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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 - 숙취를 해결하며 화합을 도모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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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 - 숙취를 해결하며 화합을 도모하다

새샘 2024. 11. 12. 18:57
뚝배기 양평해장국(출처-뚝배기 양평해장국 https://haejang.biz/%EB%A9%94%EB%89%B4%EC%86%8C%EA%B0%9C/)

 
진정한 술 애호가의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준비와 절제가 아닐까?

여기에서 준비라 함은 평소 체력 관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절제는 순간의 기분에 휩싸여 과음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 정도의 주도酒道를 갖춰야 술을 즐길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술은 주당의 주도를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 체력에 부치는 것도 생각도 않고 흥겨운 술자리 분위기에 취해 부어라 마셔라 하기 십상이다.
대신 인류는 술을 먹은 다음 날의 죄책감과 불편함을 이기기 위해 새로운 처치법을 발명해낸다.

바로 해장이다.

 
앞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고고학 유물에 따르면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와인이나 막걸리 같은 술을 주조해 마셨다.
당시 인류는 지금과 신체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는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슬기사람, 현생인류)였으므로 이들 역시 술 마신 다음 날에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숙취를 경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도 숙취를 해소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을 모색했으리라.

그러고 보면 술의 역사는 곧 해장의 역사인 셈이다.

 
 

○함께 해장하며 화합과 지혜를 도모하다

 

2,400년 전 스키타이 고분에서 발견된, 술과 마약을 섞어 마셨던 황금 그릇(출처-출처자료1)

 
도원결의하는 유비, 관우, 장비의 심정으로 작당하여 술을 마셔놓고는 그다음 날에 상사나 아내의 눈치를 피해서 술에서 깨느라 고생하는 것은 동서고금 마찬가지다.
여기서 몇 가지 흥미로운 고대의 독특한 해장 문화를 소개해볼까 한다.
 
먼저 유라시아 대륙을 말을 타고 달리던 스키타이인 Scythians들의 해장 문화다.
초원의 유목민들은 늘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서 사방을 다녀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대가족이 한데 모여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랬다가는 각 가정에서 키우는 수백, 수천 마리의 동물을 먹일 목초가 금방 동이 나버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스키타이인들은 가족이 늘어나면 무조건 분가를 해서 본가와는 멀리 떨어진 다른 목초지로 이동한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장자가 아버지의 대를 잇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막내가 가업을 계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은 일가친척 내지 부족끼리 자주 만나지 못했다.
이들이 만나는 것은 1년에 두 번뿐이었는데, 해마다 봄가을에 한데 모여 잔치를 하고 정을 나누었다.
그런데 몇 달만에 만나는 친척 사이가 늘 좋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초원의 유목민들은 분쟁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함께 모여서 말젖으로 빚은 술(마유주馬乳酒)과 더불어 대마초 연기를 마시며 질펀하게 어우러졌다.
즉 스키타인인들은 작은 텐트 안에 모여서 솥에 뜨거운 돌을 담고 그 위에 대마초 씨앗을 뿌려 올라오는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이들은 밤새 춤을 추고 놀았다.
 
여기까지는 여느 지역의 음주 문화에 크게 다를 게 없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 날이다.
이들은 전날 마신 술과 대마초 연기로 인해 쓰린 속을 부여잡고 다음 날 아침 다시 한자리에 모여서 해장 겸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전날 밤 술김에 합의했던 여러 안건을 다시 꺼내어 얘기하면서 그 말들이 진심이었는지 확인했다.
이 자리에서 확인된 내용은 부족의 합의로 결정하고 이행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고대 중국의 상商나라에도 이와 닮은 문화가 있었다.
상나라는 갑골문甲骨文의 기원으로 유명하다.
갑골문은 거북의 등딱지나 짐승의 뼈에 새긴 상형문자로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를 보여주는데, 주로 점복占卜(점치는 일)을 기록하는 데에 사용했다.
 
당시 상나라의 왕은 점을 치는 역할도 수행했는데, '정인貞人'이라 불리는 용한 점쟁이들이 그를 보좌했다.
왕과 정인들이 하는 일은 매일 저녁 모여서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이들은 취한 상태, 즉 일종의 환각 상태에서 조상신과 소통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수나 기근을 예언하는 등 국운을 좌우하는 점을 쳐야 했다.
점괘가 틀릴 경우, 하늘이 천명을 다시 거두어 간 것으로 간주되어서 왕은 추방당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읽기도 했다.
 
그런데 술이라는 것은 흥을 돋우고 취기를 달아오르게 하지만, 기억을 잃게도 만든다.
그래서 상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자신들이 친 점괘를 따로 메모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것이 갑골문의 기원이다.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왕과 신하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여 해장을 하면서 전날 기록해둔 점괘를 다시 꺼내어보고 국가의 대소사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을 마시는 것은 한국만의 해장 문화

 
해장 문화는 술을 좋아하는 나라들에서만 발달하는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그런데 전 세계 어디를 봐도 한국처럼 '해장'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그만큼 한국인들이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당장에 '해장국'을 그 뜻을 고스란히 살려서 번역할 만한 마땅한 단어가 없다.
영어로 'Hangover stew'라고 하면 왠지 오히려 먹고 나면 숙취가 생기는, 알코올을 넣은 음식으로 오해할 것 같다.
'Hangover reliever soup' 정도면 뜻이 통하겠지만, 이 역시 민간요법에 나오는 요리 이름 같다.
러시아어로 해장국에 대해 '숙취 없애주는 수프 Суп от похмелья'라고 설명하니 현지인들이 그 뜻을 알아듣는 듯하긴 했지만 완벽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외국 사람들이 해장의 개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해장이라는 행위에 대한 태도의 차이 때문인 것도 같다.
한국에서 해장은 보통 시원하고 개운한 뒷맛을 가진 국물을 마시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의 경우에는 따로 해장이랄 게 없다.
러시아 술꾼들은 보통 술에서 깨기 위해 아침에 맥주나 주스를 마시기 때문이다.
진짜 술꾼들은 보드카를 한잔 들이킨다고는 하는데, 이쯤 되면 거의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의 알코올의존증이 의심된다.
 
필자도 딱 한 번 러시아식으로 해장을 해본 적이 있다.
러시아를 비롯해 구소련의 여러 국가에서는 8월 15일을 '고고학자의 날'로 정해서 이날 현장에서 잔치를 벌인다.
유학 시절 필자는 이날 잔치에 참가한 뒤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아파 텐트에서 비틀대며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현지인 친구가 내게 시원한 무엇인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목이 말랐던 필자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콜라 같은 건가 보다'하면서 친구가 준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마시고 나니 맥주였다.
마실 것이 마땅치 않았던 시베리아 한복판이어서 현장에 있는 시원한 맥주를 건넨 것 같았다.
어쨌든 숙취 상태에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니 갈증이 풀리고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술이 깼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알코올 분해효소가 선천적으로 많은 서양인들은 이처럼 주로 도수가 낮은 술을 마시며 해장한다.
위스키의 본고장이자 술꾼 많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에서는 해장술을 '개털 hair of the dog'이라고 한다.
늑대 같은 맹수에게 물린 상처는 그 짐승의 털을 문지르면 낫는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말로, 쉽게 말해 '술병은 술로 고친다'라는 뜻이다.
 
반면 알코올 분해효소가 서양인에 비해 선천적으로 적은 아시아인들은 술로 해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국 사람들은 해장 음식으로 연두부와 쌀죽, 일본 사람들은 된장국[미소시루(미쟁즙味噌汁) 즉 미소된장국]에 낫토(납두納豆 즉 띄운콩)를 먹는다.
몽골 사람들은 원래 우유를 발효시켜 약하게 알코올 성분이 함유된 쿠미스 kumys를 마시며 해장을 했지만, 요즘에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맥주를 많이 먹는다.
 
각 나라마다 저마다의 해장 문화가 있지만, 우리나라만큼 '해장'이란 단어가 널리 쓰이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한국에는 아예 '해장국'이라는 음식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한국에서 해장국을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생활의 한 부분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회식을 한 다음 날이면 으레 함께 술자리를 한 이들 중 한 명이 "오늘은 해장국이나 할까?" 하며 전날 멤버들을 다시 불러내어 합동으로 숙취 해소를 하기도 했다.
 

다 같이 모여 해장을 하면서 전날 과음으로 인해 상했을 서로의 건강을 생각해주고, 간밤의 여흥을 맑은 정신으로 거듭 이어가는 해장 문화는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라고 여겨진다.

우리나라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러시아나 폴란드에도 이런 지혜로운 해장 문화가 없다.
지금 당신이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더욱 행복한 이유는 아마도 내일의 따뜻한 해장국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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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1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