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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3장 종교개혁 3: 길들여진 종교개혁(1525~1560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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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3장 종교개혁 3: 길들여진 종교개혁(1525~1560년)

새샘 2024. 11. 8. 20:49

1566년 발간된 루터가 쓴 교리문답 서적 '탁상담화 The Table Talk of Martin Luther' 표지(출처-https://ctmnews.kr/news/view.php?no=310)

 

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개신교)은 하나의 혁명 이론으로서 출발했다.

이 이론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교도의 영적 평등을 급진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유럽 사회의 존립 기반이 되었던 사회적·정치적 계급제도, 나아가 성적 차별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 Luther는 자신의 사상이 그런 함의含意(뜻)를 갖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독일 농민과 뮌스터 Münster의 종교적 천년왕국 주창자가 자신의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1525년 이후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개신교도 또는 신교도)의 사회 이념이 보수화된 책임이 루터에게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재세례파를 제외하면 초기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사회적·정치적으로 급진성을 띠지 않았다.

더욱이 종교개혁 메시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기존의 사회적·정치적 지도자들—제후와 독일·스위스 도시의 지배 엘리트—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루터주의와 칼뱅주의는 이 때문에 관주도적 종교개혁 Magisterial Reformation이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운동은 두 가지 의미에서 급속히 '길들여'졌다.

첫째로, 프로테스탄티즘의 혁명적 잠재력은 억제되었고(루터는 1525년 이후 만인 사제주의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둘째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모든 분야에서 종교개혁적 삶의 핵심적인 관습으로서 가부장주의家父長主義가 더욱 강조되었다.

 

 

○개혁과 훈련

 

11장에서 보았듯이, 유럽의 보통 사람들을 좀 더 경건하고 엄격한 삶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은 15세기의 종교적 개혁 운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개혁 운동의 상당수는 제후들과 시의회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장려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피렌체 Firenze(영어 플로렌스 Florence)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도시에서는 1494~1498년 이탈리아 도미니쿠스 설교사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가 비범한—그러나 단명한청교도 운동 및 도덕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 이전과 이후에도 정치 지배자들의 주도 아래 죄악을 방지하는 입법활동이 이루어진 경우는 많았다.

1518년 네덜란드 신학자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는 정치 지배자들에게 스스로를 수도원장으로 간주하고 영지를 거대한 수도원으로 여겨달라고 요청했고, 세속 군주들에 대한 이런 요청을 통해 에라스무스는 15세기 유럽인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풍조를 새로운 세기에 널리 확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지배자들은 신민에게 경건한 규율을 진지하게 강제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 본성의 타락은 그들이 신봉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근본적 교의였기 때문이다.

4세기 말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St. Augustinus와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는 인간이란 선善을 강제당하지 않으면 악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목사와 행정관에게는 사람의 행동을 훈련하고 통제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선행이 그를 천국으로 이끌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악행이 신을 진노케 하고 인간 사회를 파괴하기 때문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경건 훈련은 어린이 교육부터 시작했다.

루터는 직접 교리문답 책인 ≪탁상담화 The Table Talk of Martin Luther≫를 써서 1566년 발간했다.

어린이에게 신앙의 교의와 신이 부여한 의무—부모, 교사, 지배자에 대한 의무—를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루터는 남녀 가리지 않고 모든 어린이가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학교 교육은 프로테스탄트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프로테스탄트 가정은 하나의 '경건한 학교'로 간주되었고, 한 집안의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인까지도 가르치고 훈도薰陶(덕德으로써 사람의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치고 길러 선으로 나아가게 함)할 책임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보기에 16세기 초의 가정생활은 아직 많은 점이 미흡했다.

술주정, 가정 폭력, 간통, 음란한 춤, 신성모독적인 서약 등이 경건한 종교개혁 가정에서조차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프로테스탄트 집회에서는 거칠기 짝이 없는 신도를 훈련하기 위해 개인 상담, 공개적인 비행 고백, 공개 고해 및 망신 주기, 교회 예배 출석 금지, 감금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 모든 노력은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경건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을 만들고 공동체 전체에 경건 훈련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국가 양쪽이 적극적인 협력을 해야만 했다.

 

 

○프로테스탄티즘, 정부, 가정

 

종교개혁의 순치馴致(목적한 상태로 차차 이르게 함)는 주로 독일과 스위스의 자유 도시들에서 행해졌다.

수도원 제도와 성직자 독신주의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공격은 도시민 사이에서 호응을 얻었다.

그들은 수도원의 세금 납부 면제에 분개했고, 성직자 독신주의를 시민의 아내와 딸들을 유혹하기 위한 구실로 간주했다.

프로테스탄트는 인간 의지의 타락을 강조하면서 인간 의지를 종교적 권위에 의해 훈육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 또한 길드 guild(중세 시대에, 상공업자들이 만든 상호 부조적인 동업 조합)와 도시 정부의 강력한 호응을 얻었다.

길드와 도시 정부는 도시 남성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도제徒弟(기능을 배우기 위하여 스승 밑에서 일하는 직공)와 직인職人(길드에서 생산과 도제 교육을 담당하는 기술자)에 대한 도시 엘리트(주로 상인 및 장인匠人)의 지배권 유지 및 확대를 열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로테스탄티즘은 가톨릭교회의 사법권을 철폐함으로써 도시 정부가 도시 내 모든 권력을 장악하도록 허용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가정을 '경건의 학교'라고 새롭게 강조함으로써, 수공업자 개개인의 가정에서의 지배권을 강화시켰다.

가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아버지는 개혁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가족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의무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프로테스탄티즘은 새로운 이상적 여성상을 도입했다.

더 이상 독신의 수녀만이 경건한 여성의 표상이 될 수 없었다.

그 대신 순종적인 프로테스탄트 '양처良妻'가 등장했다.

한 루터파 제후는 1527년 이렇게 썼다.

"자녀를 낳는 사람은 노래하고 기도하는 수도사와 수녀 이상으로 신을 기쁘시게 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결혼한 부부의 성생활의 신성성을 확고하게 지지함으로써 중세 말기 가톨릭교회를 특징지었던 경건과 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했다.

 

(계속)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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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