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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1: 서론 및 경제적·종교적·정치적 시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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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1: 서론 및 경제적·종교적·정치적 시련

새샘 2024. 12. 7. 21:40

14장 서론

 

지금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지만,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을 깨뜨릴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정확한 자국어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읽고 해석할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루터는 그 결과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츠빙글리 Zwingli 및 칼뱅 Calvin과의 논쟁 과정에서 금방 깨달았다.

또한 루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가톨리시즘(가톨릭교, 천주교) Catholicism은 개혁자들의 가르침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의 종교 분열은 복잡해졌고 정치적 노선을 따라 급속히 결집했다.

1546년 루터가 사망하던 무렵에는 분명한 양상이 이미 드러났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정치권력이 종교개혁자를 지원한 지역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그리스도교, 개신교) Protestantism이 승리를 거두었고, 지배자들이 가톨리시즘을 고수한 지역은 가톨릭으로 남았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으나 16세기 유럽인 삶의 기본 전제를 충실히 반영해준 것이다.

재세례파를 예외로 하면 프로테스탄트(그리스도교도, 개신교도, 신교도) Protestant 개혁자와 가톨릭교도 Catholic 개혁자 모두 종교와 정치의 상호의존성에 관한 중세의 일반적인 믿음에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16세기 유럽인은 국가의 올바른 역할은 신민에게 참된 종교를 강제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16세기의 지배자들은 종교적 다원주의가 국가의 통합과 충성심을 해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두 진영은 서유럽이 정치권력에 의해 강제된 단일한 종교 신앙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이 동의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어떤 신앙이며 어떤 권력인가였다.

 

그리하여 1540~1660년 사이에 잔인한 종교전쟁이 일어났고, 그 여진은 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감지되었다.

엄청난 희생과 파괴를 가져온 이들 전쟁은 농민에서 군주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원인이 종교 갈등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주의, 왕조주의, 민족주의 등도 유럽이 혼돈에 빠져드는데 일조했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은 13세기 이후 형성된 유럽 정치 질서가 과연 존속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1660년에 이르러 정치적 붕괴의 전망에 직면한 유럽인은, 1540년이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개념—종교적 관용—을 점진적으로 그리고 마지못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적 관용은 그 범위가 제한적인 것일지라도 유럽 세계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경제적·종교적·정치적 시련

 

1540년부터 1660년까지 한 세기 동안 유럽인은 엄청난 고통에 휘말려들었다.

15세기 중반 유럽은 점진적인 경제 성장을 누렸고 신대륙의 발견은 더 큰 번영의 토대가 될 것처럼 보였다.

정치적 추세의 조짐도 좋았다.

대부분의 서유럽 정부는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었고 신민에게 국내 평화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먹구름이 밀려와 가공할 폭풍우가 불어닥쳤다.

 

 

○가격혁명

 

16세기 중반에 밀어닥친 폭풍의 여러 원인은 상호 연관되어 있었지만 각각의 원인을 분리해서 검토해보자.

먼적 가격혁명부터 살펴보자.

16세기 후반 서유럽에 휘몰아친 물가 상승 추세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플랑드르 Flandre(영어: 플랜더스 Flanders)의 밀 가격은 1550년에서 1600년 사이에 3배나 올랐다.

파리 Paris의 곡물 가격은 4배로 뛰었으며, 같은 기간에 잉글랜드 England의 생활비는 2배 이상 올랐다.

물론 20세기에는 이보다 더한 인플레이션(인플레, 통화팽창) inflation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말의 물가 폭등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를 '가격혁명 Price Revolution'이라 부른다.

 

치솟은 물가의 배후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인구 증가다.

페스트(흑사병) pest로 인한 인구 감소가 있은 뒤 15세기 말부터 유럽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1450년 무렵 약 5,000만 명이었던 유럽의 인구는 1600년 무렵 약 9,000만 명으로 늘었다.

농업 기술이 이렇다 할 발전을 보이지 못했기에 유럽의 식량 공급은 이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고, 수요 증가는 식량 가격의 급등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임금은 정체되거나 심지어 하락했다.

그 결과 1600년 무렵의 노동자는 종전보다 임금의 더 많은 부분을 식량 구입에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양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항(출처-아틀라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25)

 

인구의 증가 추세는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유럽의 인구 증가율은 가격 상승폭만큼 가파르게 치솟지는 않았다.

따라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1556년부터 1560년까지 5년 동안 약 1,000만 더컷 ducat(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 여러 나라에서 사용된 금화로, 이에 상응하는 28.25그램의 은으로 만든 은화를 함께 사용) 상당의 은이 에스파냐 España의 관문인 세비야 Sevilla를 통해 유입되었다.

1576~1580년에는 은 유입량이 2배로 늘어났고, 1591~1595년에는 4배 이상 증가했다.

이 은의 대부분은 에스파냐 왕이 외국 채권자 및 휘하의 외국 군대에 지불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결과 에스파냐의 은도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에 유통되었고 그중 상당량이 화폐로 주조되었다.

이러한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는 가격 상승의 소용돌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1603년 에스파냐를 여행하던 한 프랑스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 와서 한 가지 사실을 배웠다. 여기서는 은을 제외한 모든 것이 비싸다는 것을."

 

공격적인 사업가와 대지주는 변화된 경제 환경으로부터 이득을 얻은 반면, 노동자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지주는 농산물 가격의 상승으로 이득을 취했고 상인은 점증하는 사치품 수요에서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처지는 정반대였다.

임금은 거북이보다 느린데 물가는 토끼처럼 뛰었다.

노동력의 공급이 적정 수준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식품 가격이 여타의 다른 소비재보다 한층 더 높은 비율로 상승했으므로 빈민은 몇 푼 되지 않는 수입의 대부분을 생필품 구입에 소비해야 했다.

전쟁이나 흉작 같은 재앙으로 곡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 빈민 중 일부는 말 그대로 굶어 죽고 말았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대부분의 사람이 끔찍한 고통을 겪는 와중에 일부는 호화판 잔치를 즐기는 모습—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가격혁명은 유럽의 주권 국가들에 새로운 압력을 가했다.

인플레이션이 화폐의 실질가치를 하락시켰기 때문에 세금과 통행세로 들어오는 고정 수입이 점점 줄어들었다.

따라서 정부는 기존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로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상황이 있었으니, 대부분의 국가가 전에 비해 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실질 수입이 필요했고, 언제나 그렇듯이 전쟁비용은 상승하는 추세였다.

그러므로 유일한 방법은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세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혹한 방법은 격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각국 정부는 지속적인 저항과 무장 봉기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1600년 이후 인구 증가 추세가 진정되고 아메리카 은의 유입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가격 상승 속도는 둔화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1600년부터 1660년까지의 기간은 성장기라기보다는 불황기였다.

이례적으로 몇몇 지역—특히 네덜란드 Netherlands—에서만 이런 추세를 거스를 수 있었다.

부자는 그래도 버텨낼 수 있지만 빈민은 어떤 향상도 도모할 수 없었다.

물가와 임금의 상관관계는 여전히 그들에게 불이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반에는 각별히 고비용의 파괴적인 전쟁이 여러 차례 치러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빈민의 운명은 더욱 나빠졌다.

전쟁으로 무력해진 평민들은 탐욕스러운 세금징수원이나 노략질하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당했다.

1660년대에는 흑사병이 다시 번져 런던 등지를 덮쳤다.

 

 

○종교 갈등

 

이 어려운 시기에 전쟁 회수라도 줄어들었더라면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왕에 있던 적개심에다 새롭게 움튼 종교 간의 대립까지 더해지자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간단히 말하면 이 시기가 끝나갈 무렵—종교적 열정이 식기 시작할 무렵—까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은 서로를 불구대천 사탄의 앞잡이로 보았다.

설상가상으로 주권 국가들은 '왕권과 종교'가 서로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 또는 다양한 신앙이 혼재하면 정부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종교적 통일성을 강요했다.

양쪽 지배자들은 지배 영역 안에서 종교적 소수자를 용인하면 틀림없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의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호전적인 칼뱅주의자와 예수회 수도사는 자신들이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지역에서 기득권 세력을 전복하는데 골몰했다.

그러므로 유럽 각국에서는 모든 잠재적인 저항 종교 세력을 근절시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양쪽은 상대방을 절멸시키기 전까지 승리란 있을 수 없다고 믿고 내전으로 치닫곤 했다.

외국 세력이 교전 중인 특정 종교 세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할 경우 내전은 국제적 규모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정치적 불안정

 

앞에서 설명한 여러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주요 유럽 군주국들의 생래적인 취약성이었다.

근대 초기 유럽 주요 국가들은 대부분 중세 말기에 전통적으로 자치권을 누리던 소규모 영토들을 때로는 정복으로, 좀 더 빈번하게는 결혼동맹이나 지배 가문 사이의 상속제도('왕조주의'로 알려진 정책)를 통해 흡수함으로써 성장했다.

흡수 초기에는 새로 편입된 영역에서 일정 정도의 지방 자치권이 유지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1540~1660년에는 각국 정부가 신민 전체에 대해 이전보다 강도 높은 재정적 요구를 하거나 종교적 통일성을 강제했고, 지방이 전통적으로 누리던 자치권을 짓밟곤 했다.

그 결과 또다시 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에는 지역주의, 경제적 불만, 종교적 적대감 등이 복잡하고도 파멸적으로 뒤얽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정부는 종전보다 더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재정 확보와 종교 통일을 추구했으므로, 전통적 자유를 지켜내고자 하는 신민의 무장저항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이렇듯 지극히 다양한 반란의 동기를 생각한다면 1540년에서 1660년에 이르는 한 세기가 전 유럽사에서 가장 험난한 세기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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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