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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인 정학교 "첩석도" "괴석도" "죽석도" 본문

글과 그림

몽인 정학교 "첩석도" "괴석도" "죽석도"

새샘 2024. 11. 6. 22:45

"누가 추상을 모더니스트들의 창안이라 말하는가"

 

정학교, (위)첩석도, 19세기 말, 종이에 수묵, 27x40cm, 개인 (아래)괴석도, 19세기 말, 종이에 수묵, 27x39cm, 개인(출처-출처자료1)

 
생각하자면 어지럽고 불우했던 조선왕조의 말기에 일호 남계우와 함께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1832~1914)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 회화사의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남계우가 나비를 잘 그려 '남나비'라고 불릴 때, 정학교는 괴석을 잘 그려 '정괴석'이라 불렸다.
 
그런 정학교건만 그의 이름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 기억에서 멀어지게 된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미술사에서도 정학교는 오원 장승업의 그림에 대필로 화제를 많이 써주었다는 것 정도만 이야기할 뿐, 정작 괴석과 대나무에서 많은 명작을 남겼음은 평가해주지 않는다.
이는 작품에 예술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과 예술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출신과 행적이 학계에 발표된 것은 아주 근래의 일이다.
 
정학교의 본관은 나주로 1832년 문경에서 정약면丁若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약면은 다산 정약용과, 정학교는 다산의 아들인 유산 정학연과 돌림자가 같다.
그러나 정학교 집안은 중인이었다.
 
1858년 27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서울로 올라와 한양 외곽 여항인閭巷人(벼슬을 하지 않는 일반 백성) 동네에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오경석, 김석준, 전기 등 중인 문사들과 유숙, 유재소, 장승업 등 화원들과 교류하였다.
그렇다고 특별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격이 아주 조용하여 크게 두드러진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돌 같은 사람이었고, 괴석 같은 멋을 지닌 서화가였을 뿐이다.

 
정학교는 33세 되는 1864년 무반직 종9품인 훈련원 부사용副司勇에 제수되어 관직에 오르는데, 뛰어난 글씨 솜씨 덕에 임용된 지 한 달도 안 된 7월 ≪선원보략璿源譜略≫(왕실 족보 간략본)을 수정할 때 발탁되어 왕실 족보를 다듬는 중책을 수행하게 된다.
일이 끝난 이듬해(1865)에는 파격적으로 종6품으로 승진하였으나 중인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 이상의 직위에는 오를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관직이란 오늘날로 치면 생계를 위한 취직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정학교는 한때 광화문 현판이 그의 글씨라고 알려질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그래서 장승업의 그림에 화제를 대필해주기도 하고 미관말직의 박봉으로 생활이 넉넉지 못하여 글씨를 가르치기도 했다.
윤치호는 열네다섯 살 때 정학교에게 글씨를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 손자의 학교 수업료를 내주자 정학교가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40대에는 별제, 내섬시 주부, 50대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근무했다.
30대 이후부터 60대까지 끊임없이 관직에 머문 것이다.
64세 되는 1895년에 종5품직인 강화판관, 대구판관에 임용된 것을 끝으로 관직 생활을 마감했고, 남은 여생을 서화로 보내다가 83세까지 장수하고 세상을 떠났다.
 
셋째 아들인 정대유丁大有는 아버지의 별호인 향수香壽를 이어받아 호를 우향又香이라 하였고 일제강점기 서화협회가 결성되었을 때 심전 안중식, 소림 조석진에 이어 제3대 회장을 지낸 근대의 서화가였다.

몽인 정학교가 잘 그렸다는
괴석怪石(고석古石: 괴상하게 생긴 돌)은 본래 내력 있는 소재였다.
북송의 미불은 돌만 보면 절을 하였다고 해서 미불배석米芾拜石이라는 고사를 낳았다.
송나라 휘종 때 간행된 ≪선화하보宣和畵譜≫에는 이미 석화石畵라는 그림 장르가 나타난다.
정원에 괴석을 배치하는 것은 더욱 오랜 전통이다.
익산 왕궁리에 옛 백제 정원에 사용되었던 괴석과 경주 월지궁(안압지)에 배치된 정원석은 참으로 아름답다.
세종 때 문인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괴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괴석은 굳고 곧은 덕을 갖고 있어서 참으로 군자의 벗이 됨에 마땅하다."

 
그리하여 옛 그림의 도상을 모두 모아 편집한 청나라 ≪개자원회보≫에서는 돌 그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돌은 천지의 뼈요, 기氣도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돌을 운근雲根(구름의 뿌리)이라고 한다.
          기가 없는 돌은 완석頑石(무딘 돌)이니 이는 기가 없는 뼈가 후골朽骨(썩은 뼈)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돌을 독립된 그림 장르로 이끌어간 조선시대 화가는 추사 김정희의 절친한 벗이었던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이다.
그는 괴석이 아니라 바윗덩어리 같은 돌을 그렸다.
그래서 김유근의 돌 그림은 담담하여 매우 철학적이다.
김유근에 뒤이어 나타난 것이 정학교의 괴석이다.
당시는 실내장식으로 화분에 돌을 심어놓은 분석盆石과 정원을 장식하는 태호석太湖石의 괴석이 크게 유행했다.
창덕궁 낙선재와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에는 그때 장식한 괴석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 돌에 대한 취미가 정학교의 괴석 그림을 낳은 것이다.
 
몽인 정학교의 괴석 그림은 구도와 필치 모두에서 신선한 감동을 준다.
괴석은 생김새 자체가 기이한 데다 구멍이 숭숭 뚫린 공허空虛 공간이 있어서 대단히 조형적이다.
돌의 결이 층층이 이어지는 큐비즘적 cubism(입체파) 구성의 첩석疊石도 그렸다.
오랜 풍상 속에 떨어버릴 건 다 떨어버린 자연의 뼈골 같은 모습이다.
선돌처럼 높이 솟아오른 형상의 입석立石도 그렸다.

정학교의 첩석과 입석을 쌍으로 놓으면 음양의 조화가 느껴진다.

 
정학교는 괴석을 그리면서 수묵화의 여러 기법을 동원하였다.
돌의 모양새에 따라 구륵법鉤勒法(윤곽을 가늘고 엷은 쌍선雙線으로 그리고 그 가운데를 색칠하는 화법)으로 형태의 윤곽을 잡기도 하고, 절대준折帶皴(붓을 옆으로 뉘어 그은 뒤 끝에 가서 직각으로 짧게 그어 마무리함으로써 붓자국이 ㄱ자처럼 보이도록 한 화법)으로 돌의 주름을 잡기도 하고, 파묵법破墨法(먹의 바림을 이용하여 그림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화법)으로 질감을 나타내기도 하며, 태점법笞點法(바위나 흙, 나무에 자란 이끼나 작은 식물을 표현하기 위해 점을 찍는 화법)으로 생명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요컨대 정통 수묵화법에 충실하면서도 돌의 존재를 밝히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채색 괴석도도 그렸다.

채색 괴석은 그야말로 현대화라고 할 만한 신선한 조형 감각이 흥건히 배어 있다.

 
 

정학교, 죽석도, 1913년 종이에 수묵, 113.2x41.2cm, 개인(출처-출처자료1)


간혹
괴석 그림에 풀이나 난초 또는 대나무나 소나무를 곁들여 자연 속 돌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어떤 서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가볍게 지표만 덩그러니 그린 것이 훨씬 인상이 강렬하며 괴석, 첩석, 입석을 화면에 고착시킴으로써 현대미술의 오브제 obje(일상적인 사물이나 방식이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된 것) 정신을 환기시킨다.

물物 자체의 존재 의미와 아름다움을 냉랭히 제시하는 것으로 화가로서의 일을 끝내고 나머지는 보는 이의 감상에 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학교의 괴석 그림이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항시 화면 한쪽에 그의 유려한 필치의 화제가 혼연渾然히(태연하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정학교의 글씨는 웬만해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흘림이 강하다.
사람들은 이를 '몽인체夢人體'라고 불렀다.
 

'정괴석'과 '몽인체'는 파격의 극치를 말해준다.

그러나 정학교의 진정한 매력은 그것이 기이한 데로 흐른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간으로 승화된 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파격은 저항이나 냉소로 흐르지만 정학교의 그림에선 오히려 순응과 정직함 그리고 착함이 느껴진다.
그것이 돌의 본성이기도 하다.
 
정학교는 죽을 때까지 괴석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듯하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13년, '팔십이년八十二年 몽중夢中'이라 낙관한 <죽석도>에는 이렇게 제화題畫(화제를 적어 넣음)했다.
 
        "손바닥만 한 돌 한 자도 안 되고        (장석불성촌掌石不成寸)
          대를 심었으나 숲을 이루지 못했네  (수죽미성림樹竹未成林)
          오직 차가운 계절이 오면                    (유유세한절惟有歲寒節)
          군자의 마음을 알게 되리라                (내지군자심乃知君子心)"
 

돌이켜보건대 몽인 정학교의 괴석은 암울한 시절에 일호 남계우와 함께 그늘진 한쪽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남나비'는 채색화의 극사실주의 화가였고 '정괴석'은 문인화풍의 수묵 추상주의 화가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매사엔 짝이 있어 더욱 제빛을 발하는데 영조 시대 겸재 정선과 함께 관아재 조영석이 있었고, 정조 시대 단원 김홍도와 함께 혜원 신윤복이 있었듯, 철종·고종 시대엔 남나비와 정괴석이 짝을 이루었다.

 
후대 사람들은 그 시절의 어둠만 생각하고 꽃은 보려 하지 않아 이름도 아름다운 몽인 정학교를 잊고 있다.

어둠이 걷히는 순간, 정괴석은 남나비와 함께 세상에 밝게 드러날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1. 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