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고학을 꽃피우게 한 제국주의 본문
"이 3억 명의 인도인이 열등한 민족이고 우리는 우수한 인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흥미 있는 일이었지요."
—레너드 울프 Leonard Woolf, ≪진주와 돼지 Pearls and Swine≫ 중에서—
고고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 제국주의가 세계 각국을 유리하면서부터였다.
서구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만들었고, 고고학자들은 새롭게 차지한 땅에 묻혀 있는 보물들을 경쟁적으로 발굴하고 때론 토론했다.
서구 열강의 박물관이 세계 각지에서 발굴하거나 약탈한 유물들로 넘쳐나는 이유다.
세계적으로 고고학 하면 떠오르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 Indiana Jones>를 생각해보자.
영화 속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보물을 손에 넣는다.
사람들은 존스 박사의 액션에 숨죽이고 그가 얻는 전리품에 환호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 <인디아나 존스>를 일본에서 리메이크한다면?
일본인 고고학자가 석굴암을 깨부수고 불국사를 폭파하며 자기가 원하는 황금 금관을 찾아간다면?
그런 영화에 박수를 치면서 볼 한국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등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는 수많은 이집트 미라와 근동의 유물들이 있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세계에서 제국주의를 경험한 나라와 식민지였던 나라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그 나라 박물관에 이집트 미라가 있으면 제국주의 국가였고, 없다면 식민지 국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는 고고학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1954년에 세계 각국은 전쟁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취지에서 '헤이그 문화재보호조약 Hagu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Cultural Property in the Event of Armed Conflict'을 체결했다.
전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그 나라의 문화재를 불법으로 없애거나 약탈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유럽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상대국의 문화재를 폭격하고 약탈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재 약탈의 한쪽 측면만 본 것이다.
서구 열강은 그때까지 전쟁과 침략을 통해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나라들에서 약탈한 문화재에 대한 어떠한 보상이나 대책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유물을 빼앗긴 나라들은 상대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 유물을 반환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집트가 영국을 침략해서 승리했더라도 영국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피라미드의 유물이나 미라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대안으로 제시된 헤이그 조약이지만, 실제로는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열강들이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되었다.
즉 헤이그 조약은 국제사회에서 약탈된 문화재를 반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버린 셈이다.
실제로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국가들은 대부분 독립했지만, 문화재의 제대로 된 반환은 거의 없었다.
파리국립도서관의 폐서廢書(버려진 책) 코너에서 발견된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받기 위하여 한국이 얼마나 많은 힘과 시간을 들였는지 생각해보자.
KTX를 수주하기 위해 프랑스는 1993년에 의궤 중 1권을 상징적으로 반환했다.
이후 프랑스 측의 미온적인 태도로 의궤 반환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지난 2010년 G20회의에서 한국과 프랑스는 의궤에 대해 5년 동안의 대여 계약을 체결하고 그 기한이 끝날 때마다 계속 연장하는 방식으로 합의했다.
실질적으로 한국이 의궤를 소유하되, 그 소유권은 프랑스에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양국이 서로 양보해서 어렵게 내놓은 결론이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난리였다.
심지어 프랑스의 도서관 사서들과 학예연구원 475명은 연명을 하며 그 반환을 조직적으로 반대했다.
프랑스가 내세우는 주요 논리는 제3세계 국가는 후진국이어서 문화재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9년 4월에 프랑스가 자랑하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프랑스가 다른 나라보다 문화재를 더 잘 관리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없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결국 프랑스의 반대자들 속내는 외규장각의 의궤가 반환되면 그들이 수백 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문화재를 다시 뺏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사실 돌아보면 외규장각 의궤는 1866년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한 이후 재불학자 박병선 씨가 다시 찾아내기 전까지는 프랑스도 그 존재 자체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힘겨루기를 통해 협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궤마저도 이렇게 힘들고 어정쩡하게 반환을 받았으니 약탈된 다른 문화재들을 되찾아오는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고고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1990년 대 초,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도서관의 5층에 있었다.
번잡한 대출대를 지나 조그만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퀴퀴한 먼지가 쌓여 있는 박물관 정리실이 있었다.
당시 필자는 박물관을 오고고는 중에 틈틈이 도서관의 고서 코너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의 숲에 빠져 있곤 했다.
지금은 구경도 할 수 없는 희귀본이나 고서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이 모아놓은 고고학 관련 서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했던 것이다.
보통 도서관의 장서는 관련된 연구자가 학교에 있는 경우 체계적으로 모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에는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까지의 근동과 이집트에 대한 영어는 물론이고, 독어, 불어, 그리스어 자료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당시에 출판된 웬만한 문헌들은 거의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도대체 이 책들을 누가 보았는지 궁금해서 책 뒤쪽의 대출카드를 보니 대부분 공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경성제대에는 근동이나 이집트 문명을 전공한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책들을 빌려서 제대로 볼 사람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치밀하게 장서를 모은 정성에 감탄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서양 열강이 근동과 이집트를 경쟁적으로 발굴한 자료들을 일본이 왜 이렇게까지 꼼꼼히 모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일제강점기의 일본 고고학자들이 어떻게 한국의 문화재를 조사했는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일제가 만들어낸 평양의 낙랑고분에 대한 보고서는 지금 보아도 호화판 그 자체였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고급스러운 제본에 컬러로 표현된 화려한 고분의 유물은 1990년대 한국의 어떤 보고서에 실린 것보다도 나아 보였다.
처음에는 일제가 한국의 문화재를 제대로 발굴하기 위해 노력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고분들은 혹독하게 도굴 당했다.
경주의 신라고분을 제외하고 눈에 보이는 고분들은 대부분 도굴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2011년에 일본에서 두 달 정도 머무르며 같은 시기 일본 내부의 고고학 보고서들을 조사하고 난 뒤였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호화스러운 보고서를 출판했으나 정적 일본 내부에서는 제대로 된 보고서는커녕 인쇄술도 형편없던 고고학 잡지들만 잔뜩 있었다.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은 고고학자들은 극히 소수였고, 대부분 자발적으로 자신이 살던 지역을 공부하던 향토학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선전하기 위하여 엄청난 비용을 들여 본국에서도 쉽게 만들지 못하는 보고서를 출판했던 셈이다.
더욱 놀라운 건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전시용으로 그렇게 호화롭게 발굴을 했으면서도 이후 대부분의 무덤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당시에 발굴하고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유물들이 쌓여 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무덤을 경쟁적으로 도굴하는 것도 당시의 일본총독부는 수수방관했다.
화려한 보고서 뒤에 숨겨진 일제 치하 한국문화재의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제대로 된 문화재를 관리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호화로운 겉치장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자신들보다 먼저 제국주의를 일구어낸 서구열강을 흉내 냄으로써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화려한 도록을 간행해서 자신들의 국력을 과시했는데, 그 출판물들은 친교의 목적으로 서로에게 기증되기도 했다.
필자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본 고고학 관련 서적들은 20세기 초반 세계를 상대로 경쟁적으로 자신의 패권을 펼쳤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일본도 다른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의 문화재를 자기 맘대로 발굴하거나 도굴해서 과시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화려한 보고서들을 벤치마킹을 한 것이다.
지금도 일부의 모습만 보고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오해하는 서양의 문헌들이 많으니, 고고학에서 제국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우리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재 침탈과 그 영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 주변의 유적과 문화재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흔적이 너무나 크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에 동조한 학자들을 비판하면 '그들의 연구 성과는 좋다' 또는 '인격적으로는 훌륭하다'는 식의 일본 쪽 의견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개개인 학자의 성격이나 인격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바로 국가 권력에 앞장서서 다른 사람을 억압할 때에 그에 암묵적인 동조를 하고 따라갔던 그 모습을 비판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여 이득을 얻으면 그 욕심에 편승한 또 다른 개인이 등장한다.
그 개인들이 모이고 모여 집단이 되고,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맹복적인 광기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하나의 거대한 이념으로만 집단 이기주의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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