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전쟁 속의 고고학 본문
"책의 모든 쪽에는 승리가 가득하다. 그 누가 승전 잔치를 준비했는가?
10년을 두고 위대한 영웅들이 탄생하고 있다. 그 대가는 누가 치렀는가?
너무나 많은 기록만큼이나 생겨나는 너무나 많은 의문들."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가운데서—
현장 고고학의 기틀을 세웠던 영국의 고고학자 모티머 휠러 Mortimer Wheeler는 말했다.
"고고학은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다."
전쟁과 고고학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파괴를 전제로 한다.
전쟁이 현실 사회의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고고학은 지층의 구조를 파괴하여 그 속에 있는 유적과 유물을 꺼낸다.
전쟁은 서로를 파괴하는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부여한다.
고고학은 땅을 파헤쳐서 자연에 숨어 있는 유적과 유물을 꺼낸다는 점에서 유적을 파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전쟁에서 승자가 그 이후의 세상을 재편하듯이 유적을 파괴하고 그 속의 유물을 꺼내서 과거를 다시 재편하는 고고학자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서로 닮아 있다.
20세기 이후 전쟁이 현대화되면서 발달한 각종 전술은 고고학의 발달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전쟁을 위해서는 정밀한 지도가 필요하다.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거리 계산도 필수다.
전장의 야전생활에 쓰인 용품들은 고고학자의 야전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고고학 현장에서 최고로 치는 덕목은 삽질이다.
그리고 이런 삽질이 본격화된 건 참호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1차 세계대전 때였다.
독일과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서로 미로 같은 참호를 파고 대치했다.
참호에서 기다리다 돌격을 하는 식의 지루한 공방전이 반복되면서 각국의 참호는 더욱 더 발전했다.
물론 시궁창 같은 참호 속에서 뒹굴며 싸워야 했던 군인들에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아마 1930년에 나온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본다면 도랑처럼 판 긴 참호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군인들의 참상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전쟁사에서 병사들에게는 유례가 없이 잔인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였다.
그렇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참호를 파는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이후 퇴역한 군인들은 참호를 파던 기술을 고고학에 적용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고고학의 발굴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했고, 그들의 상당수는 군인 출신의 고고학자였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비행기가 찾아낸 유적들
제1차 세계대전은 비행기가 활용된 최초의 국제전쟁이었다.
처음 비행기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손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형태였지만, 다른 무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격화되면서 빠르게 비행기술이 발달했다.
공중전 시대가 개막되어 다양한 비행기술이 개발되면서 유명한 조종사들도 등장했다.
당시에 활동했던 일본 만화영화 <붉은 돼지>의 모티브가 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Manfred von Richthofen(일명 붉은 남작 Der Rote Baron, 영어 The Red Baron)은 전쟁사를 좋아하는 소위 '밀덕(밀리터리 덕후 즉 군사 마니아 militarymania)'이 아니어도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패전국 독일의 조종사임에도 그는 뛰어난 조종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 붉은 남작은 바로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 Ferdinand von Richthofen의 조카다.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유라시아를 잇는 새로운 교역의 길에 '실크로드 Silk Road'라는 역사적이고 낭만적인 이름을 붙인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21세기에 들어서 더욱 힘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의 조카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유적을 찾을 수 있는 하늘의 길을 개발했다.
재미있는 우연이다.
만프레트 리히트호펜은 삼촌 말고도 친척 중에도 유명한 고고학자(볼코 폰 리히트호펜 Bolko von Richthofen)가 있기는 했지만 본인은 고고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붉은 남작 만프레트 리히트호펜도 고고학의 발달에 이바지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의 현란한 비행술이었다.
상대 조종사의 허를 찌르는 회전과 기수변경으로 리히트호펜의 비행술은 '리히트호펜의 서커스'라고 불리었고, 곧바로 그의 비행술은 널리 퍼졌다.
급기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에서는 전투비행을 하던 조종사들이 비행서커스단을 조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사방으로 비행을 하는 것이 유행하다보니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고도를 급격히 꺾거나 급상승할 때에 조종사들의 눈에 순간적으로 땅에서 사각형이나 원형 모양의 흔적들이 보였던 것이다.
적이 만들어놓은 비밀 구조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표시를 해두고 이후 다시 가보면 그 흔적을 전쳐 찾을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반복되었다.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는 점을 수상히 여겨 분석해 보니 주로 해가 뜨거나 지는 시간에 비스듬한 각도에서 바라볼 때 나타나며, 줄로 곡식이 자라는 벌판에서 보인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해당 지역을 조사해 보니 조종사들이 본 것은 헛것이 아니었다.
바로 로마시대의 저택터, 용병캠프 등이 있던 자리였다.
로마가 유럽을 정벌하면서 곳곳에 세운 건축터들이 비행사들의 폭격과 정찰 중에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흔적은 실제 땅위를 다니면서 보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다.
이런 흔적이 남는 원리는 돌을 사용해서 기반을 세우는 로마시대 건축물의 특징에 있었다.
돌이 묻혀 있는 곳은 곡식들이 뿌리를 깊게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곡식의 발육이 좋지 않아서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그 크기가 작다.
그러니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곡식의 높이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이게 된다.
다양한 도형들처럼 보이는 이런 형태를 흔히 '크롭마크 cropmark'라고 한다.
그런데 조종사들 사이에서 그냥 이야깃거리로만 전해지던 이 크롭마크가 고고학 연구에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에 갓 발달된 항공사진기술 덕택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국들은 상대방의 참호나 전쟁시설을 정찰하여 사진을 찍었고,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사진이 남았다.
예컨대, 영국 공군에는 전쟁 후에 약 50만 장의 사진이 남아 있었고, 이 전쟁의 사진들에서 조종사들이 보았던 고고학 유적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비행사였던 영국의 고고학자 크로포드 Osbert Guy Stanhope Crwaford는 이 자료들 중에서 특히 영국 윈체스터 Winchester 지역의 사진을 집중적으로 분석했고, 그 결과 로마가 영국으로 진출했을 때에 지은 건물터와 농사를 위한 관개수로들을 확인했다.
만약 이 사진들이 밝혀낸 거대한 규모의 유적을 고고학자들이 직접 발굴조사로 확인하려 했다면 몇천 배의 비용이 들었을지 모른다.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에서 발달한 항공과 사진술이 넓은 지역을 손쉽게 연구할 수 있는 고고학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충격을 받은 쪽은 고고학자들이었다.
고고학이라면 당연히 삽을 들고 땅을 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엉뚱하게도 고문서 보관소에서 사진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고고학 연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정찰기술과 사진기술은 더 진보했고, 덩달아 항공고고학도 발달했다.
지금은 드론 drone과 구글 지도의 발달로 연구실에 앉아서 유적들을 분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일본 군국주의와 고고학
일본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이전부터 한국의 유물을 조사하며 식민지를 준비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위해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체결된 1905년 이후 사실상 한반도는 일본 고고학자들의 경쟁지가 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만주로, 1930년대에는 중국과 몽골로 계속 전쟁을 일으키며 진출했고 그들과 함께 일본의 어용 고고학자들도 따라다녔다.
일본이 만주와 중국으로 식민지를 넓히면서 그 지역의 고대 보물과 유물을 조사하는 제국주의 고고학자들도 같이 활동했다.
기마민족설로 유명한 일본의 학자 에가미 나부오(강상파부江上波夫)는 바로 이때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고고학자였다.
그는 패전 이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약탈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마민족설을 제창했다.
일본 천황가는 아시아의 북방에서 말을 타고 다니던 기마민족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에가미 나부오는 발굴보다는 주로 각 지역의 유물들을 사들이는 데에 더 주력했다.
당시 일본이 빠르게 전선을 확대했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서 차분하게 발굴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재를 약탈한 이유는 단순한 유물의 수집이 아니라, 일본 민족의 기원이 북방 어딘가에 있었다는 설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근동지역을 약탈한 서구 열강이 유럽 문명의 근원인 성서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선 거라고 주장하는 의도와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고고학과 전쟁은 서로 관련이 없는 듯하면서도 많은 연관성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천만 명이 희생된 전쟁터에서 피어난 학문이 고고학이다.
기마민족설은 역설적으로 일본이 패망한 뒤에 본격적으로 유행했다.
일본인들은 아시아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는 정부의 허황된 선전 아래 전쟁에 내몰렸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망하면서 다시 섬으로 쫓겨났다.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일본인들을 위로해준 것은 일제의 전장을 따라다니며 발굴하고 문화재를 약탈해 조사했던 고고학자들이었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1948년 동경의 한 찻집에서 일본 민족의 기원에 관한 대담을 하던 중에 나온 황당한 이론이었다.
일본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2300년 전 야요이(미생弥/彌生)문화 시대에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쌀농사를 하면서 번성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고훈(고분古墳)시대의 전성기인 5세기 무렵에 갑자기 북방에서 기마민족이 말을 타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서 기존의 세력을 다 무찌르고 야마토(대화大和: 나라현의 옛 지명) 국가를 세웠다.
즉 지금의 일본인은 한국에서 넘어간 도래인들을 무찌르고 새롭게 국가를 건설한 북방 유목민족의 후예라는 것이 일본 기마민족설의 골자였다.
에가미는 지금은 허구라고 판명된 임나일본부설도 자신의 기마민족설에 근거해서 설명했다.
즉, 야마토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시 한반도로 넘어와 김해 일대를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건립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에가미의 주장은 실제 고고학 자료로는 전혀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계에서는 큰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최근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 기마민족설의 핵심은 일본인들이 한국, 중국이나 일본의 원주민들보다 우월하며, 북방 시베리아는 자신들이 다시 찾아야 할 고향이라는 데에 있다.
이런 생각은 자신들을 우월한 아리안족이라고 생각했던 히틀러의 나치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은 철저한 반성으로 아리안족과 관련된 어떠한 논의도 금기시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을 되찾는데 실패했다는 식으로 군국주의를 미화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부응한 에가미와 같은 학자들을 소위 관학아카데미라고 한다.
이들은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학계에서 기득권을 형성했다.
앞서 언급한 일제의 화려했던 보고서도 관학아카데미의 활동 결과이다.
지금도 관학아카데미가 일본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한편, 제국주의에 영합해 대중을 선동한 고고학자와 달리 전쟁 이후 참담한 사회 현실 속에서 고고학 본연의 길을 걸어 그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일본 고고학자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궁기준宮崎駿) 감독이 1988년에 제작한 <이웃집 토토로>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엄마의 병 간호를 위해 시골로 이사한 고고학자 가족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두 자매가 숲속의 요정 토토로와 만나는 이야기를 믿고 동조해주는 유일한 사람인 아버지의 직업은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고고학자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 아버지는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다.
감독의 연출 노트에 따르면 아버지는 "젊은 고고학자로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번역 작업으로 어렵게 생활한다. 지금은 혁명적인 새로운 학설을 담은 논문을 집필하기 위하여 강의할 때 이외에는 서재에 틀어 박혀 있다"고 되어 있다.
감독이 모델로 삼은 실제 인물은 후지모리 에이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통해서 후지모리를 알았고, 평소에도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고 한다.
옆에서 지켜본 후지모리가 전쟁의 고통을 이겨내며 고고학을 연구하는 모습에서 힌트를 얻어서 이러한 설정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후지모리가 생각했던 혁명적인 설은 무엇일까.
당시까지 일본에서는 한국의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2300년 전 야요이시대가 되어서야 쌀농사를 짓는 농경이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후지모리는 이보다 훨씬 이른 3500년 전인 죠몽(또는 조몬)(승문繩文: 새끼줄 무늬=꼰무늬)의 중기에 이미 농사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학계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인 설을 주장한 후지모리인지라 실제 삶도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가설 때문에 대학에 자리를 얻지 못하고 평생을 재야에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후지모리는 1930년대부터 또 다른 일본 고고학계의 민간영웅인 모리모토 로쿠지(삼본육이森本六爾)와 함께 '도쿄고고학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동료였던 모리모토는 어렵사리 떠난 파리 유학 도중 큰 병을 얻어서 요절했고, 후지모리는 홀로 고군분투했다.
고생 끝에 그는 1941년에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 독자적인 고고학 잡지를 간행하는 등 활약했다.
하지만 곧바로 불어닥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태평양전쟁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후지모리는 다행히 살아남아 일본의 패망을 보르네오섬 Borneo에서 맞이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건강을 크게 해쳤고, 시간강사와 헌책방을 전전하다가 1973년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일본의 많은 고고학자들은 후지모리를 잊지 않았다.
재야에서 꾸준히 활동하던 그의 모습에 일본인들은 열광했고, 그래서 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고고학자로 꼽힌다.
지금도 재야의 고고학자들을 위해 '후지모리 에이지상'이 제정되어 해마다 수여되고 있다.
전쟁 이후의 참혹한 상황을 에둘러 표현한 영화인 <이웃집 토토로>에 그를 등장시킨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과 전쟁이라는 탐욕 대신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을 그리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였던 것 같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숲속에 텃밭을 만들고 어린 자매가 토토로와 도토리를 주고받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바로 후지모리가 그린 죠몽시대 농사의 모습과도 닮았다.
후지모리는 죠몽시대에는 쌀 대신에 도토리를 채집하고 수수 같은 잡곡을 텃밭에서 경작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후지모리의 가설은 2000년대에 들어서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꽃가루 분석을 비롯한 여러 방법이 계속 개발되면서 죠몽시대에 원시적이나마 농사를 지었다는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후지모리의 가설은 당시 부족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유물에 대한 통찰력과 유적의 위치 그리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방식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나온 것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에가미 나부오와 후지모리 에이지는 전쟁을 겪으며 살았던 동시대의 고고학자였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한 명은 전쟁에 적극적으로 부역했고, 또 한 명은 전쟁으로 인해 그의 학문이 빛을 발하지 못했던 불운한 고고학자였다.
각종 영화나 매체에서 주로 비추어지는 모습은 에가미와 같이 전쟁과 함께 사방을 다니면서 다른 나라의 유물을 찾는 모습이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의 가치를 실현하고 발전시킨 사람들은 후지모리와 같이 자신이 살던 자연 속에서 사소해 보이는 유물을 통해 진정한 과거의 모습을 찾으려 했던 숨어 있는 고고학자들이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꽃피웠던 고고학
미국 버지니아 Virginia 출신 하워드 맥코드 대령 Colonel Howard MacCord은 직업군인이 된 이후 은퇴할 때까지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등에서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그 지역의 유적을 조사하던 열성적인 고고학자였다.
한국전쟁 참전 당시 그의 부대는 경기도 가평의 북한강 지류에 위치한 마장리와 이곡리 근처에 캠프를 설치했고, 개인참호를 파다가 땅속에서 고대 집자리의 흔적과 유물들을 발견했다(가평리 유적).
당시 맥코드는 참호벽에 민무늬(무문無紋)토기가 박혀 있는 것으로 보고, 그곳에 적어도 5개 이상의 집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상 외로 대규모의 취락지임을 알아차린 그는 조사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전체 유적을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참호를 파놓은 구덩이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유물들을 수거했다.
또한 지층을 파악해서 이 지역의 마을이 두 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다는 것도 밝혔다.
한 지역에서 층위를 통해 두 시대의 유물을 밝혀낸 맥코드의 발굴은 당시로서는 드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고고학자들조차도 제대로 된 고대의 주거지를 발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옛날 집자리는 땅을 파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 구덩이의 흔적을 발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몇백 년 뒤에 다른 사람들이 같은 집터에 다시 집을 짓는 경우도있다.
이를 주거지 중첩현상이라고 한다.
주거지 중첩현상은 각 집자리들 중에서 무엇이 더 오래되었는지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지만, 숙련된 경험자가 아니면 밝히기 어렵다.
실제 우리가 역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의 청동기시대도 바로 이 주거지 중첩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주거지는 제대로 발굴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금석병용기(청동기시대와 신석기시대가 함께 나왔음을 의미)'라는 용어가 쓰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남한 역시 제대로 된 주거지 발굴기술이 없었다.
그러니 1970년대까지도 금석병용기의 망령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지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금석병용기'라는 말은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말은 원래 유럽에서 사용되었는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이 용어를 한국인들의 미개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즉, 금석병용기를 '청동기를 수입해도 여전히 미개한 상태에서 석기를 쓰는 시대'라는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미개하고 그 문화적 역량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청동기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석기시대로 살았다는 뜻이다.
일본의 이 식민 패러다임 paradigm(인식의 체계)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층을 달리해서 존재했음을 밝히면 된다.
하지만 층을 구분해서 발굴하는 방법이 한국에 널리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반면에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도유호都宥浩(193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 최초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1세대 고고학자로서 월북하여 북한 고고학의 기초를 수립)가 이끄는 북한의 발굴단은 1953~1954년도에 회령 오동의 움집터(수혈주거지竪穴住居地)를 발굴하고, 그 움집터에 중첩이 있음도 함께 발견했다.
또한 1957년에는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층과 청동기시대 문화층을 분리시켜서 그 지긋지긋하던 금석병용기설을 폐기하고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국사시간 첫머리에 '빗살무늬토기=신석기시대', '민무늬토기=청동기시대'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배운다.
그런데 이것을 발굴로 증명한 것이 바로 도유호가 발굴한 지탑리 유적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4년밖에 안 되는 시점에서 북한 고고학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청산하면서 그 기세를 높였고, 1960년대에는 고조선 연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중고등학교에서 상식처럼 배우는 '고조선은 비파형동검을 사용하며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렇듯 층위적인 발굴과 중첩의 확인은 고고학의 교과서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맥코드는 북한의 지탑리 발굴 이전에 주거지의 중첩을 발견했다.
그것도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말이다.
맥코드는 토기 안에서 0.5리터 분량의 탄화된 식물의 씨앗을 발견해 전문가에 의뢰했고, 그것이 야생사과의 일종인 털야광나무의 열매라는 점을 밝혀냈다.
실제로 러시아 연해주나 만주 일대를 답사할 때면 체리 크기의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이 만주 야생사과를 흔히 볼 수 있다.
지금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야생에서 자라는 과일을 모아서 차로 달이거나 말려서 겨우내 부족한 비타민을 섭취한다.
2000년 전 가평에 살던 사람들도 추운 겨울에 이 열매를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우리나라 고대 과일에 대한 최초의 분석이었다.
또한 가평리 유적(실제 행정구역은 이곡리)에서 목탄을 채취해 방사성탄소연대(방사성 탄소 C14 농도를 측정해 유물 연대를 산출하는 방법)를 측정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핵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리비 Willard Frank Libby 박사가 개발한 것이다.
맥코드는 이 통나무를 미시간 대학교 University of Michigan의 방사성탄소연대 실험실로 보냈다.
1958년에 공개된 이 통나무의 연대는 '1700±250'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다시 말하면 지금부터 2000~1500년 전에 이 유적이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이 연대는 한국의 삼국시대가 시작될 당시의 유적이라는 최초의 과학적인 측정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지금이야 비슷한 유적들이 한강 유역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가평리 유적은 해방 이후 약 40여 년간 한강 유역을 대표한 유적이었다.
맥코드는 이후 자신이 발굴한 유물 가운데서 토기, 철기, 제철 흔적 등 중요한 것을 세심하게 포장해서 미국으로 가져갔다.
이를 1954년에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박물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에 자세히 기록한 노트와 함께 기증했고, 1958년에 이 유적의 보고서를 학술잡지에 실었다.
발굴, 분석, 유물 정리 그리고 보고서라는 고고학의 원칙을 성실히 지킨 마무리였다.
이후 맥코드는 버지니아 주에서 꽤 저명한 고고학자로 활동하다가 2008년 사망했다.
맥코드의 조사에 한국인이 같이 참여했다면 한국 고고학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맥코드 혼자만의 간단한 조사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국전쟁이라는 파괴의 현장에서 유적과 유물들이 우리에게 남겨진 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도 그렉 보웬 Greg L. Bowen이라는 미군 병사였다.
전쟁이라는 파괴의 장에서 역설적으로 고고학이 발달하는 건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과 고고학
최근 온라인상에서는 전쟁의 무기와 전쟁 역사에 대해 전문가급인 전문지식을 자랑하는 '밀리터리 애호가'를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여 년이 훨씬 지났지만 최근 고고학계에서는 전쟁터 고고학 Battlefield archaeology이 그 규모를 키우고 있다.
이 전쟁터 고고학은 예전에 유명한 전쟁이 일어난 지역에서 금속탐지기로 탄피나 무기의 잔해를 찾고, 또 당시 참호들을 재조사한다.
전쟁터에 남겨진 사병의 제복이나 총 등을 발굴해서 전사에 기록되지 않은 세부적인 전쟁의 양상을 분석한다.
사실, 전쟁의 기록이 잘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부분이 허술하다.
전쟁 기록과 전쟁터의 실제 상황에 차이가 큰 경우도 많다.
또 전쟁이라는 건 아군에 유리하게 전황과 사상자들을 기록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아무리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전장을 발굴조사하는 것은 중요하다.
예컨대, 전쟁 중에도 한국전쟁에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한 백마고지의 전투(2011년에 나온 영화 <고지전>의 실제 모델이 된 전투), 링컨 Lincoln 대통령의 감동 어린 연설로도 유명한 남북전쟁 게티스버그전투 Battle of Gettysburg, 유례없는 추위로 미해병대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개마고원 장진호 후퇴 등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전쟁이 있다.
그 현장의 유물을 조사하고 기억한다면 이들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다.
서양에서 이러한 전쟁터 고고학은 대중적인 호응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동아시아 고고학 대회에 참석했다가 전쟁터 고고학 분과에 우연히 참석했다.
6·25 전쟁에 사용되었던 보병용의 장총 M1 개런드 Garand나 원래 기병용으로 개발되었으나 짧아서 한국인의 체형에 맞아 한국인이 선호했던 M1 카빈 Carbine이 서양에서는 흐릿한 흑백 사진이나 박물관 유물로 취급되고 있다.
개런드와 카빈이 실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가 전쟁터 고고학 분과에서 주요한 주제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 총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고등학교의 교련수업에 사용되었다.
필자가 한국군의 무기고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 총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하니 참석자들은 순간 놀라며 부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그 무기들이 남아 있고 전쟁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어디 부러움을 받을 일인가.
그래서 한국에서는 M1 소총은 고고학적 자료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의 부산물이라고 설명하자 모두 침묵에 빠졌다.
한국에서 전쟁터 고고학이 발달하기에는 때가 이르다.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터 고고학이 발달한다면 아마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어쩌면 한국전쟁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수많은 전장을 고고학으로 발굴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오기를 바라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전쟁에 대한 고고학은 후대를 위한 객관적인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전쟁의 과정이 자신들의 논리에 맞게 일방적으로 서술되었다.
고고학을 동원해서 그 과정들을 객관적으로 남겨놓는 것이 필요하다.
수백만 명이 쓰러져간 그 과정을 어떻게든 기록해서 전하는 것은 우리 고고학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전쟁터 고고학은 비단 최근의 전쟁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의 급박한 전황을 보여주는 듯한 유적들이 이곳이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서울 광진구 아차산의 고구려 유적에서는 농사를 짓는 와중에 적의 습격을 받았는지 농기구들이 한쪽에 고스란히 모아진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농기구가 나온 이유는 당시 보급이 안 좋아서 군인들이 직접 밭을 경작했기 때문이다.
또 경기도 연천 무등리 보루에서는 철갑옷 하나가 통째로 출입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무사들만 쓸 수 있었던 귀한 철갑옷을 이렇게 두고 갈리는 없으니, 아마 적의 습격과 같은 급한 상황에서 고구려 군사가 벗어둔 채로 퇴각하거나 갑옷을 입지 못한 채 희생당한 흔적일 것이다.
6세기에 한강을 두고 삼국은 치열하게 공방전을 했으니 한강 일대의 여러 유적에서 이런 전선의 흔적은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이다.
삼국시대의 산성을 발굴해 치열한 전쟁의 당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예는 백제에서도 있었다.
바로 2011년에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을 한 갑옷이다.
연천 무등리 보루의 경우처럼 전쟁의 와중에 벗어놓은 갑옷이 고스란히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이 갑옷에 쓰인 명문銘文(새겨놓은 글)들은 당시 중국의 연호와 인명이 기록되어 있고 중국에서 물건을 만들 때 제작 이력을 기록했던 풍습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공산성에서 가장 마지막에 벌어진 전쟁은 백제와 당나라 군사에 의해 벌어진 전투였다.
그러니 갑옷은 사실 당나라의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실제 이 갑옷이 발견된 뒤 전설로만 전해지던 백제의 갑옷인 명광개明光鎧(밝은 빛을 띠는 당나라의 갑옷이란 뜻이며,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거울처럼 둥근 보호구를 가슴에 붙인 갑옷)가 나왔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명광개는 백제가 당나라에게 선물로 줬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지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실물은 알려진 것이 없다.
게다가 이 갑옷이 출토된 곳은 당나라가 아니라 백제의 공산성이다.
백제가 당나라에 준 선물이 다시 백제로 돌아와 공산성에서 출토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이 갑옷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사실 유물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갑옷에는 당시 당나라 황제의 연호인 '정관19년貞觀十九年'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이 연대를 지금의 연대로 바꾸면 645년으로 댱나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직전 고구려를 공격하던 시점이었다.
그러니 이 갑옷은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 이후 백제를 공격했을 때 당나라 장수가 남긴 것으로 보는 게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런데도 발굴 당시 고고학자들은 다소 무리하게 백제의 장수가 남긴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속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백제의 수도에서 다른 나라의 유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과 같은 전쟁은 동시대의 기억에서 역사로 바뀌고 있다.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그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망각은 21세기 현대 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침략뿐만 아니라 패전의 역사마저 부정하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는 다시 나치가 고개를 들고 있다.
홀로코스트 The Holocaust(독일의 나치 Nazi가 약 1,1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를 부정하는 일부 인사들도 있고, 심지어 러시아에서는 히틀러 Hitler를 추종하는 '신나치주의'가 발흥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가 다양한 가짜 정보에 뒤섞여 혼란스러운 시대가 되고 있다.
직접 전쟁터를 발굴하여 실물자료로 21세기의 사람들을 계속 일깨우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고고학이 막연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대와 직접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주변에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시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생겨나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때문에 우리는 소비할 뿐, 남기거나 간직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어져야 하는 건 이어져야 할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한다는 요즘 시대의 트렌드 trend(경향)를 접할 때면 괜히 씁쓸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전쟁 같이 소비하는 요즘이라 그런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정 또한 절실해진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1. 2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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