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인돌 - 협력하고 공생하는 인간의 기원 본문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무엇일까?
두발걷기(직립보행), 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언어의 사용, 국가의 등장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단연 농경의 도입이라고 말하고 싶다.
농경은 빙하기가 끝난 뒤 지난 1만 년의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오늘날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인류가 지구 지질이나 생태계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여 제안된 지질시대의 구분 중 하나)를 탄생시킨 시초였다.
인간은 농경을 위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공동체들은 이후 도시와 국가, 다양한 사회체제의 발달로 이어진다.
농경 생활은 야생에서 각자도생하던 인류가 협력을 모색하고 공생하는 방법을 고민하도록 촉진했다.
더불어 사는 지혜를 모색하게 됨으로써 연약한 인간은 자연을 통제하고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아는 힘을 얻게 되었다.
제의와 장례 의식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의 문화도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방편에서 시작되었다.
인류 문명사에서 농경의 시작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농사, 생사를 건 인류의 도박
그렇다면 농사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예전에는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지중해 동안의 팔레스타인 Palestine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이란 Iran 고원에 이르는 지역)'에서 처음 발생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설이 우세했다.
하지만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다지역 기원설을 더 지지한다.
중국에서도 약 1만 년 전부터 농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나왔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약 1만 2,000년 전부터 호박, 박, 구근류 같은 것을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즉, 농사는 동시다발적으로, 지역마다 독자적으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사실 농사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농경의 도입은 두발걷기와도 견줄 수 있다.
두발걷기는 동물적인 능력을 희생함으로써 당장의 생존 가능성은 줄어들게 되었지만, 그 대신 두뇌의 폭발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이로써 장기적 관점에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은 훨씬 더 늘어났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사냥과 채집은 자연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환경 적응성이 강한 활동이다.
눈앞의 먹잇감을 쫓거나 열매를 따면 그만이다.
만일 사냥감이 보이지 않거나 더 이상 채집할 거리가 없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 된다.
반면, 농사는 한번 시작하면 그 지역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을 농사에 걸어야 했다.
또한, 의외로 영양 상태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사냥과 채집을 하다 보면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농사를 지을 경우 자연에서 나는 다양한 음식 자원을 포기하고 오로지 선택해서 키운 작물만 먹어야 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비자발적 '원 푸드 다이어트 One food diet'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의 신장은 더 작아졌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농사로 인해 전쟁이나 갈등의 빈도도 더욱 심해졌다.
사냥과 채집 대신 농사를 선택한 상황에서 곡물 생산량이 떨어질 경우,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약탈이다.
비축해둔 식량은 인간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로부터도 지켜야 했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층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농사만의 장점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주요한 장점은 인간 삶의 예측할 수 없는 요인들을 최대한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령, 농사를 잘 지으려면 물 관리(치수治水)가 관건인데, 수리와 관개 시설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인류는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사회 갈등을 줄이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의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게 됨에 따라 법과 규칙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도 빠르게 발전해갔다.
이처럼 농경이 도입되면서 인류는 급격한 도약을 하는데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른다.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
한반도에서 농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대략 6,000년 전쯤이다.
물론, 그 무렵에 이루어진 농사는 소규모 형태였고, 화전농법이 도입된 흔적도 보인다.
남한에서는 중부 내륙 지역인 금강 유역에서 약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곡물들을 보관하던 대형 집터가 발견되었다.
신석기인들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해안가에서 살았는데, 이 시기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내륙 산악지대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작어서 한 마을이 기껏해야 30~40가구인 수준이었다.
약 4,000년 전부터는 다시 기후가 추워지면서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농촌의 모습으로 바뀌는 시점은 약 3,000년 전 벼농사가 도입되면서부터다.
벼는 아열대 작물이기 때문에 동남아 기후에서 재배해야 잘 자란다.
한반도 같은 온대 지역에서 벼농사를 지을 경우 자칫 가뭄이나 냉해 등의 피해를 입기 십상이다.
즉, 이 지역에서 벼농사의 실패는 공동체의 전멸을 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 벼농사가 널리 퍼진 이유는 전파 경로와 관련이 깊다.
한반도의 벼농사는 동남아 내지 중국 남부에서 전파된 것이 아니다.
우선 중국 대륙 남쪽에서 북쪽으로 벼농사 방법이 전파된 뒤, 만주의 요동반도를 거쳐서 한반도 남쪽으로 전파되었다.
그 과정에서 벼가 냉해를 잘 견딜 수 있도록 품종이 개량되었고, 한층 발전된 농법이 함께 전해졌다.
한반도 최초의 벼농사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적은 충남 부여의 송국리松菊里 유적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남부 일대에 널리 퍼져 있던 청동기시대 문화인 송국리 문화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문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인해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은 다양한 해산물을 잡아먹었다.
조개껍데기가 쌓여 이루어진 무더기인 조개무지는 한반도 신석기인들의 생활양식을 증명하는 근거다.
하지만 한반도에 벼농사 방법이 도입되고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자 조개무지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심지어 다도해나 신안 같은 섬에서도 농사를 지을 정도였다.
후에 송국리 문화권에서 벼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경남 지역까지 진출했다.
송국리 문화권 사람들이 일구고 살았던 마을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농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지형)'라 불리는 지역에는 거의 예외 없이 벼농사를 짓던 송국리 문화권 사람들의 마을이 들어섰다.
○농경 사회의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 고인돌
앞서 언근했지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굉장한 위험을 수반한다.
가령, 가뭄 등의 자연재해를 입을 경우 1년 동안의 노동이 한 번에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
또한, 일정 규모 이상의 농사는 혼자서 해내기 어렵다.
논에 물을 대는 일부터 모를 심는 일, 가을걷이를 하는 일 등 한 해 농사를 짓는데 드는 노동력은 상상 이상이다.
식량을 얻는 방법으로써 농업을 택하는 순간, 인류에게는 협동이라는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풍년을 기원하며 하늘에 올리던 제의와 공동체를 결속하기 위한 다양한 체제들은 농경의 부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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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인 고인돌은 농경으로 인한 인류의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유적이다.
고인돌은 큰 돌을 몇 개 둘러 세우고 그 위에 넙적한 돌을 덮은 무덤을 일컫는다.
고인돌은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초기 철기시대까지 이어졌는데, 한반도를 비롯해 동북아시아는 고인돌 밀집 분포 지역이다.
농한기에 인류는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고 다양한 의례를 벌였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근처 채석장에서 돌을 떼어서 마을의 족장을 모시기 위한 고인돌을 세웠다.
농사를 지을 때 협력했던 것처럼 커다란 돌을 옮기고 세우며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도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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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인돌 축조와 제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일찍이 중국에서는 약 3,500년 전인 상나라 때부터 다양한 청동 그릇을 사용해서 제사를 지냈다.
한반도에 살던 청동기인들의 제사는 중국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모습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농경문農耕文 청동기'에 잘 드러나 있다.
가로 약 12센티미터, 세로 약 7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청동판 앞면에는 벌거벗은 채로 밭을 가는 사람들이, 뒷면에는 솟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서는 입춘에 벌거벗고 밭을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밭을 가는 사람 옆에 술을 담은 단지가 놓여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고인돌 발굴 현장 주변에서는 깨진 토기들이 흩어진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음복을 하고서 술을 담았던 잔이나 단지를 깬 흔적이다.
그러고 보면 농경문 청동기는 단순히 청동기시대 한반도의 농경생활을 묘사한 유물이 아니다.
샤먼이 알몸으로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그려진 것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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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에 제사를 올리는 장면을 추측하게 해주는 유물은 농경문 청동기 말고도 또 있다.
전남 여수시 오림동 고인돌이 그것이다.
여수에서는 1,000기가 넘는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오림동 고인돌은 암각화로 유명하다.
가운데 꽂힌 돌칼(석검石劍)을 향해 두 사람이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두 사람 모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상태로 한 명은 무릎을 꿇고 있고, 뒤쪽의 사람은 공손한 자세로 서 있다.
칼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사실 유라시아 일대에서 칼은 용맹했던 전사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경북 김천시 송죽리나 강원도 춘천시 중도에서는 고인돌 앞에 실제로 검이 꽂여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즉, 여수시 오림동 고인돌에 새겨진 장면은 용감한 전사였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이 고인돌 암각화에서도 그릇이 보이는데, 농경문 청동기에 새겨진 단지처럼 술을 담았던 그릇으로 여겨진다.
○제의, 공동체 결속을 위한 축제
여수시 오림동 고인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인돌은 제사와 의례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제의는 공동체를 결속시키기 위한 축제 그 자체였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고 그 영혼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인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유지시켜나갈 수 있었다.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협력의 중요성을 깨달은 인류는 각종 제의를 통해 농경이 가진 단점—흉년으로 인한 기근, 사회 갈등의 증가—을 효과적으로 쇄신하고 위기를 극복하면서 한층 더 단단하게 결속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인류가 구축해온 대개의 문명은 협력을 기반으로 한다.
앞서 언급한 농경은 말할 것도 없고, 피라미드나 고인돌처럼 육중하고 거대한 고대의 문화유산들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성취다.
이는 무리를 이끄는 이의 지도력 아래 다수의 공동체 일원들이 협동하고 합심한 결과물이다.
오늘날의 사회를 표현할 때 '각자도생의 시대'라는 말을 많이 한다.
다 함께 잘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안위가 우선순위안 시대의 초상은 꽤나 비정하고 안타깝다.
전 지구적인 환경오염, 사회의 양극화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의 기저에는 인간의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고 여겨진다.
너무 순박한 바람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오래된 유물로부터 지금을 살아갈 지혜를 얻는 고고학자의 눈에는 공동체의 안위를 바라며 하늘에 제의를 올리던 청동기인의 둥글고 어진 마음에 이 시대의 문제를 풀어나갈 답이 있을 것도 같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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