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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 데스 매치에서 세계인의 축제로

새샘 2024. 12. 21. 15:48

오늘날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대표적인 스포츠를 하나 뽑으라면 단연 축구일 것이다.

올림픽 이외에 단일 종목 행사로 월드컵 FIFA World Cup만큼 전 지구를 들썩이게 하는 스포츠 행사도 드물다.
의외의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축구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본격적인 규칙이 등장한 것도 약 150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축구를 '둥근 공을 차는 놀이'로 확장해 그 기원을 살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공차기는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 이래 줄곧 해온 놀이로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공놀이는 이집트 Egypt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축구의 기원과 축구가 오늘날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을 두루 살펴보자.
 
 

○동서양에서 고루 발현한 인류 최초의 공놀이

 

마야의 치첸 이트샤 볼 경기장(출처-출처자료1)

 
마야문명 Maya civilization의 공놀이는 경기에서 지면 목숨을 잃었다.
팀을 가르고 운동장 벽에 달린 골대에 골을 넣는 경기를 했는데, 경기에서 진 사람들은 인신 공양 제물로 바쳐졌다.
흔히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는 경기를 '데스 매치 death match'라고 부르는데, 고대 마야인들에게는 단순한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야인들은 공놀이를 할 때 사용한 공이 태양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이들에게 공을 주고받는 행위는 곧 빛과 어둠의 세계를 은유했다.

지금까지 중남미 대륙에서는 고대인들이 공놀이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장이 1,500개가 넘게 발견되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길이 96미터에 너비 30미터에 달하는 치첸 이트사 Chichén Itzá  유적이다.
이곳은 오늘날 축구 경기장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중국 신장성 샨샨 양하 유적에서 발견된 축구 관련 유물들(출처-출처자료1)

 
또 다른 공놀이의 발상지는 유라시아 초원이다.
드넓은 초원에서 목축을 했던 이들에게 공놀이는 무척 자연스러운 놀이였다.
처음에는 동물의 오줌보를 차고 놀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내구성이 있는 가죽으로 공을 만들어 사용했다.
땅 위에서 하던 공놀이는 이윽고 말 위에서 공을 두고 겨루는 경기로 발전했다.
마상馬上에서 이루어진 공놀이는 '격구擊毬'라고 불리며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최근까지 페르시아 Persia에서 기원한 줄 알았던 마상 경기의 기원이 사실은 실크로드(비단길) Silk Road임이 유물을 통해 밝혀졌다.

중국 신장성(신강성) 샨샨 양하이(양해洋海) 유적에서는 약 3,2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목민들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무덤에서는 다양한 마구와 함께 공이 발견되었다.
속에 동물의 털을 채워 넣고 겉은 가죽으로 감싼 형태의 공이었다.
공 표면에는 팀을 구분이라도 하듯 붉은 줄을 둘러놓기도 했다.
심지어 지금도 사용이 가능할 법한 스틱 stick까지 발견되었다.
 
실크로드 초원에서 이루어진 인류 최초의 공놀이가 어떤 규칙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아직 알 도리가 없다.
다만 무덤의 주인공들이 어떤 모습인지는 짐작해볼 수 있다.
이들의 시신 중 일부가 미라 형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20대에서 40대 초반으로 추측되는 시신의 팔뚝에는 문신이 그득했다.
공놀이 선수들은 자신만의 문신을 뽐내며 초원을 힘차게 누볐을 것이다.
 
북방 유목 민족들이 즐기던 공놀이는 서양의 폴로 polo, 동양의 격구로 그 명맥이 이어졌다.
고대에 제작된 공은 대개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탄성이 좋은 고무가 공의 재료로 쓰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추정하면 이들이 사용했던 스틱도 40센티미터 정도로 길이가 짧은 편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던대 마상에서 공놀이를 하려면 말을 탄 상태에서 몸을 거의 땅바닥에 닿을 만큼 엎드려 볼을 튕길 줄 아는 재주가 필요했을 것이다.
즉, 북방 유목 민족들이 마상 경기를 즐겼다는 사실은 이들이 최고의 기마술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같은 맥락에서 조선시대 무과 시험에서 가장 통과하기 어려웠던 관문은 격구였다.
약 3,000년 전 실크로드 초원에서 시작된 마상 공놀이는 강인한 전사의 상징이었다.
 
 

○현대 축구의 원형, 중국에서 시작되다

 
현대 축구와 가장 비슷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공놀이는 축국蹴鞠은 서기전 4세기에서 서기전 3세기 무렵 사이에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북방 초원에 살던 유목 민족에게서 기마술을 받아들이면서 마상 공놀이도 같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말 위에서 하는 공놀이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이내 자신들에게 걸맞은 방식으로 마상 공놀이를 진화시킨다.
 
축국은 네모난 경기장에서 동그란 공을 차는 방식이었기에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철학을 구현한 놀이로 여겨졌다.
심판을 엄정히 볼 것을 맹세한 '축국의 맹세'도 사료로 전해진다.
중국인들의 축국에 대한 애호가 얼마나 지극했는지 약 2,200년 전 항처項妻라는 사람은 탈장으로 몸을 쉬어야 한다는 순우의淳于意(한나라 시대 명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축국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을 정도라고 한다.
 
이후 축국은 한반도로도 전해져 발해와 신라 그리고 일본에까지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에도 축국과 관계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혼인 동맹에 관한 이야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는 어느 날 김유신의 집에서 축국을 하게 된다.
김유신은 축국을 하던 도중 고의로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끊어지게 만들고 자신의 집에서 수선을 하라고 권한다.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를 불러 김춘추의 옷을 꿰매게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에 자주 왕래하게 되고 이후 김춘추와 김유신은 혼사를 통해 한 집안사람이 된다.
 
삼국시대에 꽤 인기 있던 축국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그 인기가 수그러든다.
마상 공놀이인 격구가 무과 필수 과목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짐작건대 축국은 신체가 부딪쳐야 하고 다툼이 많은 놀이라 성리학적 유교 사회에서는 크게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민간에서는 축국 대신에 편을 갈라서 돌을 던지며 싸우는 석전石戰이 유행했다.
 
 

○폭력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현대 축구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스포츠였다.
영국 킹스턴 어폰 템스 Kingston Upon Thames와 체스터 Chester 지역에서는 전쟁 중에 베어버린 덴마크 왕자의 머리로 축구 경기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중국에도 있는데, 황제가 치우蚩尤(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인물)와 전쟁을 하고 승리한 뒤 그의 머리를 차면서 기념했다고 전해진다.
동서양 양쪽에서 비슷한 전설이 내려오는 까닭은 (잔인한 상상이지만) 공이 전쟁에서 참수한 적장의 머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중세 이후 공놀이가 이루어지는 경기장은 사회적으로 허용된 폭력의 장이었다.
 
가령, 근대적인 축구 경기가 시행되기 전 영국에서는 마을 곳곳에서 공 하나를 두고 아무런 규칙이 없는 상태로 경기가 벌어졌다.
말이 경기이지 집단 난투극에 가까운 몸싸움이었다.

하지만 런 '무규칙 난투 공놀이'를 통해 폭력성이 해소된 측면도 있었다.

축구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종목인 만큼 '훌리건 hooligan'으로 불리는 극성팬들의 난동 사건도 자주 일어난다.
영국에서는 훌리건 난동 때문에 1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맞아 죽은 사건도 벌어졌다(헤이젤 Heysel 구장 사건).
영국 브래드포드 Bradford에서도 대낮의 경기장에서 훌리건들의 행패로 56명이 사망하고 몇십 명이 다치는 상황이 생중계되었다.
 
인류는 축구를 처음 시작한 이래 지역과 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경기 방식을 변경해오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축구가 오랫동안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공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경기인 것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다른 스포츠 종목들에 비해 경기 규칙 또한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승부를 예단할 수 없는 것도 축구의 묘미다.
'공은 둥글다'는 말이 있듯이 발끝을 떠난 공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멈추고 잠시 휴전하는 기간 동안 치러졌다.

올림픽이 평화의 상징인 이유다.

격렬한 몸싸움으로 승부를 낼지언정 살육의 시간을 멈춘 인류는 그 순간 평화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축구 경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 어느 때보다 지구 곳곳에서 국가 간, 민족 간의 갈등이 극심한 요즘, '둥근 공'처럼 '둥근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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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2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