숭앙하는 청동 장인의 신이나 조상을 묘사하고, 제사를 지내듯 무덤에 넣어준 것은 아닐까.

 

 

강상 무덤의 평면도와 출토된 유물들. Ⅲ번 구역의 무덤에서 거푸집이 대량 출토되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또 다른 청동기 장인들의 증거는 랴오둥(요동辽东/遼東 )반도 끝에 위한 다롄(대련大连/大連)시 근처의 강상崗上이라는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144명의 뼈가 발견된 집단 무덤으로, 약 2,700년 전에 만들어졌다.

낮은 언덕에 동서남북 각각 20미터 길이로 돌을 쌓고, 그 안에 사람들을 묻은 형태다.

1960년대에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발굴한 이 무덤은 아마도 당시 이 지역에 살던 고조선인들이 한데 모여 만든 것으로 추측한다.

 

그 안에서 발굴된 유물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 무덤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구역마다 출토되는 유물들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각각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이 분리된 무덤 구역을 쓰고 관리했다는 방증이었다.

한국에서도 종가의 선산이 있는 경우 종종 분파와 가족별로 묫자리를 따로 잡아놓는 일이 있다.

이런 전통은 청동기시대부터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강상 무덤의 동쪽 구역에서는 청동기 거푸집과 같은 청동 제련과 관련된 유물이 단독으로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고조선 사회에서 청동기를 만들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지위를 지키며 살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이처럼 청동 광석이 발견된 내몽골 지역을 거쳐 고조선으로 들어온 청동기 기술자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지위를 보장받았다.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비밀로 유지하면서 몸값을 극대화한 것이다.

요즘 말로 테크토크라트 technocrat(높은 사회적 지식이나 기술을 보유함으로써 지배층을 형성해 조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고조선 곳곳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며 살아갔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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