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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 안중식 "도원문진도" "백악춘효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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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 안중식 "도원문진도" "백악춘효도"

새샘 2023. 7. 10. 21:47

안중식, 도원문진도, 1913년, 비단에 채색, 164.4x70.4cm, 리움미술관(사진 출처-출처자료2)

 

심전心田안중식安中植(1861~1919)은 1881년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製圖士로 조석진과 더불어 중국으로 가서 1년 동안 머물었는데, 이때 알게된 조석진과는 평생 친구로 사귀면서 당시 조선 화단의 쌍벽을 이루었다.

1896년 국가미술기관이었던 도화서는 실질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왕의 어진을 그리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에 1902년 어진도사御眞圖寫(임금 초상화를 그리는 화원)로 조석진과 함께 임명되었고, 이후 자신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조선이 망해가던 시기에 활동했던 안중식은 '고종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궁중화가였다.

 

1911년 왕실 후원으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설립되자 조석진, 김응원 등과 함께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서화미술원 출신이 광복 후 대한민국 근대 전통 회화를 이끌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등이다.

1919년 안중식은 민족 서화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화협회書畵協會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일제강점기 서화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안중식은 조석진보다 8년 늦게 태어나 1년 먼저 사망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조석진에 비해 당시 유행하던 서양화 요소가 많이 발견된다.

 

안중식이 그린 <도원문진도桃園問津圖>'도원경桃源境에 가는 길을 묻는 그림' '무릉도원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청록산수靑綠山水 기법 즉 산을 청색 계열과 녹색 계열로 그린 채색화이다.

 

이 그림을 그린 1913년은 조선이 망하고 일본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하던 때였다.

안중식은 당시 조선이 망해가던 모습을 생생하게 목도한 화가이다.

자신을 총애하던 고종이 1919년 초에 승하하자 자신도 그해 숨을 거두었다.

조선이 망한 상태에서 안중식은 새로운 꿈과 세상을 찾아야했다.

이는 단순히 안중식 개인이 아니라 나라를 잃은 지식이나 백성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세상을 찾기 위해 발버둥쳤다.

십승지로 도피하는 사람도 있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계몽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제국주의자처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세상을 주장했다.

<도원문진도>는 바로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처지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복사꽃과 마을이 있는 도원은 멀고 높게 표현되어 있다.

채색원근법을 적용한 도원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힐 듯 말 듯 화려하면서도 아련하다.

어부는 이제 복사꽃이 피어있는 강 어귀에 다다랐을 뿐이다.

도원 입구를 상징하는 커다란 동굴은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준다.

이 동굴을 통과해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도원을 만난다는 것은 기약하기 어렵다.

좁은 물질은 이어져있기도 하고 끊어져있기도 하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아린다.

우리는 100여 년 전 세상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독립된 나라에 살고 있고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꿈과 희망을 쫓고 있다.

돈보다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 부정부패가 없는 세상, 공정한 규칙이 적용되는 세상, 이념으로 갈라지지 않은 평화로운 세상은 <도원문진도>에 그려진 도원처럼 아련하기 때문이다.

 

 

안중식, 백악춘효도 여름본(왼쪽)과 가을본(오른쪽), 1915년, 비단에 엷은 채색, 125.9x51.5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3)

 

안중식이 그린 실경산수화 가운데 대표적인 걸작이 바로 백악白岳 즉 북악산北岳山의 봄날 새벽(춘효春曉) 풍광을 그린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이다.

백악을 배경으로 조선 왕조 600년의 중심인 경복궁과 광화문의 풍경을 담은 이 두 그림의 왼쪽 위에 각각 '을묘하일심전사乙卯夏日心田寫', '을묘추일심전안중식乙卯秋日心田安中植'이라는 글씨가 있어 화가가 1915년 을묘년 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화가는 두 작품에 모두 <백악춘효>라는 같은 제목을 붙였다.

여름과 가을에 그렸지만 거의 동일한 구도를 유지하고 있어 하나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그린 연작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푸른 잎이 무성하고 잎에 물들기 시작한 작품 속 계절은 분명히 봄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웅장한 백악의 모습이 화면을 압도하지만 그 아래 자리 잡은 경복궁과 광화문의 모습도 화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구름 같은 연기에 둘러싸인 경복궁 전각의 처마와 용마루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자아낸다.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광화문에 시선이 먼저 간다.

마치 오늘날 광화문 광장 한 복판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광화문이 정면으로 보인다.

3개의 홍예문의 크기도 전체적인 비율에 잘 맞춰져 있고, 14층 화강암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武沙石(네모반듯하게 다듬어 성벽이나 담벼락에 높이 쌓아 올린 돌)과 같은 큰돌로 축조한 성벽]의 층수도 상세하게 표현되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교각들이 투시법에 따라 사선으로 늘어서 있고, 그 앞으로 조선에서 가장 크고 넓은 길인 육조六朝 거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화면 아래에 해태상이 나뭇잎 사이로 드러나 있다.

당시 광화문과 육조 거리의 탁 트인 풍경은 조선의 상징으로서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이나 삽화에 많이 등장했다.

그런데 작품은 사진 속 풍경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이는 육조 거리의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관아와 가옥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고 조선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오갔던 많은 사람들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에서는 안개로 가득 차 있는 인적 없는 궁궐의 적막함이 감돌 뿐이다.

가을본의 경우 그 안개는 더욱 넓게 퍼지면서 오른쪽 해태상마저 보이지 않는다.

 

시선을 경복궁 내부로 돌려보면 화가가 이 작품에 여러 시점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광화문과는 달리 경복궁 내부의 모습은 대각선의 조감 시점으로 그려졌다.

여름본의 경우 궁궐 내의 전각들이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고, 가을본의 경우 왼쪽으로 틀어져 있다.

이 조감 시점은 화면 아래 해태상의 표현과도 이어진다.

여름본의 경우 경내의 조감 시점은 오른쪽 해태상의 시점과 동일하고, 가을본의 경우 왼쪽 해태상의 시점이 경복궁 내부의 표현 시점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대상을 비껴 내려 보는 조감 시점은 조선 후기 <동궐도東闕圖>에서 볼 수 있는데, 복잡한 궁궐 내부의 건물 배치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여름본과 가을본 모두 광화문이 정면으로 보이도록 고정되어 있어 조감 시점이 엄밀하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궁궐 내부의 표현에 있어서도 기록화적인 성격이 강한 동궐도와는 달리 근정전과 경회루 등 주요 전각들의 지붕만이 그려져 있을 뿐, 내부의 모습은 울창한 수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궁궐을 감싸고 있는 안개가 마치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과 같은 공간감을 만들어 내면서 육조 거리의 적막과 또 다른 신비한 고요가 궁궐 안을 지배한다.

 

경복궁 뒤로 우뚝 솟아 있는 백악은 화면 안에서 더욱 낯선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백악과 궁궐 사이의 거리감이나 크기의 비례는 완전히 어긋나 있고, 백악은 정면이나 조감 시점으로는 도저히 잡힐 수 없는 멀고 높은 곳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성곽까지 그려져 있어, 높이와 거리로 볼 때 적어도 남산 자락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삼원법三遠法과 같은 여러 시점을 혼용한 전통 산수화의 시선과도 비슷하다.

뛰어난 산수화가였던 안중식은 경복궁과 백악산 아랫자락에 낮게 퍼져 있는 안개를 세필細筆의 곡선을 사용하지 않고 선염渲染으로 실감나게 그렸습니다.

백악을 그릴 때는 전통적인 남종화 수법의 수묵 필치와 수평적인 미점米點을 사용했지만 그 뒤로 보이는 북한산 자락 보현봉은 미점이나 준법皴法을 사용하지 않고 잔 붓질로 바위의 질감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하나의 산수화로 이 풍경을 바라보면 백악의 아랫자락에 안개로 둘러싸인 조선의 궁궐은 백악으로 대표되는 대자연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속 궁궐은 전통 산수화에서 그려진 누각이나 정자와 달리 화면 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백악의 위용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 건국 이후 처음 경복궁의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에 입각해 북쪽을 지키는 현무玄武에 해당하는 백악에 안기도록 자리 잡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작품 속 백악의 모습은 이러한 경복궁의 입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이나 실제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백악의 존재를 더욱 부각 시켜 그린 것은 이러한 궁궐이 지닌 장소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안중식이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인 1915년의 경복궁은 그림에 나타난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조선왕조 600년의 중심 무대였던 경복궁은 1910년 이후 일제에 의해 원형이 크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경운궁(현재 덕수궁)이 황실의 중심 공간으로 부상했고, 경복궁은 국권의 상징적 공간으로만 기능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왕조의 정궁으로서 갖는 위계성과 상징성을 훼손하기 위하여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계획하고 1912년부터 계획적으로 경복궁의 행각과 다리 등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 그려진 1915년 당시에는 이른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전각들을 철거하여 4,000여 칸에 이르는 원래의 건물들이 대부분 없어졌고, 5,226평의 대지에 18개에 이르는 서양식 임시 진열관들이 궁궐 내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경복궁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일제의 홍보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이후에도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를 기념하고 미화하는 박람회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다.

안중식이 그린 인적 없는 거리와 수풀이 우거진 궁궐은 사실 서양식 건축물들이 공존하고 거리에는 밤낮으로 구경꾼들이 북적이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화가 안중식은 왜 현실과는 다른 풍경으로 경복궁을 재현했던 것일까?

 

화가 안중식은 개화 지식인이었던 당시 서화가들과는 달리 도화서 출신의 화원화가로서 조선 왕실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경력으로 볼 때, 확연히 변해 버린 백악을 바라보고 선 노년의 화가가 600여 년 간 이어져 온 주인이 떠나고 대규모 위락시설로 변해버린 궁궐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화가의 의도를 좀 더 유추해 보기 위해 <백악춘효>라는 그림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작품에서 경복궁의 주산으로서 강조된 백악의 의미를 고려해보면 경복궁을 지칭하는 '북궐北闕’이 아닌 백악을 제목에 쓴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다면 '춘효春曉’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봄날 새벽이라는 의미로 미루어 보면 지나간 조선왕조의 영화로운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아직 맞이하지 못한 조선의 봄에 대한 염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목이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孟浩然(689~740)의 유명한 시 <춘효春曉>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이 시에는 '지난 밤 들려오던 비바람 소리(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와 같이 사라져가는 궁궐을 잊지 않고자 옛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작품을 제작한 시기와 작품 속 맥락을 고려해 본다면, 옛 경복궁 궁궐의 지위와 위상을 복원함으로써 망국의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화가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화가의 시선이 지나간 과거나 다가올 미래에만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적 없는 적막한 조선의 거리, 안개에 휘감겨 사라져 버린 해태상, 굳게 닫힌 광화문, 신비로운 정적이 감도는 궁궐의 공간 등 화면 곳곳에 마치 망국의 현실을 암시하는 듯한 대상들이 여전히 관람자의 시선을 끈다.

이곳이 조선의 궁궐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광화문 현판에 정작 화가는 아무런 글씨를 써 넣지 않았다.

백악의 그늘 아래 펼쳐진 고요한 궁궐의 모습은 맹호연의 시에서 말하는 '새벽이 오는 줄 모르고 빠져 든 봄잠'처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왕실의 현재를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언뜻 조선시대 산수화나 궁궐도를 계승한 평범한 그림으로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경복궁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바라볼 때 그 안에는 화면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지도 모른다.

 

20세기 초 전통 화단을 이끌었던 안중식의 대표작 <백악춘효>는 단순히 옛 궁궐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일제강점기 우리 근대 화가의 현실 인식과 이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품인 것이다.

 

※출처
1. 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375 (도원문진도)

3.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4289 (백악춘효도)

4. 구글 관련 자료

 

2023. 7. 1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