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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3장 종교개혁 4: 잉글랜드 종교개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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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3장 종교개혁 4: 잉글랜드 종교개혁

새샘 2024. 11. 15. 11:36

잉글랜드 England에서는 종교개혁이 유럽 대륙과는 다른 과정을 거쳤다.

대중적인 롤라드 운동 Lollard movement의 전통이 16세기에도 살아남기는 했지만, 롤라드파 Lollardy는 인구가 매우 적었고 영향력 또한 롤라드파에게 국한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개신교)의 궁극적 승리를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독일 Germany을 들끓게 했던 교황청의 착취와 부패로 인한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
잉글랜드 왕들은 16세기 초에 이미 왕국 내 성직 임명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잉글랜드에서 거둬들이는 교황세의 가장 큰 몫을 챙기고 있었다.
교회 법정도 특별히 불만을 살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톨릭 교회 법정은 프로테스탄트 잉글랜드에서 18세기까지 그 기능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16세기 잉글랜드는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던 것일까?

 
 

○헨리 8세와 로마와의 이별

 

헨리 8세(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7%A8%EB%A6%AC_8%EC%84%B8)

 
잉글랜드 역사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이 문제에 대한 대답도 왕으로부터 시작한다.
1527년 전제적인 국왕 헨리 8세 Henry VIII(재위 1509~1547)는 아라곤의 캐서린 Catherine of Aragon—페르난도 2세 Fernando II와 이사벨 1세 Isabel I 부부의 딸—과 결혼한 지 18년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메리 공주 Princess  Mary(1553년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인 메리 1세 Mary I로 즉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죽었다.
헨리 8세는 튜더 왕조 Tudor Dynasty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이 필요했고, 캐서린은 아이를 가질 나이가 지났다.
헨리 8세로서는 혼인관계를 끊을 좋은 핑계거리였다.
또한 그에게는 좀 더 개인적인 동기가 있었다.
당시 헨리 8세는 검은 눈의 궁녀 앤 불린 Anne Boleyn에게 푹 빠져 있었다.
헨리 8세는 앤을 왕비로 맞이하기 위해 캐서린 왕비가 자신의 친형 아서 Arthur와 결혼한 적이 있었으므로(아서는 결혼식 직후 사망) 자신과 캐서린과의 결혼은 처음부터 무효였다고 주장하면서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로마에 요청했다.
헨리 8세의 대변인이 지적했듯이 성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불결한 일'이며 그러한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으리라고 선언하고 있었다(「레위기」 20:21).
헨리의 입장에서 볼 때 성경의 명백한 금지 규정—자식 없는 결혼이 그것을 입증해주었다—은 제아무리 교황의 특면장特免狀 dispensation(헨리 8세와 캐서린이 그들의 결혼을 위해 얻어냈다)이라 해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헨리 8세의 소송은 교황 클레멘스 7세 Clemens PP. VII(재위 1523~1534)를 곤경에 빠뜨렸다.
헨리 8세는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로 인해 왕조가 끊기게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게다가 헨리 8세와 클레멘스 7세는 과거에 교황들이 헨리 8세가 주장한 것보다 취약한 근거로 재임 중의 왕들에게 결혼 무효를 허락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교황이 헨리 8세의 결혼 무효를 허락한다면 교황의 다른 모든 특면장의 타당서에 대해서도 의혹이 초래된 우려가 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칫하면 교황이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Holy Roman Emperor 카를 5세 Karl V의 분노를 사게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카를 5세의 군대는 로마 Roma(영어 Rome)를 완전히 장악했고 교황을 포로 상태로 휘어잡고 있었다.
클레멘스 7세는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졌다.
그에게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사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2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소송이 진행되도록 허락했지만 그 기간에 아무런 결론도 도출되지 못했다.
그러다 교황은 느닷없이 사건을 로마로 이송했고 그곳에서 모든 법적 절차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기다리다 지친 헨리 8세는 교황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1531년 그는 잉글랜드 성직자 회의로 하여금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보호자이자 유일한 수장'으로 선언하도록 강요했다.
1532년 그는 잉글랜드 의회를 부추겨 성직자에 대한 자못 선동적인 불평 목록을 작성토록 하고, 이를 이용해 모든 교회 입법을 승인 또는 취소할 수 있는 왕의 권리를 인정하라고 성직자들을 협박했다.
1533년 1월 헨리 8세는 아직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이 취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신 중인 앤 불린과의 결혼을 강행했다(신임 캔터베리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 토머스 크랜머 Thomas Cranmer는 5월에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9월에 엘리자베스 Elizabeth 공주가 태어났다.
아들을 바라던 헨리 8세는 실망한 나머지 아기의 세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는 1534년 초 왕위계승법으로 왕위계승권이 헨리 8세와 앤의 자녀에게 있음을 선언했고, 그해 말에는 수장법首長法으로 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이며 모든 오류와 이단과 부패를 시정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또한 의회는 잉글랜드로부터 교황에게로 가는 모든 세입을 왕에게로 돌리고 교황 법정의 상고를 금지시켰다.
1535년 헨리 8세는 토머스 모어 Thomas More를 수장법 승인을 취소했다는 이유로 처형하고 수도원 해체를 위한 첫 단계 조치를 취했다.
1539년 말에 이르러 수도원과 수녀원은 사라졌고, 왕은 그 토지와 재산을 압류해 지지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조치로 잉글랜드 교회와 로마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잉글랜드를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신교도) 국가로 만들지는 못했다.

일부 전통적 관행(순례와 유물 등)이 금지되었지만 잉글랜드 교회는 조직, 교리, 의식, 언어 등에서 압도적으로 가톨릭 Catholic의 모습 그대로였다.

헨리 8세의 명령으로 1539년에 의회가 선포한 6개 조항은 공인 정통 교리와 관련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사제에게 구두로 하는 고해,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성직자의 독신 등이 모두 재확인되었다.
라틴어 미사가 지속되었고 성찬에 관한 가톨릭의 교리가 재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부정할 경우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잉글랜드인 English에게는 수도원의 소멸과 왕의 계속되는 결혼 행각(헨리 8세는 도합 여섯 차례 결혼했다)만이 그들의 교회가 더 이상 로마에 종속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비쳐졌다.
 
 

○에드워드 6세

 
헌신적인 프로테스탄트—특히 칼뱅 Calvin의 주네브 Genève(영어는 제네바 Geneva)를 방문한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볼 때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에 가져온 변화는 매우 미흡했다.
1547년 왕위를 계승한 나이 9세인 에드워드 6세 Edward VI(헨리 8세와 그의 세 번째 아내인 제인 시무어 Jane Seymour 사이의 아들, 재위 1547~1553) 헌신적인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종교개혁 과업 완수의 기회를 제공했다.
어린 왕의 명백한 프로테스탄트 성향에 고무된 정부는 신속히 잉글랜드 교회의 신조와 의식을 개혁하는 일에 착수했다.
사제에게 결혼이 허용되었고 예배에서 라틴어 대신 영어가 사용되었다.
성상 숭배가 철폐되고 성상은 파괴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폐지되었고 그와 같은 기도를 위한 기부금은 몰수되었다.
세례와 성찬 이외의 모든 성사를 폐지하고 '신앙만에 의한 의인義人(이신칭의以信稱義)'의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확인하는 새로운 신앙 조항이 작성되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교회의 새로운 영어 예배 진행방식을 규정한 기도서가 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교리와 예배에 관련해 많은 부분이 미해결인 채로 남았지만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잉글랜드 교회는 프로테스탄티즘으로 확고히 방향을 튼 것처럼 보였다.

 
 

○메리 튜더와 가톨릭의 복고

 
에드워드 6세의 계승자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딸이자 경건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 Mary I(메리 튜더 Mary Tudor)(재위 1553~1558)였다.
메리 1세는 신속하게 에드워드 6세의 종교정책을 뒤집어 라틴어 미사를 회복시키고 결혼한 사제에게 아내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메리 1세는 의회로 하여금 가톨릭 복권을 표결토록 하는데도 성공했다.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해외로 도망쳤는데, 특히 주네브(제네바)로 간 사람이 많았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 등은 프로테스탄티즘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순교자들의 고난 소식이 프로테스탄트 유럽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그러나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고 정책은 잉글랜드 내부에서는 비교적 미미한 지방 차원의 저항을 촉발했을 뿐이다.
20년이나 종교적 격변을 겪고 난 끝인지라, 아마 대부분의 잉글랜드인은 메리 1세의 통치가 종교생활에 얼마간 안정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메리 1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사형 명령은 종교 저항을 일소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오히려 '피의 메리 Bloody Mary'와 '스미스 필드 Smith Field 화형장'에 관련된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선동은 (전통적 종교 형식의 복귀를 환영한 사람 사이에서조차) 광범한 불만의 기류를 형성했다.
또한 메리 1세는 수도원을 회복시킬 수도 없었다.
수많은 유력 가문이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체를 통해 이익을 얻었던지라 이를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메리 1세가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에스파냐 España 왕위 계승권자인 펠리페 2세 Felipe II와 결혼한 것은 또 다른 계산착오였다.
결혼 조약에는 메리 1세가 사망하더라도 펠리페 2세가 왕권을 계승할 수 없도록 명시되어 있었지만 잉글랜드인은 펠리페 2세를 믿지 않았다.
메리 1세가 펠리페 2세의 계략에 말려들어 에스파냐와 한편이 되어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다가, 유럽 대륙에 남아 있던 잉글랜드의 마지막 거점인 칼레 Calais마저 잃게 되자 잉글랜드인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메리 1세의 종교적 반혁명이 실패한 것은 단지 생물학적 이유 때문이었다.
메리 1세는 후계자를 임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6년 동안 통치한 뒤 사망하자 왕위는 프로테스탄트인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넘어갔다.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타협

 

엘리자베스 1세(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7%98%EB%A6%AC%EC%9E%90%EB%B2%A0%EC%8A%A4_1%EC%84%B8)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유능하고 인기 있는 왕 가운데 한 사람인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재위 1558~1603)는 부모의 결혼 배경과 자신의 성장 과정으로 말미암아 프로테스탄티즘을 선호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적으로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았고, 현명하게도 잉글랜드에서 급진적 프로테스탄티즘을 지원할 겨우 격렬한 교파 내분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른바 '엘리자베스의 종교 타협 Elizabeth settlement'을 주도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새로운 수장법(1559)을 선포해 메리 1세가 제정한 가톨릭 법령을 모조리 철회했고, 외국의 종교 세력(교황)이 잉글랜드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스스로를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통치자 supreme governor'라고 칭했다.
엘리자베스가 택한 '최고 통치자'란 칭호는 헨리 8세가 취한 '최고 수장 supreme head'이란 칭호보다 한층 프로테스탄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는 교회의 머리 head of church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에드워드 기도서 등 남동생 에드워드 6세 치세에 이루어진 프로테스탄트적인 예식 개혁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주교, 교회 법정, 성직자의 제의祭衣 등과 같은 가톨릭 관행들은 그대로 유지했다.
예정설과 자유의지설을 포함한 대부분의 교리 문제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39개조 신앙고백'(1562년 승인)은 분명히 프로테스탄트적인—심지어 칼뱅주의적인—것이었다.
그러나 기도서는 좀 더 온건했고, 성찬 같은 결정적인 문제에서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의 해석을 하나의 선언으로 결합시킴으로써("이것은 나의 몸이니 ········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 기도서는 신도들 사이에 무성했던 예배에 관한 대립되는 해석들을 매우 융통성 있게 포용했다.
 
이와 같은 '광교회주의廣敎會主義 latitudinarianism'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잉글랜드에는 종교적 긴장이 상존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뿐만 아니라 온건 프로테스탄트와 급진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도 긴장이 감돌았다.
여왕은 이런 다양성을 능란한 솜씨로 다루었지만 항상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타협이 유지되고 궁극적으로 잉글랜드가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극히 길었던 엘리자베스 치세 동안 프로테스탄트 잉글랜드가 가톨릭 에스파냐와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 치세를 거치는 동안 프로테스탄티즘과 잉글랜드 민족주의는 점차 하나로 결합해, 신이 잉글랜드를 선택했다는 강력한 확신으로 변했다.

잉글랜드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해 승리를 거둔 1588년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신민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을 잉글랜드인의 타고난 기질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국교 기피 가톨릭 신자를 탄압하는 법률은 점차 엄해졌고, 가톨릭 전통이 일각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가톨릭 신자는 박해받는 소수자 신세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일랜드 Ireland의 상황이었다.
아일랜드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신봉케 만들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대다수가 가톨릭으로 남았다.

1603년에 이르면, 프로테스탄티즘이 잉글랜드 기질과 동일시된 것처럼 가톨리시즘 catholicism(가톨릭교)은 아일랜드 기질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것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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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