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몸에 새겨진 시간의 기억 본문
일본원숭이는 사람처럼 온천을 즐기고 틈만 나면 서로의 몸을 긁고 털을 헤쳐서 벌레를 잡아준다.
다른 포유류 동물들도 틈만 나면 자기 새끼를 핥거나 가볍게 깨물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진화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서로의 몸을 쓰다듬는 과정은 중요한 요소임을 지적한다.
특히 영국의 로버트 던바 Robin Dunbar는 이러한 행위를 '그루밍 grooming(쓰다듬기)'으로 규정짓고 인간 역시 서로를 어루만지고 느끼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유대를 키웠으며, 여기에 음악과 언어가 더해지면서 현대 인류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침을 놓았던 3000년 전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
인간의 삶은 치유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사람들은 꾸준히 자신들을 치유해 왔다.
뼈에 남겨진 다양한 흔적으로 고대인의 병을 연구하는 고병리학은 이를 증명한다.
동아시아에는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전통적 의술로 한의학이 있다.
이 한의학의 대표적인 치료 방법은 바로 침구법鍼灸法(침과 뜸을 이용한 치료법)이다.
침술은 한나라 때에 본격적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렇다고 그때 침술이 시작되었다는 건 아니다.
필자의 대학원 시절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뼈로 만든 수백 개의 바늘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였기에 무덤 안에 바늘귀도 없는 바늘 수백 개를 넣었을까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그 바늘들이 침鍼의 일종이란 걸 밝혀낸건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2016년이었다.
서울대학교에는 과거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한반도는 물론 만주 일대에서 모아둔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다양한 컬렉션(수장품收藏品) 중에서도 특히 두만강 일대의 선사시대 유물과 발해의 유물이 많다.
그 이유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이 만주 침략을 본격화할 때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들이 함께 만주 일대를 조사했기 때문이다.
이 뼈바늘들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다 료사쿠(등전량책藤田亮策)가 1938년에 두만강 부근의 연길延吉 소영자小營子 유적을 조사할 때 발견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만주 일대를 군사기지화하면서 소련과 접경한 연변시 외곽에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약 3000년 전의 고대 돌무덤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각 무덤에서는 10~30센티미터 길이의 돌침과 뼈침이 수십 개씩 통에 넣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후지다는 그 유물들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놓았는데, 해방이 되면서 서울대 박물관으로 그 유물들이 고스란히 옮겨졌던 것이다.
후지다가 가지고 있던 자료들은 다행히도 1990년대 중반 최몽룡 교수가 되찾았다.
연길 소영자라는 지명은 몰라도 여기에서 발견된 사람 얼굴이 새겨진 뼈바늘 사진을 보면 "아!"하고 알아볼 사람이 많다.
1970~1990년에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이 사진이 실렸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유명한 유적이지만, 사실은 어떤 유적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유물만 남아 있었던 차였다.
그 중요성을 파악한 최몽룡 교수는 연구를 시작했고, 당시 조교였던 필자도 옆에서 자료 정리를 거들었다.
후지다의 노트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3000년 전 두만강의 뼈로 만든 침들과 필자는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석사논문을 쓰고 곧바로 시베리아로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자료 정리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빚처럼 남아 있던 소영자 유적과 다시 조우한 건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뒤였다.
당시 필자는 일제강점기의 유물을 다시 조사하는 서울대 박물관의 연구 계획에 참여했다.
필자는 방학을 이용해 서울대 박물관의 유물창고에서 모든 유물들을 꺼내 살폈다.
하지만 필자가 품었던 의문은 없어지지 않았다.
보통 뼈바늘이 나오면 바늘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소영자 유적에서 출토된 바늘 중 상당수는 너무나 얇고 잘 바스러져서 도저히 옷을 꿰맬 수 없었다.
게다가 바늘귀도 없는 게 대부분이다.
또 옷을 만들 때 쓰는 도구인 방추차紡錘車(가락고동: 실을 뽑을 때 쓰는 물레의 부속 기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바늘은 바늘통에 수십 개가 담겨 있었고, 소중한 물건인 듯 시신의 배 위에 놓여 있었다.
3000년 전 소영자에 방직공장이 있었던 것도 아닐텐데, 무슨 영문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의학사를 연구하는 차웅석 교수를 만나서 공동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차웅석 교수는 필자에게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했다.
소영자 유적의 시신 배 위에는 가공한 어떤 흔적도 없는 미끈미끈한 자갈돌이 있었는데, 필자는 이 돌이 우연히 무덤으로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간과했다.
하지만 차 교수는 이 둥근 돌이 한의학에서 말하는 위석熨石, 즉 안마용 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소영자의 바늘은 침의 초기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소영자 문화와 비슷한 때에 만들어진 두만강 일대의 청동기시대 무덤 곳곳에서도 침통과 바늘이 발견되었다.
소영자의 침은 우연히 발견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두만강 일대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걸 뜻한다.
북한의 나진, 중국의 연변 지역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도 침을 사용했다.
필자가 아는 한 중국이나 초원 일대에서 이렇게 침을 놓는 전통이 널리 퍼진 곳은 없었다.
우연히 침을 놓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가정상비약처럼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은 침술을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후에 사료들을 보니 고구려 사람이 침을 잘 놓았다는 기록이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이라는 사람이 쓴 풍속지인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실려 있었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일본인이 침술을 배우러 고구려에 유학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고구려의 침술은 당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도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는 일찍이 두만강 유역을 자신들의 지배아래 두었으니, 두만강 유역의 침술 전통이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고고학자의 고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 유독 두만강 유역에서 이렇게 침술이 발달했을까.
두만강 유역은 한랭한 기후였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두꺼운 모피를 두르고 겨울에는 집 안에서만 생활했다.
화장실을 집안 한가운데에 두었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지속적으로 돼지기름을 바르며 살았다.
이런 불결한 환경에서 피부병이 빈번하게 발생했을 것이고, 침술로 종기를 째는 치료가 이 지역에서 널리 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 고대의 사서 ≪좌전左傳≫에서도 동방에서는 종기가 많아서 '폄석'이라고 하는 날카로운 돌로 그 종기를 째고 치료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폄석이 이후 침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 한국과 중국의 여러 고대 의서에 기록되어 있다.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하지만 한의학 연구에서 최초로 고고학 유물을 통하여 막연하게 모든 한의학이 중국에서 기원했을 것이라는 기존의 연구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다.
사실, 한민족 침술의 기원이라는 말만 들으면 마치 우리나라가 우수하다는 생각으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연구는 두만강 유역의 매우 열악한 기후 환경에서 출발했다.
침술은 겨울이 긴 추운 기후를 견디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종기와 같은 풍토병을 이기기 위한 고대인들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통해 의학도 결국 자신들의 몸을 고치려는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한 한편, 한의학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발달한 이러한 지혜들이 모아져온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연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사반세기를 끌어온 필자의 궁금증에 1차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연구였다.
○문신: 고통과 바꾼 아름다움
침술과 함께 몸에 자극을 주는 행위로 문신文身이 있다.
통증과 함께 문신은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문신은 현생인류가 등장하고 시작된 여러 예술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에서는 피부가 남아 있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신의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삼한 사람들이 문신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적어도 2000년 전부터 유행한 셈이다.
암각화를 통해 문신을 확인할 수 있다.
1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Russia 극동 아무르강 Amur River(헤이룽장, 흑룡강黑龍江) 중류의 하바로프스크 Khabarovsk 근처에 있는 사카치-알리안 암각화 Sakachi-Alyan petroglyph에서도 문신을 한 얼굴상이 많이 발견된다.
이 문신은 아메리카 인디언 American Indian과 북극해에 거주하는 추크치족 Chukchi/Chukchee의 문신과 비슷하다.
문신을 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침이 몸을 수백 번 찌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렇게 침으로 찌르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침술과 그 효과가 비슷하다.
침술의 원리는 침으로 중추신경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경혈經穴의 원리를 모르더라도 아픈 부위나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몸의 통증이 줄어들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연과 함께 하면 생존해 온 과거의 사람들이 이러한 원리를 몰랐을 리가 없다.
문신이 일종의 치유행위가 될 개연성은 충분히 존재했던 셈이다.
실제로 유라시아에서 발견된 미라에서는 미용 및 치료의 목적으로 문신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남부 시베리아 Siberia 알타이 Altai 산악지대에서 발견된 2500여 년 전 파지릭 문화 Pazyryk culture의 전사들 무덤에서다.
이 지역은 영구동결대라는 기후조건 때문에 미라들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알타이 파지릭 제2호 고분의 왕족 미라에 흥미로운 흔적이 있었다.
이 왕족은 머리 부분을 제외한 거의 몸 전체가 화려한 문신으로 덮혀 있었다.
심지어 허리뼈에는 작은 점을 찍은 듯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이 점 같은 문신은 치료의 흔적일 가능성도 있다.
사람의 척추는 일곱 개의 목뼈(경추頸椎), 다섯 개의 허리뼈(요추腰椎) 그리고 열두 개의 등뼈(흉추胸椎)로 이루어져 있다.
기마와 같은 행위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허리앓이(요통腰痛)를 유발시켰고, 특히 몸무게를 떠받치는 아래쪽 허리 부분은 고질적인 통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침으로 자극을 주고 통증을 완화시키려 했다고 상상하는 건 그래서 단순한 공상은 아닐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침구법과 비슷한 방법이다.
문신을 하면서 주술적인 치료 효과를 기대했다는 사실이 문신 색소의 성분 분석에서도 밝혀졌다.
알타이 파지릭 문화 미라의 문신에 남겨진 색소는 숯 검댕의 일종으로,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몸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시베리아 초원의 주민들은 솥에서 떼어낸 검댕을 문신에 사용하고, 의식 때에는 몸에 바르기도 하는데, 자기들의 수호신이 깃들어 있는 솥에서 떼어낸 검댕만이 악령을 몰아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500년 전 파지릭 문화의 유목민에서 최근의 시베리아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문신에 쓰는 색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똑같았다.
의식에 사용했던 청동솥의 겉에 붙어 있는 그을음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그 기운을 몸속으로 간직하려 했을 것이다.
파지릭 문화에서는 페르시아 Persia에서 만든 카펫 carpet을 비롯하여 의복, 우유술을 담은 그릇 등 여러 유물이 발굴되었고, 여기에는 다양한 페르시아 계통의 문화가 유입된 증거가 있다.
이러한 페르시아 계통의 문화뿐만 아니라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 계통의 의식도 들어왔음은 분명하기 때문에 아마 파지릭 문화의 문신도 불과 관련된 의식을 한 뒤에 그 검댕을 이용해서 문신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알타이뿐만 아니라 알프스 Alps 빙하 지대에서 발견된 5000년 전의 사냥꾼, 외치 Ötzi/Oetzi 미라(일명, 알프스의 아이스맨 Ice man)에서도 다수의 문신이 발견되었다.
서양학계에서는 이를 침술의 증거로 보고 있지만 중국 학계에서는 침술의 종주국이 중국임을 부정하는 설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사실 현대 침술의 발달과 선사시대 문신과 관련된 침술(엄밀히 말하면 자극요법)을 곧바로 연결 지을 필요는 없다.
외치 미라가 침술의 기원을 증명하고 있다기보다는 선사시대부터 침술이 문신이라는 풍습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귀파기의 기원
러시아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소소한 것들이 아쉬웠을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국인이라고는 전혀 없는 과학단지로 유학을 간 필자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손톱깎기와 귀이개였다.
손톱은 러시아 사람들처럼 가위를 쓰는 것으로 해결을 했는데, 문제는 귀이개였다.
짧은 러시아어로 상점에서 귀이개에 대해 한참 설명하니 눈을 껌뻑이던 주인이 필자에게 건네준 것은 성냥갑이었다.
서양인들은 귀지가 대부분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면봉 같은 것으로 귓속을 청소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훨씬 뒤였다.
가끔 마른 귀지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성냥개비 같은 것으로 귀이개를 대신했던 것이다.
물론 성냥으로 귀를 청소하는 것은 전문의들은 금기시하는 것이었지만, 너무도 간질간질한 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보니 실제 내 주변에서 귀를 후비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소 마른 귀지를 가진 동아시아 쪽으로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부 지역에서는 귀파기가 금기시되기도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귀파기가 사치스러운 스킨십 skinship, 화장의 일종으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근대 이후의 민속품에서 귀이개는 흔하다.
한국의 민속품을 보면 대부분 여성 비녀의 한쪽을 마치 수저처럼 사용했다.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의 비녀는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보는 장식용의 굵은 비녀가 아니라 작은 머리꽂이를 말한다.
이 귀파기에는 어떤 고고학적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일단 귀청소의 전통은 지역마다 다르다.
귀를 후벼서 청소하는 방법은 동양에서 특히 발달했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이개가 그 증거이다.
인도-유럽인은 귀파기를 그리 즐기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 남은 유물도 그리 많지 않다.
3~4세기 무렵 로마시대에 사용했던 청동제 귀이개 정도가 발견되었을 뿐이다(이 유물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The Met) in New York City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귀이개에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일제강점기의 제국주의 고고학자 세키노 다다시(관야정関野貞)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와 협력하여 식민지 한국의 유적과 유물을 일본의 것으로 만드는 사업을 위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図譜≫ 15권을 연차적으로 발간했다.
그의 책에는 한국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보물과 국보들이 수록되었다.
한국의 유적과 유물 속에 엉뚱하게도 고려시대에 만든 청동제 귀이개 세 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필자가 아는 한 우리나라 어떤 책에도 귀이개가 국보로 수록된 적은 없었다.
'미미카키(耳かき)'라고 하여 우리보다도 더 넓게 귀를 청소하는 문화가 일본에 발달해 있는 것과도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귀이개를 가장 오래 전부터 사용한 건 중국이었다.
약 3200년 전 중국 상商나라 무정왕武丁王의 부인이었던 부호묘婦好墓의 여러 껴묻거리 가운데 옥으로 만든 귀이개가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귀이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귀이개가 두 점이 나왔는데, 각각 길이가 10센티미터와 4센티미터로 다른 걸로 보아 서로 다른 용도로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귀이개의 몸은 마치 날렵한 날치가 꽁치 같은 생선의 모양이었다.
이 생선의 등에는 올퉁불퉁하게 지느러미가 표현되었으니, 아마도 귀를 후빌 때에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는 용도였던 것 같다.
이렇게 상나라 때에 귀이개는 귀족들의 생활필수품이었고,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귀이개를 사용할 정도로 그 전통이 발달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상나라에서 시작된 귀이개의 전통은 춘추시대(서기전 8~서기전 5세기)로 이어졌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조상인 진 경공秦景公(서기전 537년 사망)의 무덤에서도 비슷한 귀이개가 발견된 적이 있다.
진나라의 왕들도 사용했으니 진시황도 애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중국의 귀족들에게 이러한 귀이개는 필수품이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북만주 부여 계통의 문화에서 귀이개가 발견되었다.
3~5세기에 헤이룽장성(흑룡강성) 동북쪽 끝 러시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펑린(봉림鳳林) 성터 유적으로, 삼강평원三江平原이라고 하는 헤이룽강 동북쪽 가장 끝에 자리한 곳이다.
전통적으로 이곳은 사냥을 주로 하는 말갈 계통의 문화가 많이 분포했는데, 서기전 2세기 무렵부터 부여 계통의 문화가 이 지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삼강평원에서 출토된 귀이개는 골제骨製(뼈로 만들어진)로, 한쪽은 숟가락, 또 다른 한쪽은 뾰족한 모양이다.
이 귀이개는 한국의 비녀처럼 머리에 꽂고 있다가 필요하면 뽑아서 귀이개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비녀로 쓰기엔 다소 작아서 다른 한쪽에 장식을 꼽아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시기를 짐작해보면 3~4세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에서 시작된 귀이개의 역사는 발해로 이어진다.
2017년 연해주에서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발해의 스타로레첸스코예 Starorechenskoye 성터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귀이개가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한쪽 끝은 귀이개, 다른 한쪽은 잔털을 뽑는 족집게로 만들어져 있다.
전문적인 화장도구인 셈이다.
그런데 이 유물은 무덤이 아니라 성터 안의 문화층(유물이 발견되는 지층을 말하는 고고학 용어)에서 발견되었다.
즉 집자리 안이 아닌 길거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청나라 말, 중국 북방의 한 농춘을 배경으로 한 펄 벅 Pearl Sydenstricker Buck의 소설 ≪대지 The Good Earth≫에는 주인공 왕룽이 귀청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왕룽은 결혼을 위해서 성 안에서 큰맘을 먹고 길거리 이발사로부터 귀와 코청소를 받는다.
발해에도 이처럼 길거리 이발사 같은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발해의 성터에서 유독 크고 작은 장기알(또는 고누알)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다.
물론 이 장기알은 도기나 기와 깨진 것을 적당히 갈아서 둥글게 만든 것이다.
눈을 감고 펄 벅이 ≪대지≫에서 묘사한 청나라 성 안의 시장 그리고 발해의 성터를 떠올려본다.
사람들이 집 밖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장기나 고누를 즐기고, 어느 한쪽에서는 왕룽과 같은 사람들이 귀청소를 받고 있는, 그런 상상을 해본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간질간질한 귀청소를 받는 느낌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과거 이래로 귓속을 청소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있어 왔다.
연해주 벌판의 황량한 벌해 유적에서 발견된 작은 귀이개는 오래전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고, 소곤대듯 전하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우리는 몸으로 느끼는 기억이 적어지고 있다.
영화 <루시 Lucy>의 여주인공(스칼렛 요한슨 Scarlett Ingrid Johansson)이 약물의 효과를 인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모유를 먹은 그 순간과 자신의 이마에 했던 수천 번의 입맞춤을 기억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필자에게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살아가면서 경험한 행복했던 기억은 동시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때에 대한 슬픈 기억이기도 하다.
타투 tattoo는 고통스러운 행위이지만 그럼으로써 그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몸의 감촉과 정신의 기억이 함께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타투야말로 몸에 새기는 마음의 지도가 아닐까 싶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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