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문명은 짧고 인생은 길다 본문
문명의 멸망이라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문명과 과감히 결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인류 역사의 원동력은 과거 익숙해진 것과의 결별에 있었다.
지리나 환경의 변화를 거부하고 지나치게 이전의 사회나 문화에 집착을 했다면 현생인류는 완전히 멸종되었을지도 모른다.
고고학자들은 폐허를 공부한다.
이집트 Egypt의 피라미드 pyramid나 유라시아 Eurasia의 거대한 고분 또는 그리스 Greece의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경탄하게 하는 이 유적들은 하지만 사실 멸망의 흔적이다.
도대체 이런 유적들을 어떻게, 그것도 몇천 년 전에 만들 수 있었을까?
고고학자들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런 엄청난 기술을 가졌던 그들은 왜 멸망했는가?
○미스터리였던 인더스 문명
문명의 멸망 원인이 적의 침략인가 아니면 기후 환경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인가는 고고학의 영원한 화두이기도 하다.
인더스 문명 Indus Civilization은 이집트 Egypt 문명,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문명, 중국 문명과 함께 대표적인 고대 문명으로 꼽히지만 가장 연구가 덜 이루어진 편에 속한다.
서기전 3500년 무렵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현재 파키스탄 Pakistan에 위치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유명한 하라파 Harappa와 모헨조다로 Mohenjo-daro가 있다.
일찍이 이 지역은 영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20세기 초반부터 널리 알려졌다.
인더스 문명이 전성기에 달한 중기 하라판 시기인 서기전 2500년 무렵에는 약 1,000개 이상의 도시가 인더스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이 강의 지류를 통해서 멀리 메소포타미아와도 교역을 했다.
그리고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를 해서 농사도 발달했다.
성 안의 주거지에는 상하수도가 발달하여 목욕탕과 화장실이 있을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만들었다.
인더스 문명의 주변에는 삼림이 풍부하게 발달해 있었고, 강수자원도 풍부했다.
금속과 귀금속의 매장량도 풍부했으며 바닷가에 인접한 덕에 해산물이나 소금 같은 자원을 얻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교역은 자연스럽게 발달되었다.
그런데 인더스 문명은 서기전 1500년 무렵에 갑자기 사라졌다.
도시는 발달했지만, 궁전이나 무덤 같은 유적은 없었다.
발견된 무덤들은 대부분 너무 소박해서 계급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유적지에는 사원이나 군대의 흔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과거 고고학자들은 인더스 문명의 소멸을 그때 당시 유라시아 초원에서 전차를 타던 아리안족 Aryan들의 침입과 연결지었다.
대표적으로 유라시아 초원에서 강력한 전차를 타고 세계 각지로 진출한 아리안족의 일파가 인더스 문명을 침략했고, 이로 인해 인더스 문명이 멸마했다는 이론이 있다.
실제로 인더스 문명 이후 아리안족들은 리그베다 Rigveda와 산스크리트어 Sanskrit로 대표되는 인도의 고대 문화를 주도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리안족의 침입과 인더스 성터의 멸망이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인더스 문명을 멸망시킬 정도였다면 아리안족에게는 인더스 문명 못지않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흔적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다른 이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은 서기전 2500년 무렵부터 서서히 멸망했다는 이론이다.
인더스 문명은 물길을 따라서 교역을 하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엄청난 토사를 해마다 토해내는 인더스강에 기후 변화가 닥쳐서 갑자기 물길이 바뀌면 그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문명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물길이 바뀌어서 교역을 하던 배가 들어올 수 없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사람들은 재빠르게 각자도생을 구하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고학 자료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서로 전쟁을 했던 흔적이 없고 강력한 왕도 없었다.
그들의 집이나 무덤의 크기도 일정해서 사람들 사이에 계급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러니 강력한 왕의 지시나 전쟁으로 이 도시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원인일 가능성이 적어지자 학자들은 인더스 문명의 멸망을 기후와 환경의 변화에서 찾았다.
모헨조다로 유적을 발굴한 결과 적어도 세 번의 거대한 홍수로 도시를 폐기했다가 수리해서 다시 살았던 흔적이 있다.
또한 기후의 급변으로 가뭄이 극심했던 때가 있었다는 증거도 나왔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주변 농지는 황폐화되고 전염병이 도는 등 삶의 질은 급격히 나빠졌을 것이다.
이것을 현대로 비유해보자.
어떤 도시를 빠른 시간 안에 폐허로 만들어야 한다면?
전쟁을 일으켜 그 안의 사람들이 도망가게 할 수도 있고,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면서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유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도시로 들어가는 수도나 전기, 인터넷을 끊는 것이다.
○문명의 멸망은 또 다른 시작이다.
만주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홍산문화(홍산문화 红山/紅山文化)도 인더스 문명과 비슷하다.
인더스 문명과 비슷한 서기전 4000~3500년에 훙산문화는 번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문명의 차이는 크다.
인더스 문명은 물길을 통한 원거리 교역을 기반으로 상수도가 완비된 성과 도시들이 발달했다.
반면에 훙산문화의 주민들은 움집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는데, 마을 규모는 작았고 성벽을 쌓지도 않았다.
대신에 제사가 고도로 발달한 거대한 무덤과 제단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니우허량[우하량牛河梁: 현재 중국 랴오닝성(요령성辽宁省/遼寧省) 서부에 위치한 링위안시(능원시凌源市)의 북쪽에 있는 대규모의 훙산문화 유적지]에서는 피라미드형 돌무덤과 지름 몇백 미터에 이르는 제단과 무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진흙으로 빚은 여신상을 모신 여신묘 신전 등 대형 제사유적지 16곳이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정작 이상한 건 유적의 100킬로미터 이내에서 사람들이 살 만한 성터나 마을이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니우허량 일대는 제사만을 지내는 성스러운 지역이었던 것이다.
제사신전이 거의 없는 인더스 문명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멸망의 과정만은 인더스 문명과 흡사하다.
훙산문화는 서기전 2700년 이후에 갑자기 사라졌고, 거대한 니우허량의 제사터는 그냥 버려졌다.
니우허량의 제사터들은 지금도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는데, 훙산문화 이후 다른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던 흔적은 전혀 없다.
훙산문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 제사터를 완전히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훙산문화와 인더스 문명의 경우처럼 꼭 전쟁이 아니어도 기후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개별 문명을 일시에 소멸시키는 역할을 하다.
문제는 이후 생존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환경에 지나치게 의존했다가 바뀐 환경에 대응하지 못한 경우다.
인류의 기원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s(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Homo neanderthalensis)의 운명이 그러하다.
현생인류(슬기사람 즉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의 등장과 함께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운명에 대해서도 몇십 가지의 가설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지나치게 추운 환경에 적응했던 네안데르탈인의 특성을 그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즉, 네안데르탈인은 지나치게 추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에 정작 기후가 온난해지자 그 특성이 단점이 되어 현생인류에 밀려서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거의 절대적이다 싶을 정도로 전자기기와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갑자기 인터넷과 같은 매체가 사라져버리면 인간이 쌓아 놓은 문명은 순식간에 붕괴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문명이 가진 유한성은 뉴욕 New York에서 활동했던 비디오 전위예술가 백남준의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서 1003대의 텔레비젼 브라운관을 이용해 만든 <다다익선>은 과천현대미술관을 대표했던 작품이다.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을 압도하는 18미터 높이의 웅장함은 물론이고, 각각의 브라운관에서 나오는 다양한 영상은 그 자체로 현대 사회를 상징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30년을 버티지 못했다.
모든 전자제품에도 수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설치 이후 브라운관의 연한이 다하면서 고장이 빈번해졌고, 브라운관을 공급할 기술마저 찾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전력 소비에 따른 합선 위험이 커지면서 결국 2018년, <다다익선>의 스위치는 꺼졌다.
백남준 본인도 자신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생전에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대변했다.
다시 훙산문화로 돌아가보자.
훙산문화의 다음에는 거대한 제단이 사라지고 작은 마을과 무덤만 나오는 샤오허옌문화(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 훙산문화의 뒤를 이은 신석기시대 문화로서 서기전 2700~2200년 존속)가 이어졌다.
샤오허옌문화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며 살았다.
당시 기후가 극도로 추워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급격히 줄었고, 마을도 작아졌다.
이렇게 바뀐 환경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제단을 공동으로 건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신에 지름이 3미터밖에 안 되는 조그만 움집 안에 다양한 부적과 신상들을 모셨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샤오허옌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과 토기는 훙산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잇고 있었다.
훙산문화에서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작은 마을 단위로 그 전통을 지켜나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샤오허옌문화는 기후와 환경의 변화로 인해 훙산문화가 쇠퇴한 결과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샤오허옌문화는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도기였다.
샤오허옌문화는 중앙 집중화된 제사 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에 작은 마을로 쪼개져서 각 마을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변화는 결국 제사장 중심의 사회에서 탈피하여 지역 공동체 간 네트워크가 강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에 기후가 다시 온난해지는 서기전 2000년 무렵부터 도시를 만들었던 샤자덴하층문화(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의 사람들은 옥기 대신 청동기를 사용했고, 강을 따라서 거대한 성을 몇백 개나 건설했다.
계급도 뚜렷하게 나뉘었고, 평균 수명도 40세 전후에 이를 정도로 연장되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샤자덴하층문화를 중국의 하夏나라(서기전 2700년 무렵~서기전 1600년 무렵)에 비견하는 국가의 등장으로 본다.
요서지역에서 훙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대학 University of Pittsburgh에서 해마다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제까지 한국과 중국에서는 훙산문화가 어느 나라의 것이냐는 소모적인 귀속 논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훙산문화의 숨겨진 또 다른 가치는 바로 그 소멸과정에 있었다.
훙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작게 쪼개진 마을들로 흩어졌고, 그 결과 훙산문화의 옥玉을 만드는 기술과 제사의 풍습은 이후 시대로 확산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버려진 훙산문화의 제사 유적은 고대인들의 현명한 삶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화려한 것만이 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가 늘 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삶은 항상 성공한 채로, 늘 실패한 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때문에 성공했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실패했다고 해서 낙담할 게 없다.
중요한 건 마음에 달려 있다.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실패했을 때 기꺼이 물러날 줄 안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은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생존해서 살아 있다면 결국은 더 큰 꽃을 피우며 재탄생될 수 있다.
우리의 삶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 세계는 좀 더 깊고 단단해질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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