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호르몬의 역사 본문
○내분비 개념을 창안하다
프랑스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 Claude Bernard(1813~1878)는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는 부분적인 관찰만 가능할 뿐 정확한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치료 결과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변수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탐구하고 싶은 의학 원리가 있다면 실험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잘 통제해야 하며, 약물의 효과를 확인하는 실험에서는 투여하는 약물의 이름을 가려 연구자조차 모르는 상태로 실험해야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블라인드 테스트(맹검시험盲檢試驗 ) blind test라고 한다.
이처럼 의학 실험의 원칙을 중요시한 베르나르의 주요 업적 가운데 하나는 간과 혈당血糖 blood glucose(핏속에 포함된 포도당)의 관계를 밝힌 것이다.
베르나르는 간으로 들어가는 혈당보다 간에서 나오는 혈당이 더 많음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개의 간을 꺼내 실험실에 하루 정도 보관했더니 간에 당이 더 늘어난 것을 확인하고, 인체에 당을 공급하는 물질이 간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글리코겐(당원糖原) glycogen이었다.
우리가 탄수화물을 먹으면 일부가 간에서 글리코겐으로 저장되고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글리코겐이 당으로 전환돤다.
즉 간에서 글리코겐을 이용해 우리 몸의 혈당을 정상 범위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몸이 외부 물질을 받아들여 단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필요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공장 역할도 한다는 것을 뜻했다.
베르나르는 이런 현상을 발견하고 몸 안에서 물질을 스스로 분비하는 현상에 대한 명칭을 최초로 만들었다.
바로 내분비內分泌 endocrine였다.
○최초의 호르몬을 발견하다 — 스탈링과 베일리스
음식물이 위를 지나 샘창자(십이지장)로 넘어가면 샘창자에 연결된 이자(췌장)에서 소화효소를 정확하게 분비한다.
이자는 음식물이 샘창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걸까?
1902년 영국 생리학자 어니스트 스탈링 Ernest Henry Starling(1866~1927)과 윌리엄 베일리스 William Maddock Bayliss(1860~1924)는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개를 대상으로 하여 실험했다.
그들의 가설은 이자에 연결된 신경으로 음식물 정보가 전달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개의 이자에 붙어 있는 신경을 모두 잘라냈다.
가설이 맞는다면 음식물이 도착해도 이자가 소화효소를 분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음식물이 도착하자 이자에서 정확하게 소화효소가 분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는 신경 외에 다른 경로로 음식물 정보를 받는다는 얘기였다.
스탈링과 베일리스는 다른 경로를 찾기 위해 이자와 샘창자를 구석구석 살폈고, 음식물이 샘창자로 들어갈 때 샘창자 벽에서 분비되는 특별한 물질을 발견했다.
그 물질을 음식을 먹지 않은 개의 혈액에 투여했는데 공복의 개도 이자액을 분비했다.
그 물질이 혈관을 통해 이자액을 분비하라는 정보를 전달했던 것이다.
스탈링은 자신이 발견한 분비 물질을 '세크레틴 secretin'이라 이름 짓고, 세크레틴처럼 특정한 분비샘에서 만들어진 뒤 혈액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기관에 영향을 주는 미량의 물질을 '호르몬 hormone'이라 정의했다.
호르몬은 그리스어로 '활기를 띠게 한다'는 뜻이다.
○연구 발표 1년 만에 초고속으로 수여한 노벨상 — 당뇨와 인슐린 연구
당뇨병糖尿病 diabetes mellitus은 말 그대로 오줌에서 당이 나오는 질환이다.
서기 2세기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의 의사 아레타에우스 Aretaeus가 물을 퍼내는 도구 이름을 따서 당뇨병에 '다이아베테스 diabetes'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뇨병 환자의 오줌량이 많은 것을 보고 마치 물을 퍼내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1674년 영국 의사 토머스 윌리스 Thomas Willis는 환자 오줌에서 단맛을 확인하고 진단명에 꿀을 뜻하는 '멜리투스 mellitus'라는 단어를 덧붙여 '당뇨병'의 영어 단어 '다이아베테스 멜리투스 diabetes mellitus'를 만들었다.
굳이 당뇨라는 진단명에 단맛을 뜻하는 단어를 붙여야 했던 것은 단맛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맛이 없는 오줌을 과다하게 누는 질병은 '요붕증 diabets insipidus'인데 'insipidus'는 '아무런 맛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진단명들은 오줌을 직접 맛보고 질병을 진단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776년 당뇨 환자의 오줌에서 단맛이 나는 이유를 알아낸 사람은 영국 의사 매튜 돕슨 Matthew Dobson이다.
돕슨은 당뇨 환자의 오줌이 달콤한 이유가 오줌 속의 당분 때문임을 알아냈을 뿐 아니라 당뇨 환자의 혈액에도 당분이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데 당뇨병이 콩팥, 방광, 오줌에만 국한된 국소적인 병이 아니라 전신 질환임을 보여주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한편, 1869년 독일 의대생 파울 랑게르한스 Paul Langerhans(1847~1888)는 이자를 현미경으로 보던 중 이자의 분비샘 세포 사이사이에 마치 섬처럼 모여있는 세포 덩어리를 발견했다.
랑게르한스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발견한 이자 속 세포 덩어리에는 '랑게스한스섬 Islets of Langerhans'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여졌다.
1889년에는 독일 의사 오스카 민코프스키 Oscar Minhowski와 요제프 폰 메링 Joseph von Mering이 다른 목적의 실험을 위해 이자를 떼어낸 개에게 당뇨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우연의 결과로 '이자가 당뇨병을 막아주는 장기'임이 밝혀졌다.
당뇨병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의사들은 당뇨병 치료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891년 영국 의학자 조지 머레이 George Murray가 양의 갑상샘 추출물을 이용해 사람의 갑상샘 질환을 치료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자극받은 당뇨병 연구자들은 동물의 이자 추출물을 당뇨 환자에게 투여해 당뇨를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동물의 이자 추출물은 아쉽게도 인간의 당뇨병에는 효과가 전혀 없었다.
수많은 당뇨 연구자들은 고민했다.
왜 갑상샘 추출물은 효과가 있는데 이자 추출물은 효과가 없을까?
이자 추출물이 인간 당뇨병에 효과가 없었던 이유는 이자의 분비샘이 두 개였다는데 비밀이 있다.
이자는 우리 몸으로 분비되는 두 개의 샘을 갖고 있다.
하나는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외분비샘이다.
외분비샘은 분비관을 통해 소화효소를 이자 밖으로 분비해 영양분의 소화를 돕는다.
다른 하나는 혈당 조절을 돕는 내분비샘이다.
이자의 내분비샘인 랑게르한스섬에서 이자 혈관 속으로 흘려보내는 인슐린 insulin 호르몬이 혈당 조절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자를 통째 갈아 추출액을 만들면 외분비샘과 내분비샘이 섞여버리므로, 외분비샘의 소화효소가 내분비샘의 인슐린까지 소화시켜 없애버리기 때문에 인슐린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외분비샘의 방해 없이 내분비샘의 순수한 인슐린만 추출할 수 있을까?
1920년 캐나다 의사 프레더릭 밴팅 Frederick Banting(1891~1941)이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이자 외분비샘의 소화효소 통로인 이자관을 막으면 더 이상 외분비 소화효소를 만들 필요가 없어져 외분비샘 스스로 망가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다음 내분비샘에서 인슐린을 얻으면 되지 않을까?
밴팅은 토론토 대학의 생리학 교수 존 매클라우드 John Macleod(1876~1935)에게 자기 계획을 설명하고 대학의 실험실 하나를 빌렸다.
매클라우드 교수는 밴팅의 실험을 도와줄 아주 훌륭한 의대생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찰스 베스트 Charles Best(1899~1978)였다.
밴팅과 베스트는 1921년 개의 이자관을 묶어 외분비샘이 망가지도록 한 뒤 이자 추출액을 얻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자 추출액을 당뇨병에 걸린 개에게 주사해 치료 효과도 확인했다.
곧이어 인체 실험을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인슐린에 포함된 불순물 때문에 약물을 투여받은 환자들에게 감염증이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캐나다 생화학자 제임스 콜립 James Bertram Collip(1892~1965)이 등장했다.
콜립은 자신의 비법을 통해 순수한 인슐린을 얻어냈으며, 그의 방법을 이용해 대형 연구소가 인슐린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밴팅은 돈보다 당뇨 환자들의 치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 인슐린 특허권을 단돈 50센트에 대학에 기증했다.
덕분에 인슐린의 상업적 생산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1년도 걸리지 않아 수많은 당뇨병 환자들이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인슐린의 효과는 더 증명할 것도 없었다.
전 세계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1923년 매클라우드 교수와 밴팅은 연구 결과 발표 1년 만에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노벨상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빠른 수상이었다.
그만큼 인슐린의 효과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밴팅은 실험에 거의 참여하지 않은 매클라우드와의 노벨상 공동 수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밴팅과 매클라우드는 노벨상 시상식에 모두 불참해 자신들의 불화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밴팅은 자신의 충직한 조수이자 동료인 베스트와 상금을 나누어 공동 수상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또한 실험 후반부에 자신만의 방법으로 순수한 인슐린을 얻어낸 콜립은 인슐린 추출법을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를 내겠다고 선언해 연구자들 사이에 심한 다툼이 오가기도 했다.
인슐린 특허를 50센트에 양도했던 밴팅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연구자 네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지만 그들이 만든 인슐린은 정말 수많은 사람을 구했다.
어쨌든 해피엔딩이었다.
그들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토론토 대학에 '밴팅-베스트 의학연구소'가 설립되었고, 밴팅의 생일인 11월 14일은 '세계 당뇨병의 날'이 되었다.
○스테로이드를 발견하다 — 필립 헨치와 에드워드 켄들
1928년 미국 내과의사 필립 헨치 Philip Hench(1896~1965)는 자신의 치료를 받는 류마티스관절염 rheumarthritis(rheumatoid arthritis) 환자들에게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간이 좋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극심한 관절통에 시달리다가도 간 기능이 나빠지면 오히려 관절 통증이 줄어들었다.
처음에 헨치는 간이 악화될 때 간에서 분비되는 물질이 관절염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관절염 환자들에게 간 분비물을 투여하기도 하고, 간염 환자의 혈액을 수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임신 중에도 류머티스관절염 증상이 호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지 간염 때문에 관절염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간염과 임신 중에 공통적으로 인체에서 분비되는 어떤 물질이 있고, 그 물질이 관절염을 호전시킨다는 말인가?
필립 헨치의 병원 동료였던 미국 화학자 에드워드 켄들 Edward Kendall(1886~1972)은 그 시기에 콩팥위샘(부신副腎) adrenal gland에서 나오는 호르몬을 연구하고 있었다.
콩팥위샘은 콩팥(신장) 위에 붙어 있는 작은 기관으로 당시 그곳에서 다양한 호르몬이 발견되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헨치와 켄들은 류머티스관절염을 호전시키는 물질이 콩팥위샘에서 나오는 호르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948년 어느 날, 화학자 켄들이 의사 헨치를 찾아왔다.
켄들은 실험실에서 이제 막 분리한 새로운 콩팥위샘호르몬(부신호르몬)의 시료 sample를 건네주었다.
헨치는 새로운 콩팥위샘호르몬을 자신이 치료하는 류마티스관절염 환자 13명에게 투여했다.
1년 뒤 학회 발표회장에 앉아 있던 의사들은 헨치의 발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류머티스관절염 때문에 생긴 통증으로 누워만 있던 환자들, 관절이 변형되어 걷지도 못했던 환자들이 통증에서 해방되어 가벼운 춤을 추는 사진들이 공개된 것이다.
헨치는 기립박수를 받았고, 사용한 콩팥위샘호르몬은 '코티손 cortisone'으로 불렀다.
인슐린처럼 코티손의 효과는 너무나 뚜렷해 추가로 입증할 필요조차 없었다.
연구 성과를 발표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은 1950년 헨치와 켄들은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코티손과 함께 영원히 꽃길을 걸을 줄 알았던 헨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약물 합병증이라는 큰 벽에 가로막혔다.
코티손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닌 증상을 조절해주는 약물일 뿐이었다.
그렇다보니 환자들은 장기간 코티손에 의존하게 되어 심한 약물 부작용에 시달렸다.
얼굴이 심하게 부풀고 위궤양이 심해지고 뼈가 약해졌다.
코티손은 단순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합병증을 예방하기 위해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하는 약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코티손과 같은 계열의 약물을 오늘날 '스테로이드 steroid'라 부른다.
○브라운-세카르의 회춘 실험
내분비 현상을 발견한 클로드 베르나르의 제자인 프랑스의 샤를-에두아르 브라운-세카르 Charles-Édouard Brown-Séquard(1817~1894)는 젊었을 때부터 엉뚱하고 과감한 실험을 시도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이름을 후대에 남기게 된 가장 유명한 실험은 그의 나이 72세에 시작되었다.
1889년 5월 어느 날, 브라운-세카르는 나이가 들어 불면증과 변비가 심해지고 체력과 정력이 줄어들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남성의 고환에서 나오는 어떤 물질이 신체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노인의 경우 고환 기능의 장애 때문에 노화 증상이 생긴다고 짐작했다.
브라운-세카르는 실험실에 있는 개의 고환 추출물을 증류수와 섞어 자신의 팔에 주사했다.
이 무모한 실험의 결과는 어땠을까?
실험 이틀째부터 그는 피곤함을 못 느끼고, 오줌 줄기가 강해짐을 느꼈다.
기록에 따르면 오줌이 적어도 25% 더 멀리 날아갔다고 한다.
과연 그는 회춘한 것일까?
개의 고환 추출물이 떨어지자 실험을 지속하고 싶었던 그는 기니피그 guinea pig의 그것을 희생시켰다.
브라운-세카르의 연구 결과가 한 학회에서 발표된 뒤 그의 약은 불로장생약 또는 만병통치약으로 포장되어 인기리에 판매되었다.
하지만 그의 회춘약은 이론상 가능하지 않다.
동물의 고환에서 만들어지는 남성호르몬은 양이 극히 적은 데다 만들어진 직후 즉시 혈액으로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브라운-세카르처럼 효과가 나타난 사람은 어떤 이유일까?
이렇게 약의 효과를 너무 강하게 믿으면 진짜 효과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을 속임약효과(플라세보효과, 위약효과) placebo effect라고 한다.
브라운-세카르가 회춘하는 데 실패하고 5년 만에 노화로 사망하자 그의 회춘약은 인기가 시들었고 반대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완전히 어리석은 행동은 아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몸의 현상을 차근차근 알아가고 그것들이 쌓여 오늘날 의학이 된 것이다.
오늘날 브라운-세카르의 고환 추출액이자 회춘약이자 불로장생약은 호르몬 요법의 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브라운-세카르가 과감히 자신에게 주입하려 했던 동물의 고환에 들어 있는 호르몬은 1930년대에 발견되는 '남성 호르몬 male hormone(또는 안드로겐 androgen)'이었다.
○피임약의 역사와 여성의 자유
임신한 여성은 배 안에 있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새로운 임신을 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는데, 왜 그런 것일까?
1930년대에 오스트리아 생리학자 루트비히 하벌란트 Ludwig Haberlandt는 임신한 동물의 난소 조직을 임신하지 않은 동물에게 이식하면 이식받은 동물이 임신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임신한 동물의 난소 조직에서 새로운 임신을 억제하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하벌란트가 찾아낸 호르몬이 바로 프로게스테론 progesterone이다.
프로게스테론은 황체黃體호르몬이라고도 한다.
프로게스테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미국 화학자 러셀 마커 Russell Earl Marker(1902~1995)가 프로게스테론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알아낸 덕분이다.
마커는 스테로이드 화합물질을 연구하던 중 멕시코 산악 지역에서 자라는 멕시코 얌(멕시코 순무) Maxican yam에 풍부한 원료 물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1944년 제약회사를 설립해 다량의 스테로이드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회사 동료인 오스트리아 화학자 카를 제라시 Carl Djerassi의 연구에 힘입어 1951년 먹는 프로게스테론을 합성했다.
여성 호르몬 연구가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눈에 띄는 생물학자가 등장했다.
미국 생물학자 그레고리 핀커스 Gregory Goodwin Pincus(1903~1967)였다.
생명이 만들어지는 수정受精 fertilization 과정을 연구하던 핀커스는 실험용 접시 위에서 토끼의 난자와 정자를 만나게 하여 수정시킴으로써 생명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최초로 실험실에서 생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의 성공은 그에게 '현대판 프랑켄슈타인 Modern day Frankenstein '이라는 악명을 선사해주었다.
그는 대중의 비난을 받고 어느 곳에서도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과학계에서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던 핀커스가 다시 부활한 것은 마거릿 싱어와 캐서린 매코믹이라는 두 여성을 만난 덕분이다.
마거릿 생어 Margaret Sanger(1879~1966)의 어머니는 일찍 사망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어를 포함해 무려 11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7번이나 유산을 했다.
무려 18번의 출산 과정을 경험한 것이다.
생어는 어머니의 이른 죽음이 아이를 너무 낳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간호사가 되어 병원에서 일하면서 가난한 여성들이 준비되지 않은 임신으로 얼마나 많은 어려움에 처하는지 직접 눈으로 보았다.
생어는 원하지 않는 경우에 임신과 출산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생어는 '산아 제한 birth control'이란 단어를 최초로 만들었고, 여성운동을 해가면서 안전하고 간편하게 임신을 억제할 수 있는 약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마거릿 생어는 여성운동을 하던 중에 자선가였던 캐서린 매코믹 Katharine McCormick(1875~1967)을 만났다.
그녀는 부자였던 남편이 사망한 뒤 여성의 정치 참여를 위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생어는 매코믹에게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피임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달했고, 매코믹도 이에 강하게 동의했다.
두 사람은 그런 약을 실제로 만들 과학자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최초로 실험실에서 최초로 동물 난자와 정자 수정 실험에 성공한 그레고리 핀커스를 만났다.
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은 매코믹은 핀커스에게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했다.
신이 난 핀커스는 기존에 만들어진 먹는 프로게스테론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또 다른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 estrogen을 섞어 새로운 피임약을 개발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다.
하버드 대학교 산부인과 교수였던 존 록 John Rock(1890~1984)은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한 여성들의 고통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피임을 금지하는 가톨릭교도였지만, 그는 임신을 원치 않는 여성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여성 건강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는 대학교에서 최초로 피임 교육을 하고 산아 제한에 대한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핀커스가 그에게 경구피임약에 대한 임상시험 감독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존 록은 당연히 동의했다.
1956년 피임을 반대하는 미국의 법망을 피해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멕시코시티 등에서 역사적인 피임약 임상시험이 시작되었다.
피임을 원하는 여성 자원자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2,000명 이상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피임약 임상시험 결과 피임 실패율은 단 1%에 불과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연구팀은 일단 미국식품의약국 USFDA에 피임약이 아닌 '생리불순 치료제'로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숨은 사정을 다 아는 많은 여성들이 피임약으로 사용했다.
마거릿 생어, 캐서린 매코믹, 그레고리 핀커스, 존 록의 열정과 노력으로 만든 역사상 최초의 경구피임약이 생리불순 치료제가 아닌 당당한 피임약으로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것은 1960년 5월 9일이었다.
최초의 피임약 이름은 '에노비드 Enovid'였다.
85세의 매코믹은 약국에서 에노비드를 구매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여성은 이제 준비되지 않은 임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스스로 출산 일정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들의 인생 계획에 맞춰 원하는 작업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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