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 무렵~1550년 1: 서론, 르네상스와 중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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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 무렵~1550년 1: 서론, 르네상스와 중세

새샘 2024. 8. 14. 13:24

르네상스 문명의 (위)아테네 학당과 (아래)피렌체 모습(사진 출처-나무위키https://namu.wiki/w/%EB%A5%B4%EB%84%A4%EC%83%81%EC%8A%A4)

 

12장 서론

 

근대의 '르네상스 Renaissance' 개념은 1350~1550년에 이탈리아 저술가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들에 따르면 로마 시대와 그들 자신의 시대에는 변화도 없고 단조로운 1,000년 동안의 어둠의 시대가 끼어 있다는 것이다.

암흑시대 동안 예술과 문학의 뮤즈 muse(학예學藝의 신神)들은 야만과 무지에 쫓겨나 유럽을 떠났다.

그러나 거의 기적적으로 14세기에 들어 뮤즈들은 갑작스럽게 다시 돌아왔고 이탈리아인들은 위대한 '문예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뮤즈들과 더불어 기꺼이 협력했다.

 

이러한 시대 구분이 제시된 이래 역사가들은 중세와 근대 사이에 르네상스가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실제로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대다수 학자들은, 르네상스가 단지 학문과 문화의 역사에서 한 시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르네상스 정신'이 삶의 모든 국면―즉, 지적·예술적 국면은 물론 정치·경제·종교적 국면까지―을 변화시켰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성격 규정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딱히 '르네상스적'이라 할 만한 독특한 정치나 경제 또는 종교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1350~1550년에 이탈리아에 등장해 그 후 16세기 전반기 동안 북유럽으로 확산된 사상과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의 일정한 경향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말하는 '르네상스 시기'는 지성사와 문화사의 한 시대를 지칭하는 의미로 국한된다.

 

 

◎르네상스와 중세

 

르네상스에 대한 이런 제약을 받아들인다 해도 몇 가지 제한 조건이 더 필요하다.

'르네상스'는 말 그대로 '재생'이란 뜻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1350년 무렵 이후 일부 이탈리아인이 오랜 세월 사실상 죽어 있었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업적을 새롭게 인식하고 고전 문화의 재생을 주도한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중세 전성기에 고전 학문은 '사망'하지 않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St. Thomas Aquinas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를 '철학자'로 간주했으며 단테 Dante는 베르길리우스 Vergilius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비슷한 예는 끝도 없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르네상스의 이교주의異敎主義(자기가 믿는 종교 이외의 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일)를 떠올리면서 이를 중세 신앙의 시대와 대비시키는 것도 잘못이다.

대부분의 르네상스인이 고전을 사랑했다고는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고전주의가 그리스도교를 능가한다고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르네상스에 관한 모든 논의는 어떤 주제를 놓고도 단일한 르네상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르네상스 사상가와 예술가는 태도, 업적, 접근방법 등에서 지극히 다양했다.

그들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그들을 너무 좁은 틀 속에 밀어 넣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고전주의

 

사상, 문학, 예술의 영역에서는 지성사·문화사적으로 '르네상스' 개념을 의미 있게 만드는 현저한 특징들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전 지식의 측면에서 중세의 학문과 르네상스의 학문 사이에는 중대한 양적 차이가 있었다.

중세 학자들은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Ovidius, 키케로 Cicero 같은 로마 저술가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들 외에 리비우스 Livius, 타키투스 Tacitus, 루크레티우스 Lucretius 같은 로마 작가들의 작품이 재발견되고 친숙해졌다.

르네상스 시대에 비잔티움 Byzantium의 영향으로 고전 그리스 문헌들이 재발견된 것도 그에 버금가게 중요한 일이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서유럽인은 그리스인의 과학 및 철학 논고를 이슬람을 통해 라틴어 번역으로 접할 수 있었지만, 그리스의 위대한 문학 걸작과 플라톤의 주요 저작은 전혀 접할 수 없었다.

또한 중세에는 극소수 사람만이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알았다.

반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수많은 서유럽 학자가 그리스어를 배웠고 오늘날 알려져 있는 그리스의 문학적 유산을 거의 다 섭렵했다.

 

둘째로 르네상스 사상가들은 중세 사상가들보다 더 많은 양의 고전 문헌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했다.

중세 저술가는 고전 문헌이 자신이 이미 받아들인 그리스도교적 관념을 보완·확증해줄 것이라고 기대한 반면, 르네상스 시대의 저술가는 자신의 세계와 고전 문헌의 세계 사이를 갈라놓는 개념적·시간적 격차를 한층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아울러 고대 도시국가와 르네상스 도시국가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은 이탈리아 사상가들에게 각별히 고대 문헌에서 자기 시대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사고와 행동의 모델을 찾도록 고무했다.

고전 고대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단호한 결의는 건축과 예술 분야에서 한층 두드러졌다.

고전 양식은 건축과 예술 분야에서 전형적 르네상스 양식을 창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셋째로 르네상스 문화는 결코 이교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 그 지향점에서 12·13세기의 문화보다 한층 더 세속적·물질주의적이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전은 도시의 정치와 현세적 행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점차 교회와는 거리가 먼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이탈리아에서 교회가 상대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했다는 점도 세속적 문화의 등장에 기여했다.

이탈리아의 주교단은 규모도 작고 성직록聖職祿 benefice(교회 사제들에게 주는 생활비)도 보잘것없었다.

이탈리아 대학들도 대체로 교회의 감독과 통제로부터 독립적이었다.

교황마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문화생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교황은 중부 이탈리아에서 각축하는 정치적 경쟁자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문화적·종교적 가치의 중재자로서 도덕적 권위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런 모든 요인은 르네상스의 세속적·물질주의적 문화가 교회의 반대에 따른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

 

르네상스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지적 이상을 압축해서 표현해주는 단어는 바로 '휴머니즘 humanism(인문주의人文主義)'이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강조한 중세 스콜라 철학 Scholasticism을 문학, 수사학修辭學(사상이나 감정 따위를 효과적·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 역사, 윤리학에 대한 연구로 대치시킬 것을 목표로 삼은 학문 프로그램이었다.

휴머니스트 humanist(휴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는 항상 고대 문학을 선호했다.

일부 휴머니스트(특히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Leon Battista Alberti)는 라틴어와 속어를 함께 썼지만,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은 속어 문학을 기껏해야 무식한 사람들의 오락거리로 간주했다.

진지한 학문과 문학은 오직 라틴어나 그리스어로만 써야 했다.

더욱이 라틴어는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의 라틴어여야 했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자의식 강한 엘리트주의자 elitist로서 동시대 학자들이 쓰던 현대 라틴어를 고대적인 (따라서 올바른) 표준 라틴어 문체에서 벗어난 야만적 일탈이라고 비난했다.

고전 연구를 되살려낸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휴머니스트의 위치는 근본적으로 아이러니 ironical 것이었다.

라틴어 문법, 구문, 어휘 선정에 대한 고대적 표준을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는 궁극적으로 라틴어를 발전이 정지된 화석화된 언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그들은 뜻하지 않게 지적·문화적 생활의 중심 언어로서 속어인 유럽 각국어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휴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교육 프로그램―라틴어 문학 연구를 커리큘럼 curriculum(교육 과정) 핵심에 두면서, 학생들에게 그리스어 공부를 장려했다―이 미덕을 지닌 시민과 유능한 공공 관료를 배출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의 엘리트주의는 매우 실용적이었으며, 그들이 살던 도시국가의 정치적 삶과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여성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삶에서 배제되어 있었기에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는 여성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물론 일부 귀족 여성이 휴머니즘적인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15세기에 도시국가가 군주의 수중에 장악되면서 휴머니즘의 교육 커리큘럼은 공화주의적 이상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잃고 말았다.

그렇지만 휴머니스트들은 '인문학 humanities(휴머니즘 커리큘럼)' 연구가 유럽 사회의 지도자를 키우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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