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청동기의 세 가지 의미 3 - 제사 물품으로서의 청동기 본문
청동기의 세 가지 의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용도는 바로 제사였다.
이는 고대에 무기보다 더 강력한 기능이었다.
고려시대의 제사라고 하면 대부분 가장 먼저 청동 거울을 떠올릴 것이다.
그중에서도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잔무늬거울)이라는 유물을 본 적이 있는가?
아름답고 세밀한 잔무늬가 특징인 이 거울은 세형동검細形銅劍과 함께 약 2,300년 전부터 남한 전역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청동 거울은 전남 영암에서 출토된 정문경精文鏡으로 국보 제141호로 지정될 정도로 보관 상태가 뛰어나 당시의 기술을 잘 보여준다.
최근에는 청주 오송역 근처에서도 청동 거울(위 사진)이 발견되었다.
청동 거울은 가히 한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청동기다.
이 거울의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보자.
가운데 부분을 확대해보면 무늬 사이사이의 간격이 0.1밀리미터 이하로 상당히 촘촘하다.
바깥쪽에는 원 문양이 보이는데, 가장 안쪽의 원을 시작으로 20개 이상의 원이 점점 커지면서 감싸고 있는 형태다.
안쪽에는 손톱만 한 크기에 작은 사각형으로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이 작업에는 아마도 요즘처럼 컴퍼스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일일이 새기지 않고 거푸집에 먼저 형태를 새긴 다음 여기에 청동 물을 부어서 틀을 잡았을 것이다.
이때는 철기를 사용하기 전이므로 거푸집에 모양을 새긴 컴퍼스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원 한가운데 점이 파인 것으로 보아 컴퍼스를 사용했다고 추측할 뿐이다.
학자들이 청동 거울을 만드는 과정을 복원해보려고 해도 조금의 오차도 없이 거푸집에 무늬를 새기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만약 한국에서 고대사와 관련된 프로그램이 제작된다면, 이 청동 거울의 무늬를 만드는 일이 가장 좋은 아이템 item(소재素材)이지 않을까 싶다.
청동기에 이런 미세한 무늬를 넣는 작업은 내몽골 지역에서부터 시작해 고조선까지 공통적으로 퍼져나갔다.
그중 바로 위 사진에서처럼 번개무늬를 넣는 것은 중국 내몽골(내몽고内蒙古)과 랴오닝(요령辽宁/遼寧)의 서쪽 랴오시(요서辽西/遼西) 지역의 특징으로, 랴오둥(요동辽东/遼東)의 선양(심양沈阳/瀋陽)을 거쳐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이 청동 거울의 뒷면에 새긴 Z자 모양의 지그재그 무늬(번개무늬)는 무엇을 의미할까?
문헌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증거를 종합해보면 이는 햇빛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 일대에서 최근까지도 활동했던 샤먼 shaman들은 제의를 거행할 때 이런 거울을 목에 걸었다.
바로 위 사진을 살펴보자.
이것은 중국 네이멍(내몽골内蒙古) 자치구 북동쪽 지역인 후룬베이얼(호륜패이呼伦贝尔/呼倫貝爾)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된 샤먼, 즉 제사장의 의복이다.
이 샤먼의 옷에는 다양한 장신구가 걸려 있는데, 그중에는 청동으로 만든 방울과 거울도 있다.
이 거울은 제의를 지낼 때,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대중들에게 마치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주어 황홀한 느낌을 자아내며 샤먼에게 하늘의 대리자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번개무늬는 신석기시대부터 유럽 일대의 토기에도 가끔 발견될 정도로 고대부터 사람들이 널리 애용하는 모티프 motif(주제主題, 모티브 motive: 예술 작품을 표현하는 동기가 된 작가의 중심 사상)이다.
특히 약 4,000년 전, 전차의 발달과 함께 유라시아 각 지역으로 이주한 '안드로노보 문화 Andronovo culture(후기 청동기시대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전차와 함께 토기에도 이런 번개무늬를 자주 사용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인도 지역으로 유입되었고, 그곳에 정착해 남긴 리그베다 Rigveda(브라만교와 힌두교의 정전正典)는 지금까지도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리그베다의 내용은 대체로 번개의 신인 인드라 Indra와 불의 신 아그니 Agni에 대한 것으로, 그 안에는 번개와 태양, 그리고 불처럼 빨리 달리는 전차들이 자주 등장한다.
많은 유라시아 고고학자들은 리그베다에 나오는 묘사가 전차를 몰던 사람들이 남긴 번개무늬에 영향을 받았다고 파악한다.
물론 시베리아의 샤먼과 안드로노보 문화를 고조선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청동기와 전차라는 기술이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생겨난 것을 고려하면 번개무늬 역시 시베리아와 중국을 거쳐 고조선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동 거울에는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책에서 보는 청동 거울의 무늬가 있는 부분은 거울의 뒷면이라는 점이다.
거울의 앞면은 현대의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반사면이다.
현대의 거울은 수작업으로 만든 명품이 아닌 이상 거울의 뒷면에 화려하고 정교한 무늬를 새기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고대의 장인들은 지금의 기술로도 복원하기 어려운 머리카락보다 가는 빽빽한 무늬를 거울 뒷면에 새겼다.
과거에 장인 정신으로 미스터리한 무늬를 새겨 넣은 데에는 거울이라는 물건에 무언가를 비추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가치가 뛰어난 명품 자동차나 옷을 생각해보자.
궁극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무나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미적 감각과 특수한 제작기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대의 거울도 마찬가지였다.
이 거울을 소유하는 사람은 당시 정치적인 지배자이자 종교의 우두머리인 샤먼이었다.
최고의 기술로 만든 명품을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뒷면에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높은 기술력을 활용해 화려한 무늬를 새겨 넣어 신에게 부여받은 힘을 나타냈다.
마치 현대의 명품이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는 섬세한 기술을 활용하는 것처럼 당시의 거울에도 장인 정신이 한 땀 한 땀 담겨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누군가가 쉽게 모방할 수 없었다.
즉, 거울이라는 물건은 비슷하게 만들 수 있지만, 정교한 무늬를 새긴 신비한 물건은 그 기술을 가진 사람들만 소유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청동기에는 기술, 무기, 제사라는 세 가지 키워드 key word(핵심어)가 숨어 있다.
기술은 단지 어떤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추가되고 발전되며 나아가 사회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바꾸는 신기술 하나가 한 나라를 먹여 살리기도 하고, 다른 나라와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청동기라는 기술은 거대한 문명을 여러 개나 이룰 만큼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등 각 나라에서 청동기가 사용된 시대에는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청동기시대'라는 이름이 세게사 책에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그리고 청동기라는 새로운 기술은 고조선의 형성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청동기시대에는 중국의 연나라가 점점 세력을 넓히면서 현재 중국의 랴오닝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을 침략함으로써 고조선은 랴오둥과 한반도의 북한 지역으로 세력을 옮겼다.
그러면서 고조선의 발달된 청동기 문화는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렇게 고조선은 멸망으로 끝을 맺지 않고 한반도의 다양한 청동기 문화에 영향을 줌으로써 새로운 국가가 건설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비파형 동검 하나만으로 고조선의 사회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당시의 생활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들의 경제 활동, 즉 교역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는 자원이 많지 않았으므로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필수였다.
다음 글에서는 고조선이 어떤 방식으로 중개무역을 하며 부를 쌓았는지 알아보자.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4. 8. 1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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