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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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를 이끈 즐거운 유희

새샘 2024. 11. 19. 11:38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인기에 힘입어 40여 년 전 유행했던 한국 아이들의 놀이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바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놀이가 잔인한 어른들의 생존 게임으로 이어지는 이 드라마에 왜 세계는 열광했을까?

 

인류 역사에서 놀이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가령, 험난한 자연환경을 딛고 유라시아를 제패한 유목 전사들에게 놀이는 잔인한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어린 시절 놀이를 통해 키운 실력은 이들 군사력의 원천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고고학 유물에서 발견되는 고대인의 놀이 흔적과 그 속에 담긴 숨겨진 의미를 살펴보자.

 

 

○놀면서 배우는 초원의 지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태어나고서 몇 년 동안 부모와 사회의 집중적인 보호를 받으며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배워나가야 한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은 다른 사람(보통은 자신과 가까운 어른)의 모습을 흉내 내고 따라 하며 앞으로 삶을 영위해나갈 때 긴요한 정보들을 습득한다.

 

어린아이들에게 놀이는 그 자체로 즐거운 유희다.

더불어서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사회의 규칙을 습득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적응해나간다.

4~5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에서부터 고구려 벽화에 이르기까지 벽화에 그려진 그림들은 고대인들이 사물을 모방하고 학습하는 교재 역할을 했다.

가령, 고대의 아이들은 벽화에 그려진 야생 소를 사냥하는 그림을 보고 야생 소의 모습은 어떠한지, 야생 소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을 것이다.

 

고대 유목 민족의 아이들은 말타기, 활쏘기, 씨름과 같은 놀이를 통해 기마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쌓아나갔다.

2,000년 전 중국 북방을 호령했던 흉노족에 대해 기록한 중국 역사서에는 흉노족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양을 타고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놀이를 하며 기마술을 익힌다고 적혀 있다.

유목 민족 아이들은 걷기도 전부터 기마 놀이를 하며 말 타는 법을 익힌 셈이다.

그 결과, 그들의 넓적다리는 기마 자세를 하기에 편하도록 변형되기도 했다.

실제로 초원 기마 전사의 무덤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그들의 다리뼈를 살펴보면 말의 등에 잘 달라붙을 수 있도록 다리가 O자형으로 휘어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놀이를 통해 체화한 능력에 힘입어 이들 유목 민족들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가차 없이 몰살시킬 만큼 가공할 능력을 지닌 기마 부대를 갖추게 된다.

흉노에서부터 몽골 그리고 16세기까지 존속한 티무르 제국 Timurid Empire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 동안 초원의 전사들이 유라시아를 제패한 배경에는 어릴 때부터 놀이로 단련한 기마 전사로서의 실력이 숨어 있다.

 

 

(위)중국 신장성에서 발건된 3,000년 전 시먼즈 암각화, (아래)샤먼과 함께 잔치를 하는 장면이 새겨진 카자흐스탄 암각화(출처-출처자료1)

 

유목 민족에게 놀이는 제사의 한 양식이기도 했다.

수천 년 전 유목 민족들이 누렸던 흥겨운 놀이는 지금도 그들이 새긴 암각화에 잘 남겨져 있다.

그들은 1년에 두 번 조상의 무덤 근처에 만든 암각화 터에서 모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잔치를 열고 다양한 놀이를 하며 서로의 능력을 겨루었다.

중국 신장성(신강성新疆省) 후두비에 위치한 시먼즈(석문자石門/子)라는 암각화에는 우리나라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처럼 모든 사람이 춤을 추다 똑같은 포즈로 정지한 듯한 장면이 새겨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카자흐스탄 Kazakhstan의 탐갈리 Tamgaly 암각화에서는 마치 현대 화가 키스 해링 Keith Allen Haring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림체로 고대인들이 흥겨운 놀이와 활쏘기를 즐기는 모습의 그림이 빽빽히 채워져 있다.

흥겨워 보이는 놀이와 축제의 장 뒤에는 혹독한 자연환경을 떠돌며 유목 생활을 하고 전쟁을 치르며 늘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 있었던 유목민들이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현대 몽골의 나당 축제에서 아이들이 말 경주하는 모습(출처-출처자료1)

 

몽골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여름이면 '나담'이라는 축제 Naadam Festival가 열린다.

이 축제에서는 말타기, 활쏘기, 씨름 등을 통해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수천 년 동안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유목 민족의 지혜가 담긴 놀이들이다.

 

 

○<수렵도>에 나타난 고구려인의 놀이

 

무용총의 <수렵도>(출처-출처자료1)

 

북방 유목 민족이 초원에서 즐겼던 놀이는 이내 널리 확산된다.

고구려 벽화에 표현된 다양한 씨름 장면과 사냥하는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고구려인들도 어린 시절부터 놀이를 통해 사냥과 활쏘기 기술 등을 연마하여 강한 전사로 성장했다.

많은 사람에게 친숙한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狩獵圖>는 고구려인들이 사냥과 활쏘기를 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 <수렵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수렵도> 아래쪽에 위치한, 발걸이(등자鐙子)를 찬 고구려 기마 전사는 사냥개와 함께 호랑이를 사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사가 겨누고 있는 화살 끝은 뭉툭해서 실제 호랑이를 죽일 수 없어 보인다.

보통 유라시아 일대에서 발견되는 수렵도를 살펴보면 사람을 향해 입을 벌리고 공격하는 호랑이에 맞서서 화살을 겨누는 모습이 많다.

그런데 무용총 <수렵도>의 호랑이는 사냥개에 쫓기며 꽁무니를 빼는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한 이 장면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뭉툭한 화살'이다.

<수렵도>에 그려진 장면은 실제 수렵 장면이 아니라 길들인 야생 호랑이를 대상으로 수렵 연습을 하는 장면이다.

일종의 사냥 놀이를 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번에는 <수렵도> 위쪽을 살펴보자.

도망가는 사슴을 파르티안 사법 Parthian shot(배사법背射法: 등 뒤로 돌아서 화살을 쏘는 기법)으로 겨누는 전사가 보인다.

이 장면도 이상하기는 매한가지다.

사람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사슴을 잡으려면 그대로 따라가서 사냥하면 될 것을 왜 도망가는 사슴과 반대로 달려가면서 뒤로 돌아 활을 쏘는 것일까?

파르티안 사법은 말과 하나처럼 움직이던 유목 민족의 전매특허 기술이다.

페르시아와 실크로드 일대에서 발견된 고대 벽화에서는 사람에게 달려드는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를 피해 도망치는 시늉을 하다가 절체절명의 찰나에 몸을 돌려서 역으로 사냥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맹수에게 잡아먹힐 뻔한 긴장되는 순간에 오히려 맹수에게 달려들어 사냥하는 전사의 용맹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수렵도>에 그려진 전사는 맹수도 아닌, 도망가는 사슴을 향해서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한다.

다소 쓸데없이 유려한 기술을 선보이는 셈이다.

이는 곧 이들이 실제로 사냥을 하는 중이 아니라 새로운 활쏘기 방법을 수행하는 중이라는 뜻이다.

 

고구려가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방 초원의 유목 민족이 보유한 선진적인 전술과 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 덕분이다.

고구려인들은 놀이를 통해서 초원의 선진적인 기마술을 수용하고 습득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놀이의 미래

 

오래전 인류가 향유했던 놀이는 이후 몸을 움직이는 것에서 보드게임 board game 같은 추상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인류가 발명한 보드게임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체스 chess나 장기, 바둑이다.

한국식 보드게임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누는 삼국시대부터 널리 유행했다.

이처럼 말을 두고 수를 겨루는 추상적인 놀이는 발해에도 널리 퍼져서 발해 성터에서는 토기나 기와 쪼가리로 만든 장기 말이 수도 없이 출토된다.

발해의 고누는 여진족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서 이후 극동 지역을 대표하는 보드게임으로 등극한다.

추상적인 사고가 더해진 놀이를 통해 인류는 육체적인 전투력만 겨루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구사할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몇십 년 전만 해도 골목길에서 많이 했던 오징어 게임이나 구슬치기는 대략 1980년대 초를 기점으로 서서히 그 자취가 사라졌다.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고 흙바닥이었던 골목길이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서 대부분의 놀이는 온라인에서 구현되는 중이다.

 

놀이는 사회 변화에 따라 그 형태와 방식이 더불어 바뀐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놀이가 어떠한 형태로 바뀌든 간에 놀이를 통해서 인간이 인생을 배우고 삶의 지혜를 얻는다는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놀이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놀이에 숨겨진 가장 보편적인 호모사피엔스 Home sapiens(슬기사람)의 생존 본능을 건드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1. 1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