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3장 종교개혁 5: 변화된 가톨리시즘, 13장 결론 본문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Protestantism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사건이므롤 우리의 관심이 루터 Luther와 칼뱅 Calvin 같은 종교개혁가들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16세기 가톨릭교회 내부에도 강력한 개혁 운동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 운동을 '가톨릭 종교개혁 Catholic Reformation'이라 부를지 아니면 '반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이라 부를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어떤 학자들은 가톨릭교회 내부의 개혁 시도가 루터의 95개조 논제 이전에 이미 있었고 그 후로도 오래 지속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가톨릭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택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16세기의 가톨릭 개혁자들이 무엇보다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맞서 싸워야 할 긴박한 필요성에 의해 고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반종교개혁이란 용어를 선호한다.
우리는 양자를 가톨릭 개혁의 상호보완적인 두 국면—루터 이전의 가톨릭 종교개혁과 루터 이후의 반종교개혁—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가톨릭 종교개혁
반종교개혁(1534~1590년) | |
반종교개혁 교황들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예수회 설립 트렌트 공의회 소집 금서 목록 |
1534~1590년 1534년 1545~1563년 1564년 |
1490년 무렵부터 시작된 가톨릭 종교개혁은 일차적으로 교단 내부에서의 도덕적·제도적 개혁이었다.
그 노력은 많은 세속 지배자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지만 교황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결과 가톨릭 종교개혁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적 운동이 되지 못했다.
에스파냐 España의 추기경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Francisco Jiménez de Cisneros (1436~1517)가 주도하고 에스퍄나 왕이 후원한 개혁 활동은 프란체스코 Francesco 수도사에게 엄격한 행동규범을 부과하고 교구 성직자 사이에 만연된 부패를 일소했다.
히메네스는 에스파냐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되살리는 데도 기여했다.
이탈리아 Italia의 진지한 성직자들은 이탈리아 교회를 소명에 더욱 충실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청이 바람직한 모범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 수도회를 개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개혁가들은 경건과 사회봉사의 높은 이상에 헌신하는 수많은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했다.
북유럽에서는 에라스무스 Erasmus와 토머스 모어 Thomas More 같은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스트들이 가톨릭 개혁 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들은 부패를 비판하고 종교 문서를 편찬했으며 평신도에게 소박하고도 진실한 종교생활을 해나가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는 측면에서 가톨릭 종교개혁은 전혀 적절치 못했다.
1530년대 이후 좀 더 공격적인 두 번째 단계의 개혁이 새로운 유형의 교황들 주도 아래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반종교개혁을 이끈 교황들—파울루스 3세 Paulus PP. III(재위 1534~1549), 파울루스 4세 Paulus PP. IV(재위 1555~1559), 성 피우스 5세 Pius PP. V(재위 1566~1572), 식스투스 5세 Sixtus PP. V(재위 1585~1590)—은 중세 전성기 이래 가장 열정적인 개혁의 십자군이었다.
그들은 모두 고결한 삶을 살았다.
실제로 어떤 교황은 지나치게 금욕적이어서 동시대인은 교황이 지나치게 성스러운 것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에스파냐의 한 공의회 의원은 성 피우스 5세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현 교황께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 해도, 그리고 그분의 성스러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누구도 필적할 수 없을 만큼 비범하다 해도 우리는 그럴수록 그 상황을 반가워해야 한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와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성스러운 교황은 방탕한 교황보다 훨씬 바람직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 교황들은 단지 성스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교황청의 재정을 쇄신하는가 하면 교황 자신들 못지않게 근엄하고 성스럽다는 평판을 얻은 주교 및 수도원장을 교회의 여러 직책에 임명했다.
교황의 개혁 노력은 트렌트(또는 트리엔트) 공의회 Council of Trent(Concilium Tridentinum)에서 한층 강화되었다.
1545년 파울루스 3세의 의해 소집된 트렌트 공의회는 1563년까지 수시로 회합을 가졌다.
토렌트 공의회 결정 사항은 새로운 반종교개혁 가톨릭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
트렌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티즘과의 타협안을 논의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공격했던 모든 가톨릭 신조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선행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선언되었고, 7성사는 은혜를 얻기 위한 불가결의 수단으로 선포되었으며 그것 없이 구원은 불가능했다.
성변화聖變化(성체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일), 연옥에 대한 믿음, 성인의 기도, 성직자 독신 규정 등은 가톨릭 제도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재확인되었고, 성경과 전승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합당한 원천으로서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주교와 사제에 대한 교황의 수월성秀越性 excellency(빼어나고 우월한 성질)이 명확히 옹호되었고 공의회에 대한 교황의 수월성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트렌트 공의회는 루터 반란의 기폭제가 되었던 면벌부의 교리마저 재확인했다.
물론 면벌부의 판매와 관련된 가장 고약한 폐습이 정죄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트렌트 공의회는의 조치는 교리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평신도 사목을 개선하기 위해 주교와 사제는 성직록을 하나만 받게 되었다.
무식한 사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든 교구에 신학교를 설립하도록 했다.
공의회는 또한 지역의 다양한 종교 관행 및 성인 숭배를 억누르고, 그것들을 로마가 공인한 새로운 의식으로 대치시켰다.
신자를 타락시키는 이단 사상을 막기 위해 공의회는 위험 서적을 탄압 또는 검열하기로 했다.
1564년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최초의 금서 목록을 발간했다.
이것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가 읽어서는 안 될 서적을 나열한 공식 목록이었다.
에라스무스—불과 40년 전만 해도 마르틴 루터에 맞선 가톨릭 옹호자였다—의 저작 전부가 즉각 금서 목록에 올랐다.
그 후 금서위원회 Congregation of the Index로 알려진 상임기구가 설치되어 목록을 수시로 개정했다.
1966년에 금서위원회가 폐지될 때까지 개정 작업은 모두 40회 이상 행해졌다.
정죄된 책의 대부분은 신학 논저였으며, 아마도 그 목록은 학문의 진보를 가로막는데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금서 목록은 교리상의 불관용을 보여주는 싸늘한 상징물이었다.
이 같은 불관용은 16세기 그리스도교 전반을 특징짓는 것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도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예수회
교황들의 독립적 활동과 트렌트 공의회의 법령에 이어, 반종교개혁의 세 번째 주요 추진 세력으로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Sanctus Ignatius de Loyola(1491~1556)가 설립한 예수회를 들 수 있다.
에스파냐의 귀족 출신인 로욜라는 젊은 시절에는 세속적인 군인이었으며, 1521년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다(루터가 보름스 Worms에서 카를 5세 Karl V에게 도전하던 해였다).
병상에서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진로를 바꾸어 그리스도의 영적 병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 10개월 동안 그는 에스파냐의 소읍 만레사 Manresa 근처 한 동굴에서 은둔자로 살았다.
이 시기에 그는 황홀경을 체험했고, 나중에 발표된 그의 명상 지침서 ≪영적 훈련≫의 원리를 구상했다.
1535에 완성되어 1541년에 처음 출간된 이 지침서는,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체계적인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극복하고 신께 봉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제시했다.
이 책은 곧 모든 예수회 수도사의 기본 지침서가 되었고 가톨릭 평신도들도 이 책을 널리 학습했다.
로욜라의 ≪영적 훈련≫은 16세기에 간행된 종교서적 가운데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성 이그나티우스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수회 Societas Iesu(영어 Society of Jesus) 설립이었다.
예수회는 1534년 파리에서 로욜라 주변에 모여든 6명의 제자로 구성된 작은 무리로 시작했으며, 설립 목적은 청빈·순결·선교사업을 통해 신을 섬기는데 있었다.
1540년 예수회는 교황 파울루스 3세에 의해 가톨릭교회의 정식 교단이 되었고, 로욜라가 죽던 무렵에는 회원이 1,5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예수회는 16세기의 가톨릭 개혁 운동 과정에서 성장한 교단 가운데 가장 전투적이었다.
단순한 수도회가 아니라, 신앙의 수호를 맹세한 병사들의 단체였다.
그들의 무기는 총과 창이 아니라 웅변과 설득, 그리고 올바른 교리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예수회는 이내 세속적 영향력 행사에도 능란해졌다.
예수회의 조직은 군대 조직을 모방한 것이어서 총사령관격인 수장이 있었고 엄격한 규율이 모든 회원에게 강제되었다.
회원의 개성은 무시되었고 평회원은 수장에게 마치 군대의 사병처럼 복종해야 했다.
예수회의 수장은 '검은 교황'—교단의 복장 색깔에서 유래—으로도 불렸다.
그는 종신직으로 선출되었고 다른 회원의 조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상급자는 교황 한 사람뿐이었고, 예수회의 모든 간부는 교황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서약했다.
이 서약 때문에 그들에 대한 처분권은 항시 교황의 재량에 맡겨졌다.
예수회는 이교도 및 그리스도교도의 개종에 주력했고 학교 설립에도 힘을 쏟았다.
애초에 해외 선교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므로 초기의 예수회 수도사들은 인도, 중국,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등지의 이방인에게 전도했다.
예를 들어 성 이그나티우스의 가장 가까운 초기 동료 중 한 사람인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Sanctus Francisco Javier(1506~1552)는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원주민 수천 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수천 마일을 누비며 전도활동을 했다.
로욜라는 맨 처음에는 예수회를 프로테스탄티즘에 맞서는 돌격부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의 열기가 점점 고조되면서 예수회도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회는 16세기 후반 유럽 전역에서 설교와 외교—때로는 목숨까지 무릅써가며—를 통해 칼뱅주의자들과 직접 대결했다.
많은 지역에서 예수회는 지배자와 그 신민을 가톨리시즘에 머물도록 하는데 성공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지역—특히 폴란드 Poland, 독일 Germany 일부 지역, 프랑스 France 등지—에서는 과거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빼앗겼던 영역을 되찾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예수회는 정착이 허락된 모든 곳에 학교와 대학을 설립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톨리시즘 Catholicism(가톨릭교)의 생명력은 폭넓은 학식과 교육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이 설립한 학교는 대단히 훌륭하게 운영이 되어서, 종교적 증오의 불꽃이 사그라진 뒤에는 프로테스탄트 상류계층의 자제가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반종교개혁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남긴 유산이 있듯이 '반종교개혁이 남긴 유산'도 분명히 있다.
16세기 가톨릭 개혁 운동의 가장 큰 업적은 신앙의 수호와 갱생이었다.
이 개혁자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더라면 가톨리시즘은 17세기와 18세기에 전 세계를 휩쓸지도 못했을 것이고 유럽에서 오늘과 같은 활기찬 영적 세력으로 재등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에서 초래된 열매는 그것 말고도 있었다.
그 하나는 예수회의 교육활동 덕분에 가톨릭 국가에서 교육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자선활동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는 점이다.
반종교개혁 가톨리시즘은 신앙과 더불어 선행을 꾸준히 강조했으므로, 활력을 되찾은 이 종교에서 자선활동은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종교개혁의 지도자인 성 프랜시스 드 살 Saint François de Sales(1567~1622)과 성 뱅생 드 폴 Saint Vincent de Paul(1581~1660)은 설교와 저술을 통해 자선을 권면했고, 고아원과 빈민구제소 설립의 물결이 전 유럽 가톨릭 국가를 휩쓸었다.
반종교개혁은 종교적 여성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했다.
반종교개혁 가톨리시즘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같은 정도로 여성의 결혼을 성스러움에 이르는 길로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종교적인 엘리트 여성에게 각별한 역할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빌라의 성 테레사 Saint Terea of Ávila(1515~1582)의 신비주의를 묵인했고 우르술라회 Ursulines와 자선수녀회 같은 새로운 수녀회의 설립을 허용했는데, 이런 면모는 프로테스탄티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모두 여성을 사제직에서 배제했지만, 가톨릭의 독신 여성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종교적 삶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의 관용적인 그리스도교를 이어받지 못했다.
그리스도교 휴머니스트는 반종교개혁 교황들의 호의를 얻지 못했고 갈릴레오 같은 자연과학자는 의혹의 눈길을 감수해야만 했다(제16장 참조).
하지만 16세기의 프로테스탄티즘 역시 16세기의 가톨리시즘과 마찬가지로 관용과는 거리가 멀었고 합리주의에 대해서는 한층 더 적대적이었다.
실제로 반종교개혁 신학자들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St. Thomas Aquinas의 스콜라 철학 Scholastic Philosophy으로 복귀했던 까닭에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에 비해 인간 이성의 존엄성을 훨씬 많이 인정했다.
이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성경의 권위와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17세기 이성주의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가 젊은 시절 예수회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3장 결론
프로테스탄티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 이후에 그리고 과학혁명과 계몽사상 이전에 등장했다.
그러므로 역사적 전개 과정이 필연적으로 르네상스에서 종교개혁과 계몽사상을 거쳐 '근대 세계의 승리'로 이어진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학자들 사이에 세부적인 면에서 계속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르네상스 문명으로부터 별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근본적 차원에서 볼 때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는 휴머니스트들의 사상과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르네상스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출발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리스도교 휴머니스트들의 종교 타락 비판은 독일에서 루터 반란에 기여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치밀한 연구는 좀 더 신뢰할 만한 성경 판본 출간으로 이어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활용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휴머니스트 로렌초 발라 Lorenzo Valla에서 에라스무스를 거쳐 루터에 이르는 직접적인 계보가 형성되어 있다.
발라의 ≪신약성서 주해≫는 에라스무스가 1516년 그리스어 ≪신약성서≫ 및 라틴어 ≪신약성서≫ 번역본을 간행하는데 영감을 주었다.
한편 에라스무스의 ≪신약성서≫는 루터로 하여금 1518년에 '고해'의 정확한 성서적 의미에 대한 몇몇 중대한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했고 1522년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루터는 1519년 에라스무스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의 자랑이자 우리의 희망"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즉각 자신이 루터의 원리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다른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스트들도 그 선례를 따랐다.
그들은 루터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의 가르침이 분명히 드러나자마자 프로테스탄티즘을 회피했다.
이렇게 갈라서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대부분의 휴머니스트가 자유의지를 믿었던 반면 프로테스탄트는 예정설을 믿었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 본성을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보았던 반면 프로테스탄트들은 인간 본성이 말할 수 없이 부패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은 세련됨과 관용을 옹호했지만 루터와 칼뱅의 추종자들은 복종과 일치를 강조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르네상스 문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성장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이 근대 유럽 역사의 두드러진 여러 특징을 형성하는데 뚜렷하게 기여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유럽 주권 국가들의 세력이 점차 커졌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독일 제후들이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한 주요 동기는 주권을 장악하려는데 있었다.
덴마크 Denmark, 스웨덴 Sweden, 잉글랜드 England의 군주들도 같은 동기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했다.
루터와 칼뱅 같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경건한 지배자에 대한 복종을 설교했으므로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국가가 교회를 직접 통제했으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국가 권력의 신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국가 권력과 프로테스탄티즘을 간단하게 등식화해서는 안 된다.
국가 권력은 1500년에 이르러 프랑스와 에스파냐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가톨릭 국가의 왕들은 루터파 독일 제후들이나 헨리 8세 Henry VIII가 종교개혁 과정에서 장악한 권력에 필적하는 권력을 교회에 대해 휘두르고 있었다.
루터가 1520년대에 작성한 각종 호소문에서 원용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는 그 무렵 이미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활기찬 구어체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독일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은 다른 지방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지역별로 언어의 차이가 심했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에 의해 널리 보급된 독일어는 그 후 곧 독일 전역의 표준어가 되었다.
종교는 독일을 정치적으로 통일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진영과 가톨릭 진영으로 분열시켰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가 외국인 가톨릭 군주에 대해 승리를 거둔 네덜란드 Netherland 및 중부 유럽 몇몇 지역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국민적 일체감을 드높였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잉글랜드일 것이다.
잉글랜드는 프로테스탄티즘 등장 이전에서 국민 의식이 강했지만, 새로운 신앙은 그와 같은 민족주의에 새로운 확신—잉글랜드가 신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나라라는 확신—을 부여해주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남녀 양성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남성 개개인은 중세 가톨릭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에 대해 양면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칼뱅의 제자 존 녹스 John Knox는 <괴물 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라는 글에서 스코틀랜드 Scotland의 가톨릭 섭정인 메리 1세 Mary I(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를 통렬히 비난했지만,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여성들과는 깊은 존경심으로서 친분을 유지했다.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 Mary I인 메리 튜더 Mary Tudor가 프로테스탄트 사제였던 사람들에게 아내를 버리라고 요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실망스럽게도 재빨리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하나의 신념 체계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여성의 운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묻는다면, 비록 여전히 종속적인 지위에 놓여 있기는 했지만 프로테스탄티즘 아래에서 여성은 조금은 더 평등하게 되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남성에게는 물론 여성에게도 진지하게 성경을 공부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한 초등교육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남성 지도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며 따라서 가정과 사회에서 언제나 남성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뱅은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자신의 종속적 지위에 만족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녀가 남성에 비해 열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루터와 칼뱅은 모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행복한 결혼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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