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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3장 종교개혁 2: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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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3장 종교개혁 2: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

새샘 2024. 10. 24. 20:24

1560년 무렵 유렵의 종교 상황(출처-출처자료1)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1520~1560년)
루터교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교가 되다
잉글랜드가 로마와 결별하다
주네브가 칼뱅주의에 입각한 신정정치를 택하다
칼뱅주의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에 확산되다
엘리자베스의 타협
        1520년대
        1534년
        
1541
        1540~1560년대
        1559년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라는 말은 원래 1529년의 독일제국 의회의 조치에 '항의 protest'한 루터파 Lutheran에게 적용된 용어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유럽의 모든 그리스도교도(개신교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루터주의 Lutheranism는 북부 독일 Germany과 스칸디나비아 Scandinavia—1520년대에 덴마크 Denmark, 노르웨이 Norway, 스웨덴 Sweden의 국교가 되었다—에서만 영속적인 뿌리를 내렸다.

반면 남부 독일, 폴란드 Poland, 헝거리 Hungary에서는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유럽 다른 지역에서는 루터 Martin Luther가 뿌린 씨앗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프로테스탄티즘이 경쟁적으로 자라났다.

1550년대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티즘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적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대립 세력으로 분화되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

 

16세기 초 스위스 Switzerland는 왕이나 막강한 권력을 지닌 영방 군주가 지배하지 않았다.

부유한 스위스 도시들은 독립을 유지하거나 독립 상태에 근접해 있었다.

그러므로 스위스 도시의 저명인사들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받아들였을 때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티즘은 스위스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수 있었다.

스위스의 종교 상황은 도시별로 다양했지만 스위스에서 1520~1550년 사이에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은 크게 세 가지 형태, 즉 츠빙글리주의 Zwinglianism, 재세례주의 Anabaptism, 칼뱅주의 Calvinism로 구분할 수 있다.

 

 

●울리히 츠빙글리

 

울리히 츠빙글리 Ulrich Zwingli(1484~1531)가 취리히 Zürich(영어 Zurich)에서 창시한 츠빙글리주의는 이들 셋 중 신학적으로 가장 온건했다.

평범한 가톨릭 Catholic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1516년 무렵 휴머니즘 humanism(인문주의人文主義)의 영향 아래 성경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가톨릭 신학과 관행이 복음에 위배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교회 내의 종교화宗敎畵와 계서제階序制(계급에 따라 서열을 결정하는 제도)적 권위에 대해서도 정죄定罪(죄가 있다고 단정함)했다.

그러나 그는 루터가 종교개혁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1522년 츠빙글리는 취리히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곧 취리히 전체와 스위스 북부 지역 대부분이 츠빙글리의 종교적 리더십을 받아들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독일의 루터파와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성찬聖餐(성찬식 때 쓰는 음식을 말하며, 예수의 살을 상징하는 빵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 신학에 관해서는 루터와 입장을 달리했다.

즉, 루터는 성찬 시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임재한다고 믿었지만, 츠빙글리는 성사 자체는 은혜를 전혀 부여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기념 의식일 뿐이라고 믿었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는 이러한 근본적 불일치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공동 전선을 함께 구축할 수 없었다.

독자적으로 싸우던 츠빙글리는 1531년 가톨릭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치르던 중 전사했다.

츠빙글리 운동은 그 후 좀 더 조직화된 장 칼뱅 Jean Calvin의 프로테스탄티즘에 흡수되었다.

 

 

●재세례주의

 

칼뱅주의가 주도권을 잡기 이전 스위스와 독일에서는 한층 더 급진적인 재세례파再洗禮派 프로테스탄티즘이 흥기했다.

재세례파는 원래 취리히의 츠빙글리파에 속해 있었으나 유아 세례 문제로 1525년 무렵 츠빙글리와 결별했다.

재세례파는 세례 성사가 그 의식의 의미를 아는 성인에게 베풀어질 때만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으므로 유아 세례를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유아 시절 세례를 받은 추종자들에게 성인으로서 재차 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재세례주의 Anabaptism은 '다시 세례를 받음 rebaptism'이라는 뜻이다).

이 교리는 재세례파의 근본 믿음—참된 교회란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신자들의 작은 공동체(사회학 용어로 '분파')이며, 그 구성원은 숙고 끝에 영감 받은 바에 따라 교회 가입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재세례파 이외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집단도 감히 중세의 그리스도교 교회관—모든 사회 구성원은 태어날 때부터 몸 된 교회에 속해 있다—을 거부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분리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재세례주의는 기성 권력자들—프로테스탄트이건 가톨릭이건 막론하고—에게 그야말로 저주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 몇 해 동안 재세례파 운동은 스위스와 독일에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운동이 지극히 간소한 예배 형식과 평화주의, 엄격한 개인적 도덕성을 요구함으로써 진지한 신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534년 결코 재세례주의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는 극단주의 집단이 독일의 뮌스터 Münster 시를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파주의와 천년왕국사상을 받아들인 이들 광신자 재세례주의 집단은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신이 온 세상에 의롭고 영적인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것이라고 믿었다.

신적인 목적의 달성을 돕기 위해 극단주의자들은 뮌스터를 '새 예루살렘'으로 선포했다.
전직 재단사였던 네델란드 레이던 Leiden 출신 얀 Jan은 '새로운 성전의 왕' 칭호를 취하더니 자신이 히브리 Hebrew 왕 다윗(다비드) King David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지도 아래 재세례파의 종교 의식이 의무적으로 시행되었고 사유재산이 철폐되었다.

재산 공유제가 도입되는가 하면, 심지어 ≪구약성서≫의 선례에 따라 일부다처제까지 허용되었다.

이런 행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양쪽 모두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재세례파가 점령한 지 1년도 못 되어 뮌스터는 가톨릭 세력에 의해 포위, 함락되었다.

새로운 다윗은 부하 두 명과 함께 혹독한 고문 끝에 죽었다.

그 후 재세례파는 유럽 전역에서 무자비한 박해를 당했다.

일부 살아남은 사람들은 메노파 Mennonites—창시자인 네덜란드인 Dutch 메노 시몬스 Menno Simons(1496?~1561)의 이름에서 유래를 형성했다.

이 분파는 재세례주의 본연의 평화주의와 소박한 '심정적 종교'의 추구에 헌신했으며 오늘날에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장 칼뱅의 개혁 신학

 

뮌스터 사건으로 재세례주의의 운명이 결판난 지 1년 뒤 26세의 프랑스인 프로테스탄트 장 칼뱅 Jean Calvin(1509~1564)은 종교 박해를 피해 스위스 바젤 Basel로 피신해 ≪그리스도교 강요綱要(가장 중요한 요점)≫ 초판을 간행했다.
이 저작은 프로테스탄트 신학 저작 중 가장 체계적이고 영향력이 큰 것이었다.

북부 프랑스 France의 누아용 Noyon에서 태어난 칼뱅은 원래 법학을 공부했고 1533년 무렵 가톨릭 교회의 성직록聖職祿(교회가 성직자에게 주는 물질적인 보수)으로 생활하면서 그리스·라틴 고전을 공부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술회했듯이, "교황쟁이 Popery(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쪽에서 로마 가톨릭을 경멸적으로 불렀던 별명)의 미신에 집요하게 열중"하던 그 무렵 한줄기 빛이 내려오면서 신이 자신을 "더러움의 심연"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을 경험했다.

그 후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자 설교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루터의 초기 경험과 비슷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은 매우 달랐다.

루터는 감정의 기복이 크고 논쟁적인 성격이었다.

루터는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거나 마음이 내킬 때에만 대응했을 뿐 결코 신학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칼뱅은 냉철하고 분석적인 율법학자였고 ≪그리스도교 강요≫를 통해 프로테스탄티즘의 모든 원리를 포괄적이고 논리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몇 번의 수정과 증보를 거친 뒤(결정판은 1559년에 나왔다)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는 프로테스탄트의 기본 신조를 진술한 가장 권위 있는 저작이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에 대응하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의 준엄한 신학은 신의 전지전능에서 출발해 아래로 향했다.

칼뱅에 따르면 전 우주는 자신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 천지를 창조한 전능자의 의지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신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사악한 유산에 손과 발이 결박되어 도저히 풀려날 수 없다.

그렇지만 신은 그만이 아는 이유로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예정했고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는 지옥의 고통이 따르는 저주를 안겼다.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영혼에는 신의 축복 또는 저주의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는 세상에서의 행위에 무관심할 수 없다.

만일 선택된 사람이라면 신은 그에게 율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주실 것이다.

올바른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영광의 보좌에 앉도록 선택받았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개혁 교회(칼뱅주의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구원받도록 선택되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칼뱅은 그리스도교도가 스스로를 신의 도구로 선택되었다고 여기고 지상에서 신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죄는 신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교도는 죄를 막아내기 위해 모든 가능한 일을 해야 한다.

그 행위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때문이 아니라(그것은 불가능하다), 구원 받도록 선택된 자가 죄를 막아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 죄악이 창궐한다면 신의 영광이 위축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언제나 자신이 신학적인 면에서 루터에게 크게 신세졌음을 인정했지만, 칼뱅의 종교적 가르침은 비텐베르크 Wittenberg(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독일 동부 도시) 개혁자 즉 루터의 가르침과 여러 면에서 본질적으로 달랐다.

첫째, 그리스도교도가 세상에서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과 관련해서 루터는 칼뱅보다 훨씬 소극적이었다.

루터는 훌륭한 그리스도교도라면 현세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뎌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칼뱅을 부단한 노력으로 신을 위해 이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둘째, 칼뱅의 종교는 루터의 종교에 비해 한층 율법적이었다.

예를 들어 루터는 일요일에 신자가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예배가 끝난 뒤 나머지 시간에 일체의 오락이나 일을 삼가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반면 칼뱅은 안식일에 어떤 세속적인 일도 해선 안 된다고 엄격하고 금지했고 안식일이 아닌 날이라 할지라도 방종을 용납하지 않았다.

셋째, 두 사람은 교회 행장 및 예식의 근본 문제부터 현저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루터는 가톨릭의 계서제적 교회 행정과 단절했지만, 루터교의 지역 감독은 교구 성직자에 대한 감독 업무를 포함해 많은 부분 가톨릭 주교와 다를 바 없는 권한을 행사했다.

루터는 또한 제단, 의식, 음식, 예복(성직자의 특수한 복장) 같은 전통적 예배의 많은 특징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칼뱅은 '교황쟁이' 냄새를 풍기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칼뱅은 교회 행정에서 선출에 의거하지 않은 부분을 말끔히 제거하자고 주장했다.

개별 집회는 각기 목사를 선출하도록 했고 목사와 '장로'(신자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도할 책임을 맡은 평신도)'로 이루어진 평의회가 개혁 교회 전체를 다스리도록 했다.

또 칼뱅은 예배를 극도로 간소화할 것을 주장하며 예복과 행렬과 기악 연주 및 스테인드글라스 stained glass(색유리그림) 포함한 일체의 종교적 형상을 금지시켰다.

또 그는 성체 성사를 개혁 교회 예식의 핵심인 설교로 대치함으로써 가톨릭 성사 신학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냈다.

이러한 가르침이 실천에 옮겨지자 칼뱅주의 신도들의 예배는 '네 개의 벽과 설교'만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주네브의 칼뱅주의

 

신학적 확신에 투철했던 칼뱅은 자신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스위스의 프랑스어 사용 도시로서 그 무렵 정치적·종교적 혼란에 휩싸여 있던 주네브 Genève(영어는 제네바 Geneva)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간파한 칼뱅은 1536년 말 그곳으로 이주해 즉각 설교를 시작하고 교회를 조직했다.

그는 1538년 추방당했다가 1541년 다시 복귀했는데, 복귀한 뒤에는 그 도시의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장악했다.

칼뱅의 지도 아래 주네브 정부는 신정정치神政政治(신의 대변자인 사제가 지배권을 가지고 종교적 원리에 의하여 통치하는 정치 형태) 체제를 갖추었다.

최고 권력은 12명의 평신도 장로와 10~12명의 목사로 구성된 '교회 회의'에 부여되었고 매주 열리는 회의는 칼뱅이 주도했다.

교회 회의의 주요 기능은 목사들의 회합에서 제안된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이었고, 그밖에 공적·사적인 도덕생활을 감시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이를 위해 주네브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었고, 교회 회의의 한 위원회가 불시에 모든 가정을 방문해 가족의 행동을 검열했다.

춤, 카드놀이, 극장 구경, 안식일에 일하거나 노는 행위 등은 악마의 소행으로 여겨져 법으로 금지되었다.

여관 주인은 식사 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주어서는 안 되었고, 어떤 고객일지라도 밤 9시 이후에는 잠자리에 들도록 해야만 했다.

살인, 반역, 간음, 마술, 신성모독, 이단 등은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사소한 범죄에 대해서도 처벌은 엄격했다.

칼뱅이 주네브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 처음 4년 동안 집행된 사형 건수는 48건이나 되었다.

당시 주네브 시의 전체 인구는 1만 6천 명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그와 같은 사생활에 대한 간섭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칼뱅의 주네브는 전 유럽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횃불이었다.

칼뱅의 제자로서 스코틀랜드 Scotland에 개혁 교회를 도입한 존 녹스 John Knox칼뱅의 주네브야말로 "사도 시대Apostolic Age(기독교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열두 사도들의 시대) 이래로 지상에 등장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선언했다.

녹스를 비롯한 개종자들은 피난처를 찾아서 또는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완벽한 학교'로 몰려왔다가 열렬한 칼뱅주의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주네브는 조직적인 선교활동과 선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 칼뱅주의를 전파하는 국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칼뱅의 선교 노력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16세기 말 칼뱅주의자 Calvinist는 스코틀랜드(장로파), 네덜란드(네덜란드 개혁 교회 설립), 잉글랜드 England(잉글랜드 교회는 개혁 신학을 채택했지만 개혁 예배 의식은 택하지 않았다. 예배 의식의 개혁을 추구한 칼뱅주의자는 청교도淸敎徒 Puritan라 불렸다)에서 다수파가 되었고, 프랑스(위그노 Huguenot), 독일, 헝거리, 리투아니아 Lituania, 폴란드 등지에서는 상당한 교세를 가진 소수파 세력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지상에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1564년 임종을 맞은 칼뱅은 주네브가 여전히 '완미頑迷하고(융통성이 없고) 불행한 도시'라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유럽의 종교적 삶과 관행에는 어마어마한 혁명이 일어났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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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24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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