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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 안중식 "백악춘효" "도원문진" "풍림정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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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 안중식 "백악춘효" "도원문진" "풍림정거"

새샘 2024. 12. 6. 11:59

"백악산에 봄날의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안중식, 백악춘효(가을본), 1915년, 비단에 담채, 129.5x50.0cm, 국립중앙박물관(출처-출처자료1)

 

모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고, 시작과 마무리가 잘되어야 본체가 살아난다.

조선왕조 500년 회화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이다..

이 한 폭의 그림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자부심과 기대감을 갖고 조선시대 회화사를 출발할 수 있다.

그러면 마지막 작품으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단언컨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이 1915년에 그린 <백악춘효白岳春曉>이다.

 

안중식의 <백악춘효> 는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있다.

여름과 가을에 그렸으면서도 그림의 제목을 '백악춘효', 즉 '백악산(북악산) 봄날의 새벽'이라고 했다.

빼앗긴 조국에 봄의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인 것이다.

 

제목은 백악산이라고 했지만 실제 그림의 주제는 경복궁이다.

화면 위로는 백악산이 우뚝하고, 그 아래로는 새벽안개가 걷혀가는 경복궁의 근정전, 경회루, 광화문 그리고 해태상이 보인다.

텅 빈 육조거리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아 적막감마저 감돈다.

 

초목이 싱그러운 여름본은 초록을 주조로 하면서 색채의 강약이 두드러져 화면이 밝지만, 낙엽이 물든 가을본은 화면 전체에 갈색이 감돈다.

 

지금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본래는 이왕가李王家 미술관 소장품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이왕가로 전락한 왕실에서 당대 미술계의 리더였던 심전에게 그림을 부탁한 것으로 전한다.

 

심전이 그림을 그린 1915년은 일제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1915년 9월 11일~10월 31일)한다며 궁궐의 전각을 허물어내고 있을 때였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설 계획도 이미 세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린 그림이기에 심전은 경복궁을 더욱 앞으로 내세운 것이다.

포악한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백악춘효'라고 했을 뿐이다.

 

심전 안중식은 소림 조석진과 함께 조선왕조의 마지막 화원이었다.

그는 12세 때 부모를 모두 잃었고 오원 장승업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 이외애는 알려져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러다 1881년 21세 때 신식 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기 위하여 떠나는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조석진과 함께 톈진(천진天津)에 가서 1년 동안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1902년에는 조석진과 더불어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화명을 얻었다.

그는 스승인 오원에게 배운 대로 신선도, 노안도, 관념적인 청록산수를 그리는 전형적인 화원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에게 서화계의 리더로서 우리 근대미술의 서막을 이끌어가도록 요구했다.

심전은 이 시대적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응했다.

무엇보다도 근대미술을 이끌어갈 제자 양성에 나섰다.

1911년 조석진과 함께 '서화미술회 강습소'를 열어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 심향 박승무, 이당 김은호 등 후진을 양성했다.

심산, 심향 등의 심心 자는 심전의 호를 이어받은 것이다.

 

1918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내란죄라는 죄명으로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었다가 석방되는 고초를 겪었고,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평생의 벗이자 동료였던 소림 조석진도 이듬해 5월에 타계함으로써 근대미술계는 그의 20대 제자들에게 맡겨졌다.

 

 

안중식, (왼쪽)도원문진, (오른쪽)풍림정거, 1913년, 비단에 채색, 164.4x70.4cm, 리움미술관(출처-출처자료1)


생각건대 심전 안중식은 참으로 불우한 시대를 살았던 화가였다.

그는 <도원문진桃源問津(도원경에 가는 길을 묻다)>, <풍림정거楓林停車(수레를 멈추고 단풍 물든 숲을 바라보다)> 같은 청록산수를 잘 그리는 전통적인 화가였을 뿐, 근대사회를 헤쳐나갈 아무런 준비도 지식도 없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고 심전은 나름대로 성실히 세월에 임했다.

무엇보다도 새 시대를 열어갈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잃어버린 왕조의 애달픈 마음을 담은 <백악춘효>를 남김으로써 조선왕조 500년 회화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화가가 돠었다.

 

●심전 안중식의 <도원문진도>와 <백악춘효도> 해설은 새샘 블로그 2023. 7. 10 글 "심전 안중식 '도원문진도' '백악춘효도'"(https://micropsjj.tistory.com/17040792)를 보세요.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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