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초전 오순 "운림산수도" "송계산수도" "하경산수도" 본문
<그림을 그리고 싶어 대감을 찾아왔습니다>
세월이 무심한 것인지 역사가 비정한 것인지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우리가 기억하는 인물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정조·순조 연간이라면 100년 남짓 되는 세월인데 그 당시 활동했던 화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제 김득신 등 열댓 명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나 1800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문인화가는 별도로 치더라도 예조의 도화서에는 언제나 20명의 화원이 근무하고 있었고, 규장각에 소속된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도화서에서 왕실로 임시로 차출되는 화원)도 30명이 있었다.
'차비'란 '임시'란 뜻이고 '대령'이란 명령을 기다린다는 뜻이니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임시직 화원인 것이다.
한 세대에 최소한 50명의 화원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 많은 화가의 삶과 예술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기량이 부족하여 이렇다 할 예술적 성과를 내지 못한 경우라면 평범한 인생으로 세월 속에 잊혔어도 아쉽거나 미안하지 않다.
하지만 여건이 닿지 않아 회화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지언정 그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아담한 작품을 남겨준 화가라면 우리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정조·순조 연간에 활동한 화가로 초전焦田 오순吳珣이란 화원이 있다.
그 역시 회화사에서 비중이 크지 않기에 회화 전문가가 아니면 이름조차 아주 낯선 화가일 것이다.
유작도 그리 많이 전하지 않는 듯 필자(유홍준)가 여태껏 실견한 작품은 네 점뿐이다.
그러나 그의 유작들은 모두 잘 짜인 구도에 필법도 세련되었다.
머릿병풍에서 낙질落帙된(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운림산수도雲林山水圖>와 <송계산수도松溪山水圖>를 보면 오순은 참으로 착한 성품의 얌전한 화가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또 다른 작품인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역시 실경을 사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의 계곡 풍경을 그윽한 분위기로 잡아내었다.
수묵의 번지기가 제법이고 형식적 완결성이 높아 작품 전체의 인상이 아주 차분하다.
필치에서 작가적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형적 성실성만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이런 화가의 존재를 알면 정조·순조 연간 회화사의 넓이와 깊이를 더할 수 있다.
그가 누구였는지 궁금해진다.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經産 정원용鄭元容의 ≪수향편袖香編≫에서 오순의 삶을 읽은 뒤로 필자는 더욱 이 화가를 마음속에 두게 되었다.
글 제목은 <오순 화사 사적吳珣畵師事蹟>이다.
"화사 오순은 스스로 호를 지어 초전이라 했다.
그는 부안 사람으로 수묵산수를 잘 그리고 화제 글씨도 잘 썼다.
정조께서 불러서 서울로 올라와 화원이 되어 궁궐에서 대명對命하게 되었다(차비대령화원이 되었다는 뜻).
성격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취하면 자기 마음대로 하여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한번은 정조께서 화본畵本(그림 그리는 종이나 천)을 주며 산수화를 그리라 한 적이 있었는데, 오순은 그 비단을 팔아 술을 사 마시고는 대취한 다음 도망치고 말았다.
정조께서 이 얘기를 듣고는 웃으면서 다시 비단을 하사하며 그리라 하였다.
오순은 이 말을 할 때마다 항상 눈물을 흘렸다.
경신년(1800), 즉 정조께서 타계한 이후에는 일정한 직업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다 자주 우리 집에 놀러왔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의 고향집에 가보기도 했다.
내가 기영箕營(평양)에 있을 때 오순이 병든 몸으로 찾아왔는데 그때 그는 근 여든 살이었다.
아직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물으니 오순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종이를 찾아 병풍 그림 두 틀을 만들었다.
그후 표구를 해놓고 보니 그 사람을 보는 듯하였다.
그는 역시 말속末俗의 저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원용이 평양에 있었던 때는 관서위무사로 내려간 1821년 무렵일 텐데 이때 오순이 근 80세였다고 하니, 그는 1740년 무렵에 태어났고 40, 50대에 차비대령화원을 지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유복렬의 ≪한국회화대관≫에는 8곡병풍 중의 한 폭이라며 산수화 한 점이 흑백사진으로 실려 있다.
육중한 바위 아래 서재가 있는데 저 멀리로는 폭포가 쏟아지고 앞쪽에는 계곡이 시원스럽다.
아래쪽에는 동자와 더불어 한 선비가 다소곳이 서 있는 학을 바라보고 있는 전형적인 남종문인화이다.
화면 위쪽에는 초전 거사가 직접 썼다는 화제가 적혀 있다.
"산은 고요하여 태곳적 같은데 (산정사태고山靜似太古)
날이 긴 것은 소년 시절 같네 (일장여소년日長如少年)"
언젠가 이 병풍이 세상에 공개되어 볼 수 있게 된다면 필자는 잊혔던 조상님을 만난 것 같이 반가울 것만 같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8. 14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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