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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을 이겨낸 신석기시대 사람들

새샘 2023. 7. 17. 11:47

하민망하 유적의 집 안에 만든 무덤. 공동묘지 대신 주거지에 시신을 쌓아놓았다.(사진 출처-출처자료2)

 

2019년 연말에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전세계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21세기의 발달된 기술과 문명으로도 쉽게 막지 못한 이 전염병이 앞으로 인류 역사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고 있다.

사실 태곳적부터 인류는 야생동물의 세균과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있었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전염병과 싸워왔다.

몇천 년 전 바이러스와 세균의 존재도 모르고 제대로 된 의학도 없었던 고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전염병에 대처하면서 멸종의 길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약 5000년 전 네이멍구자치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 치명적인 페스트균(예르시니아 페스티스 Yersinia pestis) 전염병에 대해 지혜를 발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에서 발견된 무더기 인골

 

2010~12년에 중국 네이멍구자치구(내몽골자치구)(내몽고자치구内蒙古自治区) 퉁랴오(통료通遼)시의 하민망하(합민망합哈民忙哈: 몽골어로 '흙으로 쌓은 언덕'이란 뜻) 유적에서 5천 년 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대규모 마을이 발굴되었다.

중국 북방에 위치한 네이멍구자치구는 마치 몽골을 감싸듯 활처럼 길게 만들어진 행정구역이다.

네이멍구 각 지역의 중심지를 기준으로 볼 때 동쪽의 중심지인 후룬베이얼(호륜패이呼倫貝)시에서 서쪽인 아라산(아랍선阿拉善) 사막까지는 직선거리 2400킬로미터로 비행기로 가도 3시간이 걸린다.

그중에서도 하민망하 유적이 위치한 퉁랴오시에서 츠펑(적봉赤峰)시에 이르는 지역은 만주에서 몽골로 넘어가는 지점으로서, 옛부터 초원지대와 만주의 접경 지역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몽골인들의 자치구인 '네이멍구'지만 전통적으로 만주 지역에 속한다.

고대역사로 보아도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초원 유목민들의 문화가 함께 출토된다.

또한 이 지역은 만주-초원-중원의 교차지대로, 신석기시대에 제사를 지내던 거대한 돌무덤(적석총積石塚)과 화려한 옥기玉器(옥그릇) 등으로 유명한 훙산(홍산紅山) 문화 유적도 이곳에 있다.

 

일반적으로 하민망하 유적도 훙산문화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옥 제품들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훙산문화의 일부로 본다.

다만 두 유적 사이의 거리가 멀고 마을 형태도 달라 학자에 따라서는 '하민망하문화'로 분리해 부르기도 한다.

고고학자들이 '문화文化 culture'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전문적인 작업이고 학자들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

설사 다른 문화라고 부른다고 해도 훙산문화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 문화의 한 갈래가 퉁랴오 지역으로 퍼져나가 마을을 일구어 살았음은 분명하다.

 

하민망하 유적은 특이하게도 집들이 모두 불에 타버렸고 집터에서 대량의 사람뼈(인골人骨)가 나왔다.

그중에서도 제40호 집터에서는 무려 97구의 사람뼈가 발견되는 등 모두 170여명이 집 안에서 발견되었다.

게다가 집 안에는 토기나 고급 옥 제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국 지린(길림吉林)대학의 고고학 연구자들은 몇 년 동안의 연구 끝에, 이는 집 안에 만든 무덤으로 페스트 pest/plague(흑사병黑死丙 black death)  계통의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 결론을 낸 근거 중 하나는 급하게 사람들을 묻은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세균의 존재는 잘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전염병을 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역병이 돌면 시신들을 집에 놔둔 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멀리 피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하민망하 마을 바깥쪽에 이 마을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도 일부러 집 안에 잔인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을 포개어 쌓아두었다.

전염병이 돌자 사람들이 근처의 공동묘지 대신에 몇 개의 주거지를 정해서 시신을 모아놓았고, 그 수가 많아지자 결국 집을 버리고 급하게 피한 것으로 보인다.

집 안에 버려진 시신이 대부분 노약자였다는 점에서 혹시 전쟁의 결과로 학살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보았지만 사람뼈에는 폭력이나 살해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아마 전염병에 취약한 노약자들이 주로 희생당하자 남은 성인들이 그 시신을 처리하고 떠난 것 같다.

 

그렇다면 하민망하 마을 사람들이 페스트 종류의 질병에 희생당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 단서는 하민망하 사람들이 살던 당시 기후와 그들이 주로 사냥한 설치류齧齒類(쥐류) rodent라는 동물에서 찾을 수 있다.

하민망하 사람들은 일부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주로 수렵과 채집에 종사했다.

풍부한 생태자원 덕에 농사에 전념하지 않아도 마을 규모는 계속 커졌고 인구가 1000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그러다 약 5000년 전 기후가 나빠지고 주변 환경이 안 좋아지면서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다.

농사, 목축, 수렵 등 다양한 문명의 교차지대인 네이멍구 동남부의 랴오허강(요하遼河) 상류는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여러 기후가 교차하기 때문에 기후가 조금만 변해도 그들이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이나 농사짓는 환경이 크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점에 맞서 하민망하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환경의 변화에 대응했다.

주민들은 기존 사냥감이었던 사슴류 대신 당시 수가 급증한 설치류 야생동물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유적에서 발굴된 동물 뼈를 분석한 결과 포유류가 3분의 2였으며, 가장 많은 뼈가 산토끼와 설치류인 만주두더지(분서鼢鼠: 두더지보다 몸이 훨씬 크고 살쪘으며 목이 짧은 두더짓과의 한 종으로서 만주, 몽골 등지에 분포)로 밝혀졌다.

하민망하에 살던 주민들은 변하는 환경에 맞추어 빠르게 태세전환을 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으니, 이런 환경에서는 야생 포유류를 숙주로 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사람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민망하뿐만이 아니었다.

이 유적에서 동쪽으로 750킬로미터 떨어진 네이멍구 중부 우란차부(오란찰포烏蘭察布)시의 먀오쯔거우(묘자구廟子溝) 유적에서도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의 가능성이 발견되었다.

먀오쯔거우는 하민망하와 달리 농사 짓던 사람들의 마을로 기후는 하민망하와 비슷했고, 초원과 농경지대가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그들도 농사가 어려워지자 야생 포유류를 적극적으로 사냥하면서 전염병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질병, 페스트

 

서양의 중세를 초토화시킨 페스트(흑사병)도 사실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유목을 하던 사람들이 설치류에서 옮았고 그것이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페스트는 초원과 온대의 접경 지역에서 몇천 년동안 인간을 괴롭혀왔던 고질적인 전염병으로 오늘날까지도 심심찮게 발병한다.

가장 최근의 대형 페스트 창궐 outbreak은 1910~11년으로 역시 퉁랴오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국과 러시아 국경 일대에서 벌어졌다.

페스트는 당시 러시아가 만주를 가로질러 부설한 동청철도東淸鐵道 Chinese Eastern Railway를 따라 점차 중국 쪽으로 번져 하얼빈(합이빈哈爾濱) 일대까지 퍼졌다.

다행히 빠른 국제 공조로 팬데믹 pandemic(범유행병)까지 가지는 않았다.

이때 페스트(정확히는 폐肺페스트 pneumonic plague)의 창궐 원인은 사실상 인간의 욕심이었다.

모피를 거래하는 러시아 상인들이 더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만주로 들어와 마르모트 marmotte(마멋 marmot: 다람쥐과과 마멋속에 속하는 체구가 상당히 큰 설치류인 땅다람쥐) 사냥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설치류에서만 유행하던 페스트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가깝게는 2019년 겨울 네이멍구에서 유목을 하던 몽골인 두 명이 페스트에 감염되었고, 2020년 여름에도 추가로 세 명이 확인되었다.

다행히 선제적 방역 조치로 페스트가 퍼지지 않았다.

사실 설치류와 접촉이 잦은 네이멍구 초원 지역에서 페스트는 일종의 토착병과 같다.

동물과 함께 지내며 동물의 부산물(고기, 가죽 등)로 살아가는 한, 페스트와 같은 병의 위험은 게속될 것이다.

 

 

○폐허에서 발견한 지혜

 

훙산문화는 양쯔강 유역의 량주(양저良渚) 문화와 함께 약 5000~6000년 전 동아시아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문명으로 꼽힌다.

훙산문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한 거대한 제단과 고도로 정제된 옥기를 만들어냈다.

랴오닝(요령遼寧)성 링위안(능원凌源)시의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유적에는 여러 제단과 무덤이 모여 있는데 그중에는 5000제곱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신전도 있다.

그렇게 거대한 제단을 만들었던 홍산문화 사람들이 약 5000년 전에 갑자기 글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실은 고고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다.

 

훙산문화의 대표 격인 뉴허량 유적은 랴오닝성과 네이멍구의 경계, 네이멍구에서 랴오닝성으로 가는 제법 큰 도로 한쪽의 허허벌판에 있다.

지금은 중국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야구장보다도 더 큰 돔으로 덮여서 보존되고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그냥 큰길가에 수많은 돌무더기와 무덤, 뼈와 토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커다란 유적의 존재를 1980년대에 처음 발견되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건 사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보통 거대한 건축물이 하나 있으면 후대 사람들도 그 유적 근처에서 이어 살면서 자신들의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주변 농가에서 건축물의 돌들을 빼서 자기 집 담벼락을 고치는 데에 쓰기도 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세력이 침략해서 고의로 훼손하기도 한다.

뉴허량 유적이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최근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훙산문화 사람들이 사라지고 난 뒤 이 지역에 적어도 몇백 년 동안 사람들이 오지 않았고, 그 제사터가 완전히 잊혔다는 것을 뜻한다.

훙산문화가 번성했던 지역에 사람들이 다시 와 거대한 성터를 만들고 산 것은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거의 1000년이 지난 후인 샤자뎬(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문화 시기부터이다.

 

뉴허량의 제사터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훙산문화가 멸망했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

훙산문화가 멸망한 5000년 전, 네이멍구 동남부와 같은 한대와 온대의 경계지대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혼란한 시기였다.

거대한 제사터를 중심으로 모여 살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각자도생을 꾀하면서 작은 집단들로 쪼개졌다.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을 발굴할 때 훙산문화 시기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일종의 공백 상태였다.

그러다고 발굴이 진척되면서 점차 자잘한 문화들로 세분화된 모습이 등장했다.

훙산문화가 사라지고 난 뒤부터 조밀한 도시 유적들이 등장하는 샤자뎬 하층문화의 출현까지가 바로 그런 혼란기였다.

이런 이유로 훙산문화의 뒤를 잇는 문화를 허우훙산(후홍산後紅山: 훙산문화의 다음이라는 뜻)문화, 샤오허옌(소하연小河沿)문화, 다난거우(대남구大南溝)문화 등으로 불렀다.

 

이런 혼란기가 어떻게 초래되었는지는 하민망하 유적의 발굴로 그 이유가 밝혀졌다.

더불어 고고학자들의 오래된 미스터리인 훙산문화의 멸망 원인을 규명할 실마리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환경의 변화와 전염병의 창궐로 훙산문화가 큰 위기를 맞자 작은 씨족 단위로 흩어졌던 것이다.

 

훙산문화의 뒤를 이은 혼란기에 나타난 여러 소규모 집단 중에 샤오허옌문화는 훙산문화의 제사터와 가장 비슷하다.

샤오허옌문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집 안에 제단을 만들고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며 살았다.

다만 기후가 상당히 추워져 식량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샤오허옌문화 사람들은 거대한 돌무지를 만드는 대신 작은 마을 단위로 사방에 흩어져 거주했다.

즉 훙산문화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전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명을 포기하고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해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500년 가까이 이어진 샤오허옌문화 시기가 지나고 약 4000년 전에는 이 일대에 화려한 청동기문화가 번성하며 도시를 이룬 문명이 등장했다.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되는 전염병 흔적이 곧 인간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환경이 바뀌고 전염병이 창궐할 때 훙산문화 사람들은 과감히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대응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간의 강력한 생존 본능과 지혜를 문명의 폐허로 보여준 역설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고대인의 방역 문화

 

하민망하 유적에서 출토된 옥기(위)와 중국 서주시대의 청동그릇(아래). 고대인들은 옥과 청동의 살균효과를 알고 있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고대의 사람들은 현대적 의학지식은 없었지만, 그들만의 경험과 지식으로 전염병과 맞서 살아남았다.

세계 문명사를 이야기할 때 대표적인 유물로 꼽히는 옥과 청동기가 그 예이다.

특히 훙산문화를 비롯해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은 공통으로 옥을 선호했다.

고대인들은 옥에서 나오는 음이온 살균효과를 알고 있었다.

훙산문화의 제사를 담당했던 신관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옥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한 관상용이 아니라 옥에 담긴 치유의 힘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옥의 산지로 유명한 바이칼 Baikal 일대의 원주민들은 몸이 아프면 옥 광산으로 가서 자연 치유를 한다고 한다.

 

한편 신석기시대를 이은 청동기시대에도 아름다움 뒤에 살균작용이 있었다.

약 4500년 전 이집트 파피루스 papyrus 문서에는 가슴 통증을 치료하고 음료수를 정화하는 데 청동을 쓴다고 나와 있다.

물론 청동에 납이 섞이거나 녹이 슬면 몸에 해롭다는 단점은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청동 화합물이 약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상나라 이후 모든 나라가 화려한 청동으로 만든 제사그릇을 사용했고, 다양한 의술 도구 역시 청동으로 만들었다.

이렇듯 인류 역사의 한 축을 이루었던 옥과 청동기의 발달 배경에는 병균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내려는 지혜가 숨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척박한 초원의 유목민들은 각종 약초를 이용해 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냈다.

2500년 전 알타이 Altai 산맥의 고산지대에서 살았던 기마인인 파지리크 Pazyryk 문화의 무덤에서는 종종 미라가 발견된다.

유라시아 초원은 1년에 반 이상이 추운 겨울이고 고원지대는 땅 밑이 얼음으로 차 있어 땅을 파서 무덤을 만들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2~3개월이다.

그러니 장례 기간이 반년 이상 걸릴 수 있다.

시신을 장기간 보관하다 자칫 발생할지 모를 전염병을 막기 위해 그들은 미라 주변에 독특한 향으로 유명한 고수풀, 물싸리풀 같은 강력한 항균작용을 하는 초원의 풀을 같이 넣었다.

중세 페스트를 치료한 유럽 의사들도 알코올로 소독을 해서 페스트의 확산을 막았다.

이렇듯 인간은 수많은 희생과 경험으로 얻어낸 지식을 문화로 발달시켜 자기 집단을 보호해왔다.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위기는 계속된다

 

인간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워왔다.

심지어 과거의 유물에도 공포를 느꼈다.

이집트 Egypt 피라미드 pyramid를 이야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파라오의 저주 curse of the pharaohs'가 대표적이다.

1922년 이집트 투탕카멘 Tutankhamun의 피라미드 발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가십거리를 추구하는 언론이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 중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사례만을 짜깁기해 만든 일종의 가짜뉴스에 불과했다.

정작 발굴을 담당한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가 천수를 누린 것만 봐도 미라의 저주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파라오의 저주'는 잠시의 가십거리로 끝나지 않고 후에 '미이라'나 '인디애나 존스' 같은 고고학을 기반으로 하는 모험영화의 모티브가 되면서 지금까지도 회자하고 있다.

 

진정한 공포의 대상은 몇천 년 전에 만들어진 미라가 아니라 현대 인간의 문명이다.

구석기시대에는 인구밀도가 낮다못해 거의 희박했기 때문에 전염병이 전체 인류에 끼치는 영향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빙하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사냥이 일상화하고 인간 사이 교류가 빈번해지며 전염병의 확산세도 함께 커졌다.

그 결과 동서 문명의 교류를 잇는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으로 전해져 세계사를 바꾸었던 흑사병과 같은 팬데믹이 등장했다.

거대한 규모의 전염병은 어쩌면 인간이 낳은 업보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아직 다소간의 논쟁이 남아 있지만, 적어도 고도로 밀집화·도시화된 세계, 그리고 지역 간의 교류가 지나치게 활발해진 상황이 팬데믹을 촉발시켰음은 분명하다.

물론 그 기저에는 자기파괴적으로 세상을 바꿔온 인간의 활동과 그에 따른 기후변화가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많은 극지 연구자들은 지구온난화로 북극권의 빙하가 녹아 야생동물과 인간의 예상치 못한 접촉이 또다른 전염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북극권은 땅이 항상 얼어 있는 영구동결대로, 짧은 여름 동안 땅의 겉이 녹기는 하지만 한 삽만 파도 얼음이 차 있기 때문에 그 이상 땅을 파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무덤도 깊게 파지 못하고 나무들도 뿌리를 깊숙이 내리지 못해 마치 거미줄처럼 옆으로 뻗는다.

땅속은 사시사철 냉동고인 셈이니 사소한 털 한오라기까지 잘 남아 있는 타임캡슐의 역할을 한다.

추코트카 Chukotka 자치구와 같은 러시아 극북 지역의 경우 무덤을 발굴할 때 삽 없이 솔질로만 한다.

이 지역은 무덤을 만들 때 땅을 얕게 파는 대신 늑대나 여우 같은 들짐승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돌을 쌓아올린다.

그러니 어떤 경우는 돌만 걷어내면 털끝 하나 손상되지 않은, 당장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은 시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유물을 조사하기 전까지는 몇천 년 전 것인지 얼마 전 것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을 정도다.

 

17세기 이래로 러시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북극권을 탐험했다.

당시 선원들은 부실한 배를 타고 북극해를 다니다가 눈이 내리고 바다가 얼면 근처 땅에 배를 끌어올리고 월동을 한 후에 봄이 되면 다시 목적지로 전진했다.

그러는 와중에 전염병, 결핵, 괴혈병 등으로 많은 선원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은 곧 바로 그 자리에 묻혔다.

지금도 북극해 일대 군데군데에는 당시 사람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문제는 이들의 몸에 여전히 병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천연두로 사망한 수많은 시신들이 북극권에 묻혀 있다.

결핵의 경우도 안심할 수 없다.

결핵균 자체가 워낙 빠르게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에 같은 결핵이라도 과거 사람들을 괴롭힌 결핵균은 현대의 것과 달라 우리는 이런 결핵균에 대한 저항력이 거의 없을 수 있다.

물론 요즘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 누군가가 그 무덤을 일부러 발굴해서 악용하는 것을 그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영구동결대가 급격히 해체되고 있다는 점이 또다른 변수다.

자칫하면 얼음이 녹아내려 자연스럽게 무덤이 드러나고 철새나 북극권의 동물들이 시신의 세균을 옮기는 숙주가 될 수도 있다.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지만 최근 급변하는 기후 상황을 보면 어떤 돌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를 일이다.

고고학 자료가 현생인류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실제 벌어질 수도 있다.

 

인류도 세상만물과 마찬가지로 멸망과 생존을 거듭해왔다.

고고학 자료를 보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ustralopithecus(남유인원南類人猿)의 등장 이후 최근까지 적어도 20여종의 인류가 등장했다 사라졌다.

DNA 분석 결과 그들은 지금의 우리와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최근에는 약 3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Homo neanderthalensis)이 멸종했다.

지금 우리의 DNA에는 많게는 5퍼센트, 적게는 2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Denisovan(호모 데니소반스  Homo denisovans)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지만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그 일부는 현생인류로 남아서 생존해왔다는 뜻이다.

 

현생인류('호모 Homo 속' 즉 '사람속')는 미신을 맹신하지 않았고, 경험으로 습득한 지혜를 공유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미개한' 원시인이라는 편견과 달리 그들은 슬기롭게 질병을 이겨냈다.

반대로 중세의 페스트, 천연두와 같은 팬데믹은 오히려 문명의 산물이다.

고대의 인류가 만약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쌓아놓은 문명에 기대고, 지혜 대신 공포나 미신에 기댔다면 한두 번은 운 좋게 생존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은 멸망했을 것이다.

지난 몇천 년 동안 수많은 바이러스와 세균은 돌연변이를 무기 삼아 인간을 공격했고, 그때마다 인간은 집단의 지혜로 그에 맞서왔다.

우리는 모두 공포를 지혜로 극복한, 승리한 인류의 후손인 셈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2. zum 뉴스 한겨레 https://news.zum.com/articles/58428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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