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2: 종교전쟁의 세기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2: 종교전쟁의 세기
새샘 2024. 12. 18. 10:49
1540~1660년에 전쟁을 야기한 가장 큰 원인은 종교적 갈등이었다.
전쟁은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540년대부터 1555년까지의 독일 Germany 종교전쟁, 1562~1598년 프랑스 France 종교전쟁, 1566~1609년 네덜란드 Netherlands와 에스파냐 España의 전쟁, 그리고 1618~1648년 독일의 30년 전쟁이 그것이다.
종교전쟁(1540년대~1648년) | |
독일의 종교전쟁 프랑스의 종교전쟁 네덜란드와 에스파냐의 전쟁 30년 전쟁 |
1540년대~1555년 1562~1598년 1566~1609년 1618~1648년 |
○1555년까지의 독일 전쟁
독일에서 가톨릭 Catholic과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의 전쟁은,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신성로마제국 Holy Roman Empire 황제 카를 5세 Emperor Karl V가 루터교 Lutheran를 영토 안에 받아들인 여러 독일 제후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고 독일을 가톨릭으로 다시 통일시키려고 했던 1540년대에 시작되었다.
주목할 만한 승리를 몇 차례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를 5세의 프로테스탄트 제후 진압 시도는 실패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가 동시에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 독일 내부 문제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패배시키는데 성공할 경우 자신들의 독립성마저 억압할 것이라고 두려워 한 독일의 가톨릭 제후들 때문이었다.
따라서 외국 태생의 카를 5세에 대한 가톨릭 제후들의 지원은 매우 미온적이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한편이 되어 황제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므로 종교전쟁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 The Peace of Augsburg(1555)에서 절충적 해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지배자에 따라 종교도 결정된다 Cujus regio, ejus religio(영어 Whose realm, his religion)"는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루터교를 믿는 제후가 통치하는 공국에서는 루터교가 유일한 국교가 될 것이고 가톨릭교도 제후가 통치하는 공국에서는 가톨릭이 유일한 국교가 됨을 뜻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가톨릭 통치자들이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합법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자유도시(종교적 관용이 예외적으로 인정되었다)보다 큰 규모의 주권 국가는 종교적 다양성을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앞날의 불길한 사태를 예감케 했다.
더욱이 칼뱅주의 Calvinism를 철저히 소외시킴으로써 독일 칼뱅주의자들을 현 상황 status quo(영어 the existing state of affairs)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자로 돌려놓았다.
○프랑스 종교전쟁의 배경
1560년 이후 유럽의 종교전쟁은 점점 더 잔인해졌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전투에 참가한 양 진영이 한층 더 비타협적으로 변해갔기 때문이었고(통상 칼뱅주의자와 예수회 수도사가 양 진영을 이끌어갔다), 또 다른 이유는 지역적·정치적·왕조적 적대감 때문에 종교전쟁의 양상이 후기에 접어들어 악화일로를 걸었기 때문이다.
주네브 Genève(영어 제네바 Geneva)가 프랑스 접경 지역에 위치했고 칼뱅 Calvin 자신이 조국의 개종을 갈망한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유럽 종교전쟁의 비극이 연출될 다음 무대는 프랑스 땅이었다.
칼뱅주의 선교사들은 1541년(주네브에서 칼뱅이 집권한 해)부터 종교전쟁이 발발한 1562년 사이에 이미 프랑스에서 교두보를 확보해둔 상태였다.
1562년에 이르러 프랑스 인구의 10~20퍼센트가 칼뱅주의자(위그노 Huguenot: 16~17세기 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였고 그 수는 나날이 늘어갔다.
프랑스의 칼뱅주의 확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프랑스 귀족 여성의 칼뱅주의 개종이었다.
귀족 여성들은 빈번히 남편—그는 대규모 사병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을 개종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피레네 산맥 Pyrenees에 위치한 소왕국 나바라 Navarra의 여왕이었던 잔 달브레 Jeanne d'Albret를 들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인 프랑스 대귀족 앙투안 드 부르봉 Antoine de Bourbon과 형부인 콩데 공작 Duke of Condé 두 사람을 칼뱅주의로 개종시켰다.
콩데 공작은 1562년 내란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의 위그노를 통솔했고 그의 이러한 역량은 이후 잔 달브레의 아들인 나바라의 앙리 Henry에게 이어졌는데, 앙리는 1589년 앙리 4세 Henry IV로 즉위해 프랑스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칼뱅주의는 프랑스 왕국 특히 남프랑스에서의 장기간에 걸친 지역적 적대감에 의해 성장한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 남부는 13세기의 알비주아 십자군(알비주아파 Albigeois를 토벌하기 위해 로마 교회가 파견한 십자군으로서 주로 북부·중부 프랑스의 귀족들이 참가)으로 촉발된 상처가 낫지 않은 채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1562년까지 프랑스의 가톨릭 진영과 칼뱅주의 진영은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1562년 프랑스 왕은 예기치 않게 어린 아들을 후사로 남겨놓은 채 죽었다.
즉각 위그노인 콩데 공작과 극렬 가톨릭인 기즈 공작 Duke of Guise이 섭정 여부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은 공히 프랑스가 오직 하나의 왕과 신앙과 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정치 투쟁은 즉각 종교 투쟁의 양상을 띠었고 이내 프랑스 전체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미쳐 날뛰는 폭도들—종종 성직자의 선동에 넘어갔다—은 교회를 약탈하는가 하면, 혼란을 틈타 지방 차원의 원한을 해소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위그노는 승리를 거둘 만큼 막강하지 않았고 수적으로 우세하지도 않았지만, 패배 당하기에는 너무나 막강했다.
특히 남부 프랑스의 거점에서는 난공불락이었다.
따라서 간헐적인 휴전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상당한 인명을 희생시켜가면서 1572년까지 질질 끌었다.
1572년에 휴전이 성립되었고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나바라의 앙리가 프랑스 왕의 여동생(가톨릭교도)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에서 평소 타협을 선호하던 교양 있는 여성인 대비大妃 카트린 드 메디시스 Catherine de Médicis가 변덕을 부렸다.
그녀는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 가톨릭인 기즈파와 결탁해 자신의 딸과 나바라의 앙리 결혼식 참석차 파리에 모여든 위그노 지도자들을 모조리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Feast of St. Bartholomew(8월 24일) 이른 새벽 위그노 지도자들 대부분은 침대에 누운 채 살해당했고, 2,000~3,000명에 달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 폭도에 의해 거리에서 학살되거나 센 강 the Seine에 던져졌다.
파리에서의 학살 소식이 지방으로 전해지자 프랑스 전역을 휩쓴 피에 굶주린 광란 속에서 1만 명 이상의 위그노가 죽었고, 나바라의 앙리는 갓 결혼한 신부와 함께 도피했다.
1572년 이후 갈등은 새롭고도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빠져 들어갔다.
용의주도한 정치력을 가진 나바라의 앙리가 앙리 4세(재위 1589~1610)로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 부르봉 왕조 Maison de Bourbon(영어 House of Bourbon)—이 왕조는 1792년까지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다—를 창설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내전은 끝을 맺었다.
1593년 앙리 4세는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면서 인구 다수를 점유하던 프랑스 가톨릭을 회유하고자 자신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1598년 낭트 칙령 Edict of Nantes을 발표해 위그노에게 제한된 형태이나마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낭트 칙령에 따라 가톨릭은 왕국의 공식 종교로 인정받았고 가톨릭교도는 프랑스 전역에서 종교적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위그노 귀족은 자신의 성 안에서 개인적으로 프로테스탄트식으로 예배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 밖의 위그노들도 (주교나 대주교가 거주하는 파리 및 모든 지방 도시를 제외한) 한정된 지역에서 예배 보는 것이 용인되었다.
그리고 위그노는 군사적 방어가 필요할 경우 남부 일부 소도시들에서 요새를 구축하는 것을 허용받았다.
위그노는 또한 모든 공직에 취임할 권리와 아무런 제한 없는 대학 입학 및 병원 출입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낭트 칙령은 절대적인 종교의 자유를 용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종교적 관용을 향한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두 개의 신앙을 가진 하나의 왕국을 창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칙령은 프랑스 왕국을 두 개의 종교 문화권으로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부 및 서부 프랑스에서 위그노는 그들이 선임한 재판관이 주관하는 독자적 법정을 갖게 되었다.
또한 특정 종교 집단의 구성원은 대립적인 종교를 가진 신도 아래서는 공정한 통치를 받을 수 없다고 간주했기에 양쪽은 실질적인 자치권을 행사했다.
낭트는 그 지역적 특성으로 프랑스 왕국 안에서 지방자치 전통을 용인하는 대표적인 도시가 되었다.
위그노 거주 지역은 어떤 의미에서 국가 안의 국가가 되었고, 그 결과 파리에서는 왕국이 백년전쟁 때처럼 또다시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계속해서 감돌았다.
그러나 낭트 칙령은 그 자체로서는 성공이었다.
종교적 평화가 확립되자 프랑스는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의 참화로부터 신속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비록 앙리 4세가 1610년 가톨릭 광신자의 단검에 쓰러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네덜란드의 반란
네덜란드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도 참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민족적 원한이 종교적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오늘날의 홀란드 Holland(북쪽)와 벨기에 Belgium(남쪽)로 이루어진 네덜란드(또는 저지대 지방)는 거의 1세기 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 가문인 합스부르크가 Haus Habsburg(영어 House of Habsburg)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런데 남부 네덜란드는 무역과 제조업으로 크게 번영하고 있었고, 남부 네덜란드인은 전 유럽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소득을 누리고 있었다.
중심 도시인 안트베르펜 Antwerpen은 북유럽의 주도적인 상업 및 금융 중심지였다.
더욱이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 Karl V(재위 1519~1556)의 반세기에 걸친 통치는 인기가 높았다.
왜냐하면 벨기에 도시 겐트 Gent(영어 Ghent)에서 출생한 카를 5세는 신민에게 친밀감을 느꼈고 상당한 수준의 지방자치를 허용해주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행운은 1560년 무렵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카를 5세는 사망 2년 전인 1556년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왕좌를 물러나면서, 헝가리 Hungary와 신성로마제국의 광대한 영토 전부—네덜란드, 에스파냐,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이탈리아의 절반—를 아들 펠리페 2세 Felipe II(재위 1556~1598)에게 물려주었다.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와는 달리 에스파냐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를 에스파냐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를 자신의 거주지로 삼고 에스파냐 중심의 정책을 펼쳤다.
그는 기본적으로 네덜란드를 에스파냐 위주의 정책을 펼치는데 필요한 손쉬운 수입원으로 간주했다.
네덜란드의 부를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해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정부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바짝 죄려고 했다.
그러한 시도는 카를 5세 치세에 네덜란드 정부를 장악했던 지방 유력자들의 반감을 샀다.
게다가 종교 폭풍마저 불어 닥치고 있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의 기나긴 전쟁이 끝난 1559년 이후,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은 가는 곳마다 개종자를 늘려가면서 네덜란드 국경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안트베르펜에는 주네브보다 더 많은 칼뱅주의자가 머물게 되었다.
이런 사태는 반종교개혁 가톨리시즘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펠리페 2세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충돌 전야에 로마 교황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참된 종교와 신에 대한 예배에 지극히 작은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수백 번이라도 나라 전체와 심지어 내 생명까지라도 바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교도의 통치자가 아니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라녜 공 빌렘 Willem van Oranje(자신의 종교적·정치적 성향을 숨기는데 매우 성공적이어서 침묵공 빌렘 Willem de Zwijger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말수가 매우 많은 인물이었다)이 이끈 일단의 지방 가톨릭 귀족은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을 우려한 나머지 칼뱅주의자에게 관용을 허락해달라고 펠리페 2세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필리페 2세가 답변을 주기도 전에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 폭도들이 갑자기 전국에서 가톨릭교회를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성체를 모독하고 성상을 파괴하는가 하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박살냈다.
지역 주둔군이 곧 사태를 수습했지만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영구히 말살하기 위해 알바 공작 Duke of Alba이 이끄는 1만 명의 에스파냐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알바의 지배는 곧 공포정치가 되었다.
군법으로 진행된 알바의 '피의 법정'은 즉각 약 1만 2,000명을 이단 또는 폭동 혐의로 조사했고, 그 가운데 9,000명이 기소되어 2,000~3,000명이 처형되었다.
침묵공 빌렘은 국외로 탈출했고 자유 네덜란드의 모든 희망은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상황은 두 가지 이유로 급속히 변했다.
첫째, 침묵공 빌렘이 투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해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 등지의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원조를 요청했고, 에스파냐 선단의 네덜란드 해역 항해를 방해하기 위해 해적 선단을 조직했다.
둘째, 알바의 폭정은, 특히 이 가증스런 에스파냐인 총독이 강제로 10퍼센트의 판매세를 부과하려 했을 때 빌렘의 대의명분을 돕는 결과를 초래했다.
국내의 민심 이반이 커지자, 1572년 빌렘은 군사전술상의 이유로 북부 네덜란드—당시까지 가톨릭 세력이 압도적이었는데도—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 후 지리적 요인이 전투의 결과를 결정하는 주된 역할을 했다.
에스파냐의 군대는 북부 네덜란드를 되찾으려고 거듭 시도했지만 강과 제방—침략자들은 물이 쏟아져 내릴 위험 때문에 건널 수 없었다—으로 인해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침묵공 빌렘은 1584년에 한 가톨릭교도에게 암살당했지만 그의 아들은 계속 저항을 이끌었고, 마침내 1609년 에스파냐 왕은 휴전에 동의함으로써 북부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그사이 전쟁과 박해의 고통을 겪으면서 북부 네덜란드 전체(위 지도에서 위쪽 연두색의 네덜란드 연합)는 칼뱅주의로 개종했고, 남부 네덜란드(위 지도에서 아래쪽의 진노랑의 에스파나령 네덜란드와 주황색 및 갈색의 주교구 2곳)는 계속 에스파냐의 지배 아래 머물면서 가톨리시즘으로 복귀했다.
○잉글랜드의 에스파냐 무적함대 격파
종교 투쟁은 프랑스에서처럼 내전 형태를 취하거나 네덜란드에서처럼 정치적 반란의 성격을 띨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16세기 말 잉글랜드와 에스퍄냐 사이에 벌어진 싸움처럼 주권 국가 사이의 전쟁으로 폭발할 수도 있었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메리 여왕 Queen Mary(메리 1세 Mary I)과 그녀의 남편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 의한 박해의 세월을 겪은 뒤,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은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재위 1558~1603)의 통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이 펠리페 2세와 반종교개혁에 큰 적대감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잉글랜드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에스파냐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무역 및 해상 활동에 종사한 잉글랜드인은 16세기 말에 에스파냐의 해상 지배권 및 상업적 패권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고, 잉글랜드와 저지대 지방 사이의 무역활동—상당히 수지맞는 사업이었다—을 봉쇄하려는 에스파냐의 시도에 저항했다.
그러나 적대감의 가장 큰 원인은 대서양에 있었다.
잉글랜드의 해적선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암묵적 동의 아래 은을 가득 실은 에스파냐의 보물수송선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가 네덜란드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것을 구실 삼아, 프랜시스 드레이크 Francis Drake와 존 호킨스 John Hawk 같은 잉글랜드의 제독과 해적(사실상 '제독'과 '해적'은 서로 바꿔 부를 수 있는 용어였다)들은 공해상에서 에스파냐 선박들을 약탈했다.
약탈 항해는 특히 1577~1580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드레이크는 유리한 풍향과 재물에 대한 탐욕을 추동력 삼아 세계 일주 항해를 하면서 엘리자베스 1세의 일 년 수입의 두 배에 해당하는 에스파냐 보물을 약탈해 귀국했다.
그것만으로도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 응징에 나서기에 충분한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1585년에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반란자들과 공공연한 동맹을 맺은 뒤에야 비로소 잉글랜드 침공을 결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느릿느릿 움직였고 조심스럽게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588년에 펠리페 2세는 오만한 브리타니아인 Britannian을 응징하기 위해 '무적함대 Armada Invencible(영어 Invincible Armada)'로 불린 대함대를 자신만만하게 파견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해협에서 최초의 무승부 전투를 치른 뒤, 길다란 포신의 대포를 장착한 잉글랜드 소형 전함들은 에스파냐의 갈레온 선 Galleon 상당수를 불길에 휩싸이게 했고, 나머지 배들은 진형에서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싸움의 마무리는 '프로테스탄트 강풍 Protestant gales'이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브리튼 섬을 돌아 항해한 에스파냐 함대는 선박 중 거의 절반을 잃고 기가 꺾인 채 귀항했다.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패배로 끝난 이 칼레 해전 Naval Battle of Calais은 서양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만일 에스파냐가 잉글랜드를 정복했다면 에스파냐는 다음 차례로 네덜란드를 분쇄하러 갔을 것이고, 유럽 다른 지역에서도 프로테스탄티즘을 파괴했을 것이다.
유럽의 프로테스탄트는 구원을 얻었고, 머지않아 에스파냐의 국력은 기울기 시작했으며,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선박들은 해상권을 장악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애국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그러지 않아도 인기가 많았던 '훌륭한 여왕 베스 Good Queen Bess'는 1603년 사망할 때까지 신민에게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받았고, 잉글랜드는 영문학의 황금기인 '엘리자베스 시대 Elizabethan Era'를 열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은 1604년까지 결말을 짓지 못한 채 질질 끌었지만, 이 전쟁은 잉글랜드에는 아무런 심각한 재해도 초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전쟁은 잉글랜드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여왕, 그들의 조국,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에 충성을 바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30년 전쟁
1598년의 낭트 칙령 공포, 1604년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강화, 1609년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휴전 등으로 서북 유럽의 종교전쟁은 일시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1618년에 도다시 새로운 큰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번에는 독일이 그 무대였다.
이 전쟁은 1648년까지 거의 중단 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30년 전쟁으로 알려졌다.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이 전쟁에 참전해 독일 땅에서 서로 싸웠다.
한편 1640년대에는 에스파냐, 프랑스, 잉글랜드의 국내에서 불만이 폭발해 내전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1643년에 잉글랜드의 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격동의 시기이며, 이 격동은 전 세계적이다."
30년 전쟁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발발한 전쟁으로 처음에는 종교적 열정의 뒤범벅 속에서 시작되었지만 종국에는 국제적 투쟁으로 끝났는데, 투쟁 과정에서 애초의 종교적 동기는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다.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와 1618년의 전쟁 사이의 시기에 칼뱅주의자들이 독일의 몇몇 영방에서 루터파를 대체한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전반적인 균형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617년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재위 1617~1637)—폴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가톨릭교도 왕—가 프로테스탄트 영토인 보헤미아 Bohemia의 왕위에 오르자 1618년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철저한 프로테스탄트인 보헤미아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거부했고, 그가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의 가톨릭 세력은 처음에는 보헤미아에서, 나중에는 독일 전역에서 무자비한 반격을 감행했으며, 그들을 이끈 페르디난트 2세는 161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들의 기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10년도 못 가 독일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송두리째 뿌리 뽑힐 것만 같았다.
페르디난트 2세가 성공을 거두자 독일 제후들은 지나치게 강력해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불문하고 제후들 모두의 정치적 자치권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그래서 1630년 루터파인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 Gustav II Adolf(재위 1611~1632)—북방의 사자 Lion of the North—가 프로테스탄티즘의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 독일로 진군했을 때 독일의 많은 가톨릭 제후들은 그를 환영했다.
그들은 페르디난트 2세에게 주권을 양도하기보다는 차라리 기존의 종교적 균형이 회복되기를 원했다.
사태를 더욱 아이러니하게 만든 것은, 구스타프의 프로테스탄트 군대가 가톨릭 프랑스—당시 프랑스는 가톨릭교회의 리슐리에 추기경 Cardinal de Richelieu 지배 아래 있었다—로부터 비밀리에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합스부르크 에스파냐가 독일에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리슐리외는 프랑스가 어떤 경우에도 북쪽, 동쪽, 남쪽의 막강한 합스부르크 동맹에 의해 포위되는 사태만은 막아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어찌 됐건 군사적 천재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1632년 전투 중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리슐리외 추기경은 1639년 독일에 남은 스웨덴 군대에 추가 지원을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급기야 프랑스군이 스웨덴군과 한편이 되어 직접 전쟁에 투입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639년부터 1648년까지 이 전쟁은 사실상 오스트리아·에스파냐 대 프랑스·스웨덴의 전쟁이 되었고, 무기력한 독일은 한낱 전쟁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은 1618~1648년의 끔찍한 전쟁 기간 동안 전무후무할 정도로—20세기를 제외하면—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독일의 여러 도시는 9~10번 이상 포위, 약탈을 당했으며, 모든 참전국 병사는 약탈을 통해서라도 군사력을 유지해야 했기에 방어 능력 없는 민간인들을 무참히 살육했다.
공공연한 살육 행위로 인한 희생자에 더해 전염병과 질병의 희생자까지 발생했고,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한 지역도 있었지만 독일 몇몇 지역에서는 인구가 절반 이상 줄었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전쟁 막바지 4년 동안의 인명 손실이었다.
평화 협상단에 의해 협약의 윤곽이 잡히고 부수 조항을 타결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량 살육이 계속해서 자행되었던 것이다.
1648년 30년 전쟁을 종식시킬 베스트팔렌 조약 Westfälischer Friede(영어 Peace of Westphalia)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그것은 분명 유럽사에 불멸의 이정표를 세우기는 했지만 어마어마한 인명 희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먼저 국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가 에스파냐를 대신해 유럽 대륙에서 막강한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후 프랑스는 그 지위를 2세기 동안 유지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독일인을 제외하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였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에서 얻은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이용해 중부 유럽을 지배하려던 야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독일에서는 1618년과 흡사한 상황이 재연되었다.
독일 북부에는 프로테스탄트 공국들이, 남부에는 가톨릭 공국들이 들어선 것이다.
독일은 너무도 가망 없이 산산조각으로 분열되어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사에서 통합된 세력으로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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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18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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