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파괴와 복원, 고고학 발굴의 패러독스 본문
고고학만큼 역설적인 학문은 없다.
왜냐면 과거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중하게 발굴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번 발굴한 유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다.
간혹 유적을 발굴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있다.
땅속에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적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정작 과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고고학의 발전은 저해된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에서 사소한 정보라도 놓칠세라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유적이 나오면 세밀하게 유물과 유적을 촬영하고, 도면으로 만들어 놓으며 모든 과정을 일일이 노트에 적는다.
기계의 도움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고고학 발굴장에서의 많은 과정은 여전히 사람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다.
고고학 현장에서 강인한 체력과 꼼꼼함이 동시에 요구되는 이유다.
고고학이 파괴를 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구제발굴' 때문이다.
보통 현대 구조물을 만들 때 땅을 깊게 파거나 메우는 정지整地 작업이 동반되기 때문에 땅속에 있는 유적의 파괴는 필연적이다.
구제발굴은 건물이나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땅속에 있는 유적이 불가피하게 파괴될 때 공사에 앞서 미리 유적을 발굴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건설 공사가 많아지면서 한국에서는 전체 발굴의 95% 이상이 구제발굴이다.
정말 중요한 유적이라면 아예 공사가 중단되거나 유적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발굴이 끝나면 건물들이 들어서고 영영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사실 구제발굴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도입된 지는 3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서울이 발전하면서 얼마나 많은 유적이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구제발굴은 결코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발굴의 기술은 계속 발전하기 때문에 지금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발굴했다고 해도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난 뒤에 우리의 후손들이 본다면 아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민국에서 고고학 발굴로 가장 큰 논쟁이 일어난 곳 중 하나는 강원도 춘천시 한가운데에 있는 중도中島 레고랜드 건설장이었다.
레고랜드 부지에서는 비파형동검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은 한국은 물론, 동북아 청동기시대의 연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중요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비파형동검이 무덤이 아니라 집자리(집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비파형동검은 거의 예외 없이 고인돌이나 돌무덤 같은 특수한 무덤에서만 발견되었다.
족장들만 사용했다가 죽은 뒤 무덤에 같이 가져갈 정도로 귀중했다는 뜻이다.
중도 유적의 발굴로 비파형동검이 보통 집에서 사용될 정도로 일반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활발히 사용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비파형동검뿐이 아니었다.
중도는 몇백 개의 고인돌과 1,300기에 달하는 집자리를 비롯하여 방어시설인 환호環濠(해자垓者의 일종으로, 마을 외곽에 U자 모양으로 파인 구덩이)와 경작지, 그리고 무덤 등이 발견되어 청동기시대의 거대한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고고학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아마 청동기시대에 중도는 춘천 일대의 손꼽히는 도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당연히 몇십 년을 두고 천천히 조사를 해야 한다.
1985년에 일본 나라현(나량현奈良県)에 있는 후지노키(등의목藤ノ木) 고분이 발굴되었다.
이 고분은 6세기 무렵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물을 건너온 사람)의 무덤이었다.
특히 도굴되지 않고 거의 완벽하게 보존이 된 돌관(석관石棺)과 벽화가 발견되어,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도래계의 증거라고 대서특필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돌관을 다시 덮어버리고 조사 중지를 선언했다.
한국에서는 도래인의 역사를 숨기기 위한 일본의 술수라고 의심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이후 일본은 몇 년의 조사 끝에 그 자료를 발표했다.
그 시간은 유물을 손상 없이 발굴해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왜 레고랜드를 유적지가 많아서 사적지로 등록된 중도 위에 세우려고 했을까?
그곳은 춘천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경치도 수려하고 접근성도 좋은, 아직까지도 개발이 안 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이 개발이 되지 않은 이유는 1980년대에 이미 이곳에 엄청난 유적이 존재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적의 규모와 그 의의로 볼 때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대대손손 보존하기 위해 사적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적이 있다면 빨리 발굴해서 그 위에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을 세우고자 결의했다.
이렇듯 춘천 중도의 문제는 경제논리를 앞세운 현대 자본주의에 있었다.
경제논리를 앞세워 고고학 유적이 파괴되는 현실은 비단 중도뿐이 아니다.
4대강 사업 또한 고고학적으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고고학 조사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유적은 강가에 분포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안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주로 강가에서 살았음은 수많은 발굴이 증명한다.
그런데 4대강 사업은 강가를 정비하는 것이 그 기본이니,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것이 바로 강가의 유적이었다.
당시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발굴을 진행했고, 그래서 정확히 어떠한 유적이 있었는지, 발굴은 제대로 되었는지, 그 정보는 미약하기만 하다.
지금도 '구제발굴'이라는 개념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한창 경제개발에 열을 올릴 때만 해도 이런 발굴조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1960년대 말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는 동안 문화재조사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그 도로가 놓이면서 얼마나 많은 무덤과 문화재가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문화재도 경제논리에 밀려서 훼손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이 대표적인 예다.
전문가들의 추산에 따르면 원래 풍납토성은 둘레 3.5킬로미터를 높이 11미터 정도로 쌓았다고 한다.
5층짜리 아파트 정도 되는 높이의 성곽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워낙 대규모였고 눈에 잘 띄었기 때문에 1960년대 초반에 사적지로 지정이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말에 한강을 따라서 제방사업을 하면서 풍납토성 일부를 사적지에서 해제했다.
이후 1970년대에는 성안은 물론 성벽 근처에 레미콘 공장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상식적으로 백제시대의 거대한 성벽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그 안에는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적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서울 전체의 경제개발의 광풍이 불 때였으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은 땅속의 문화재는 간과한 채 광범위한 개발이 이루어졌다.
물론 때때로 성벽의 보수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조사는 하지 않은 미봉책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1970년대 이후 서울 강남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백제 최초의 수도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의 외형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제때에 보존 조치를 하지 못한 탓에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2014년 서울시의 통계에 따르면 약 83년에 걸쳐서 모두 매입할 경우 2조 4350억 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여기에 영문도 모른 채 풍납토성 안에서 살다가 피해를 입은 주민들 그리고 소리 소문도 없이 파괴된 유적을 생각하면 그 손실은 천문학적이다.
처음 개발을 시작했을 때에 제대로 된 조사와 미래에 대한 예측을 했었다면 충분히 줄일 수 있는 피해였다.
앞서 말했듯이 문화재 조사의 핵심은 '불가역성', 즉 한번 발굴한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제 고고학적으로 보면 춘천 중도가 개발되건 개발되지 않건 큰 의미는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 와서 개발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이 유적은 급하게 발굴이 되어버린 껍데기만 남은 유적이기 때문이다.
중도 유적의 경우 3000년 전의 역사를 품고 있는 한강에서 발견된 가장 큰 마을(또는 도시)의 흔적이었다.
아마 제대로 발굴한다면 몇십 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중도 유적 발굴은 약 5년 만에 끝났다.
그리고 수많은 유적들이 존재했을 지도 모르는 4대강의 강가에서 유적은 더는 찾아볼 수 없다.
4대강 사업은 마무리되었고 유적들이 있을 수도 있었던 강가는 이미 다 정비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선사시대 유적 공원에서 복원된 집자리들은 사실 이미 발굴이 다 되고 난 뒤에 발굴 당시와 똑같이 만들어놓은 복제품(카피 copy)일 뿐이다.
미래의 고고학자들은 과연 우리를 성실한 고고학자로 기억할까, 아니면 발굴을 앞세우며 무자비하게 유적을 파헤친 서투른 고고학자들로 기억할까.
필자로서는 더는 중도나 4대강 같은 발굴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고고학도 그러하다.
과거의 유적이 파괴되어 우리에게 그 속살을 보여줄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인들의 모습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상처를 당연시하고 발굴에만 급급하게 된다면 후대에 물려줄 유물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고고학자로서는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을 정도다.
고고학자들은 몇천 년의 세월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만큼 후대 역시 누리기를 원한다면 문화재의 보존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 아닐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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