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석파 이하응 "석란도 대련" "분란" 본문
"뜻을 일으켜 난蘭을 그리고 거기에 정情을 실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난초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독특한 난초는 '석파난石坡蘭'이라고 불릴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석파는 난초 그림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게 배웠다.
석파가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1849년으로 석파 30세, 추사 64세였다.
이때 추사는 9년 동안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풀려나 한강변의 일휴정日休亭 초막에 머물렀다.
석파는 영조의 현손玄孫(고손자高孫子: 손자의 손자)인 남연군의 아들이고, 추사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11촌 대고모였기 때문에 촌수를 따지면 내외종간의 먼 친척이 된다.
그래서 추사는 석파에게 편지를 쓸 때면 척생戚生(친척)이라고 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당시 석파는 안동김씨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락호破落戶(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불량배와도 서슴없이 어울렸다.
명색이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조선 시대에, 종친부, 충훈부, 비변사, 기로소 따위의 사무를 도맡았던 고급 관리)이면서도 안동김씨 집을 찾아가 구걸하여 궁할 궁窮 자 '궁도령'이라는 비웃음까지 받으며 세도가의 눈을 속였다.
그런 석파가 이번엔 추사를 찾아가 그림을 배워 농묵弄墨(여가를 틈타 그리는 그림)이나 하면서 그들을 안심시킬 속셈이었다.
석파가 추사를 찾아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파란만장한 시절 난초 그림이 있어서 큰 위안이 되었고, 그렇게 그려진 석파난은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회화사적 업적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석파는 추사에게 난보蘭譜(난초 그림책)를 하나 보내달라고 했다.
이에 추사는 자신의 ≪난맹첩蘭盟帖≫을 보내주면서 난초를 그리는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진지한 가르침을 남겼다.
"세후에 보내신 편지는 마치 해가 새로워짐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꽃이 핀 때를 만난 것 같기도 합니다. ······ ≪난보≫는 망령되이 제가 제기題記(제목을 붙인 책)한 것이 있어 부쳐 올리오니 거두어주시겠습니까. ······ 대체로 난초를 그리는 일은 비록 하나의 하찮은 기예技藝(기술과 예술)지만, 거기에 전심全心하여(온 마음을 다하여) 공부하는 것은 격물치지格物致知(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의 학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가슴속에 5천 권의 책을 담고, 팔목 아래 금강저金剛杵(승려가 불도를 닦을 때 쓰는 법구法具의 하나)를 휘두르는 자세로 해야 할 것입니다."
문자향文字香 서권기 書卷氣('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란 뜻으로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를 갖추고 필력筆力(그림 실력)을 쌓으라는 주문이다.
석파는 ≪난맹첩≫에 실린 그림 10폭과 제발題跋(제사題辭와 발문跋文을 아울러 이르는 말) 4폭을 열심히 공부하여 훗날 이를 방작한 ≪석파 난맹첩≫(1851)을 따로 만들어 제자인 노천老泉 방윤명方允明(1827~1880)에게 주었다.
때문에 석파의 초기 난은 추사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
석파가 난초를 배운 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추사는 권돈인이 귀양갈 때 배후 인물로 몰려 다시 북청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그 바람에 석파의 난초 교습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추사 가문의 별장으로 그 위치는 청계산 옥녀봉 아래인 현 과천시 주암동)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보내주신 난초 그림을 보니 이 노부老夫(늙은 남자)도 마땅히 손을 오므려야 하겠습니다. 압록강 이동以東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승에게 이런 칭찬을 듣게 되자 석파는 자신의 ≪난화첩≫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다음과 같은 발문跋文(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붙였다.
"그림 중에는 난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 산수·매죽·화훼·동물 등에는 예로부터 능한 자가 많았으나 유독 난초 그림에는 특별히 이름난 이가 없다. ······ 난초 그림이 뛰어난 품격이란 형사形似(형체가 서로 비슷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화법만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열심히 많이 그린 후에라야 가능하다.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으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로 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9천9백9십9분에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1분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마지막 1분은 웬만한 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
석파는 난에 깊으니 대개 그 천기天機(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지機智 또는 성질)의 맑음이 난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1분까지 나아갈 공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 난을 그리지 않은 지 아마도 20여 년이 된다. ······ 이 늙은이가 다시는 더 하지 못할 것을 요구하고 싶은 자는 마땅히 석파에게 구함이 옳다."
얼핏 읽으면 칭찬 같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마지막 1분을 위해 더 애쓰라는 얘기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2퍼센트 부족을 얘기한다.
그러나 추사는 0.01퍼센트 부족을 말하면서 완벽성을 요구했다.
석파는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진실로 마지막 1분까지 열성을 다했다.
1863년, 44세의 석파는 마침내 흥선대원군이 되어 국정을 밀어붙였다.
그러다가 1873년 11월, 하야하여 양주 곧은골(직곡直谷)에 은거한 9년 동안 많은 난초를 그렸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잠시 정계에 복귀했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연행되어 청나라 보정부保定府에 3년 동안 유폐되었다.
이때도 석파는 난초를 많이 그렸다.
그의 난초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1885년 청나라의 원세개와 같이 귀국한 뒤에도 정권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동학농민운동 세력과 통하기도 하였고, 1894년 갑오개혁 뒤에는 일본의 지원 아래 군국기무의 총괄을 위임받아 정치 소신을 피력했지만 1894년 일본이 김홍집 내각을 내세우며 석파를 은퇴시켰다.
그 후 공덕동 아소정我笑亭에서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유폐 생활을 강요당했는데 이때 난초 그림이 생의 위안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다가 1898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굴절 많은 행적 때문에 석파의 난초는 추사에게 배우는 수업기, 곧은골 시절, 보정부 시절, 아소정 시절, 다시 만년의 곧은골 시절로 이어지며 세련되어갔다.
석파의 난은 대단히 개성적이다.
난초 그리는 법에 따르면 잎은 사마귀 배처럼 불룩하다가 쥐의 꼬리처럼 뻗으라고 한다.
이를 '당두螳肚에 서미鼠尾'라고 하는데, 석파의 난초 잎은 당두가 짧고 야무진 반면에 서미가 맵시 있게 뻗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참으로 흉내 내기 힘든 난법으로 어찌 보면 성깔 있어 보이고, 어찌 보면 요염하다.
한마디로 매력적이다.
추사의 말대로 본래 난초에는 대가가 따로 없다.
화법畵法 또는 서법書法에 따라 그리면서 자신의 서장을 넣으면 된다.
역대로 화가들이 그렇게 난을 그렸다.
탄은 이정의 난초는 전아典雅한(법도에 맞고 아담한) 기품이 있고 잎새가 어여쁘기 그지없다.
난초의 아름다움을 그린 것이다.
능호관 이인상의 난초는 강직하기만 하다.
난초의 고고함을 그린 것이다.
수월헌 임희지의 난초는 춤을 추는 율동이 느껴진다.
난초 잎에 춤사위를 넣은 것이다.
석파와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던 운미 민영익의 난초는 기개 넘치는 건란建蘭이다.
난초에서 굳셈을 본 것이다.
이에 비해 추사의 난초에는 일종의 서예미가 있다.
그는 난초를 화법으로 그리면 악마의 소굴로 빠진다면서 예서 쓰는 법으로 그리고 긴 난초 잎을 그릴 때는 붓이 바닥을 세 번 누르는 삼전법三轉法을 쓰라고 했다.
그래서 추사 난초에는 서예의 멋이 들어 있고 긴 난초 앞에는 긴장감 있는 리듬이 있다.
석파는 추사에게 배운 대로 예서법隷書법으로 시작했다.
당두는 예서법이다.
그러나 서미를 나타낼 때는 추사의 삼전법이 아니라 초서草書를 쓸 때 붓을 세워 길게 삐치는 장별법長撇法을 구사했다.
그래서 석파의 난은 까슬까슬한 예서 맛도 있고 유려한 초서의 리듬도 있다.
긴장감이 아니라 서정이 살아난다.
그것도 기쁜 서정이 발현된다.
석파는 68세 때 그린 <석란도石蘭圖 대련對聯>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그림이란 반드시 흥興을 끌어와서 그려야 하는데 흥이란 모름지기 기쁨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난을 그린 지 40년 가까이 되었는데 나는 매번 뜻(의意)을 끌어와서 정情을 그림에 실었다."
석파는 화분 속의 난초를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린 <분란盆蘭>도 남겼다.
그는 많은 문자도장을 사용하였는데 그중에는 자신의 난초 그리는 뜻을 강조한 것이 둘 있다.
"사란작의寫蘭作意(난을 그리면서 뜻을 일으킨다)
희기사란喜氣寫隣(기뻐하는 기운으로 난을 그린다)"
이것이 석파난의 본색이다.
필자는 지금 석파난의 유래와 매력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석파는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 많이 했으며, 파란만장한 이력이 말해주듯 술도 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석파의 모습은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 잘 나타나 있다.
"독미견서讀未見書 여봉양사如逢良士 독기견서讀己見書 여우고인如遇故人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이 하고, 이미 보았던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이 한다)
유주학선有酒學仙 무주학불無酒學佛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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