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려 사경 "법화경 보탑도" 본문
"사경을 할 때는 모름지기 이렇게 하였다"
책 가운데서도 기독교와 불교의 경전은 인쇄와 장정裝幀/裝訂(책의 겉장이나 면지面紙, 도안, 색채, 싸개 따위의 겉모양 꾸밈새)에 갖은 정성을 다하였다.
오늘날 기독교의 성경책은 인쇄본이지만 15세기 구텐베르크 Gutenberg의 금속활자 발명 이전에는 직접 손으로 베꼈다.
활판 인쇄 발명 이후에도 수도원에서는 고급 필사본으로 제작하여 성경의 성스러움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불경도 마찬가지다.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진 불교 경전은 나무껍질에 썼다고 해서 패엽경貝葉經이라 불렀다.
8세기에 목판 인쇄본이 등장하였음은 석가탑에서 출토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본인 <무구광정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말해준다.
불경의 목판 인쇄는 13세기에 제작된 해인사 팔만대장경에 이르러 그 성대함을 여실히 보게 된다.
인쇄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불경을 직접 손으로 베껴 쓰는 사경寫經의 전통은 계속되었다.
사경은 고급 장식경裝飾經이자 하나의 의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사경에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가는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신라백지묵서新羅白紙墨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花嚴經≫(755)의 발문에서 밝힌 제작 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뿌리에 향수를 뿌려 키운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아서 종이를 만든다. ······
경전을 필사하는 사람은 모두 보살계를 받았고 대소변을 보거나 잠을 자고 난 뒤, 밥을 먹은 뒤에도 반드시 향수를 사용하여 목욕하였다.
숙소에서 사경 장소로 갈 때는 청의靑衣동자 둘을 앞세우고, 네 사람의 악사가 음악을 연주하며, 길에는 꽃과 향수를 뿌리고, 법사는 뒤에서 범패를 부르며 따라온다.
도착한 뒤에는 삼귀의三歸依(불법승에 귀의함)를 외우고 삼배를 올린 다음 필사筆寫(베끼어 씀)했다.
필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도 청의동자와 악사만 제외하고 올 때와 똑같이 했다."
참으로 정성이 지극한 의식이 아닐 수 없다.
사경에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것은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묘법연화경妙法蓮華慶≫(줄여서 '법화경法華經'이라 함)에서는 사경을 적극 권장하여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법화경을 얻어 들고, 스스로 쓰거나 또는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하면 부처님의 공덕을 입는 것이 이루 헤아려 끝이 없느니라."
이를 '사경공덕寫經功德'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많은 사경공덕이 이루어져 감지紺紙(검은빛이 도는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물(금니金泥)로 써서 일곱 권의 절첩折帖(두루마리식으로 길게 이은 종이를 옆으로 적당한 폭으로 병풍처럼 접고, 그 앞과 뒤에 따로 표지를 붙이는 장정)으로 꾸민 ≪법화경≫이 여러 점 전한다.
그중 일본 교토(경도京都)의 도지(동사東寺)에 소장된 <법화경法華慶 보탑도寶塔圖>는 고려시대 때 사경 제작에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작품이다.
얼핏 보면 감지에 금물로 7층탑을 그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법화경≫ 전 7권의 내용을 글씨로 써서 7층 보탑도를 그린 것이다.
상륜부에는 지붕골과 탑신부의 기둥을 거쳐 기단부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법화경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여백에는 흩날리는 꽃, 비천飛天(천녀天女: 하늘을 날아다니며 하계 사람과 왕래한다는 여자 선인), 공양보살 등으로 장식하고 탑신부에는 화불化佛(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변화한 불신佛身)을 그렸는데 고려불화의 유려한 필치가 그대로 살아 있다.
특히 법화경 구절로 쓴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름자락에 이르러서는 그 정성과 공력이 극에 달했음을 볼 수 있다.
후대에 가면 280자로 이루어진 ≪반야심경般若心經≫ 같은 짧은 경문을 탑의 윤곽선을 따라 쓴 것이 나오지만 이 <법화경 보탑도>처럼 탑신부는 물론 상륜부와 기왓골까지 모두 글씨를 새긴 엄청난 공력의 작품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법화경 보탑도> 화면 아랫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간절한 마음의 화기畵記(불화를 제작할 때의 시기, 장소,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을 기록한 글)가 쓰여 있다.
"기유년 12월 신효사神孝寺 전향도인典香道人이 전란을 물리쳐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불법의 신령스러움이 가득하기를 더없이 기원한다."
여기서 기유년은 1249년(고종 36)으로 몽골과의 전쟁이 치열할 때다.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마음이 그렇게 글자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것이다.
화기에서는 이 그림을 "법화탑法華塔"이라고 했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구글 관련 자료
2024. 12. 17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명은 짧고 인생은 길다 (5) | 2024.12.19 |
---|---|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2: 종교전쟁의 세기 (5) | 2024.12.18 |
천연두와 천연두접종 그리고 우두접종 (2) | 2024.12.13 |
씨름 - 업어치고 메어치는 가운데 하나가 되다 (2) | 2024.12.10 |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1: 서론 및 경제적·종교적·정치적 시련 (4) | 2024.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