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5: 카롤링거 왕조의 흥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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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5: 카롤링거 왕조의 흥기

새샘 2023. 7. 13. 22:36
샤를마뉴 제국의 흥기(717~814년)
카를 마르텔, 궁재가 되다 717년
카롤링거 왕조가 메로빙거 왕들과 권력 공유 717~751년
피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다 751년
샤를마뉴, 피핀 계승 768년
샤를마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쓰다  800년
루트비히 경건왕의 황제 즉위 813년
샤를마뉴 사망 814년

 

카를 마르텔(688경~741)(사진 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Martel)

갈리아 Gaul에 자리 잡은 메로빙거 왕조 Merovingian Dynasty의 취약성은 7세기 말에 접어들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메로빙거 왕조 Merovingian Dynasty의 중심지인 네우스트리아 Neustria('새로운 땅'이란 뜻이며, 오늘날 프랑스 북부 지역으로 메로빙거 프랑크 왕국 Frankish Kingdom의 서부 지역)의 귀족 가문과 변경 지역인 아우스트라시아 Austrasia의 귀족 가문 사이의 긴장이 점차 고조되었다.

아우스트라시아 귀족은 라인 강 Rhine 동쪽의 '부드러운 변경'으로 끊임없이 밀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부와 군사력을 획득했다.

반면 네우스트리아에 기반을 둔 메로빙거 왕조는 손쉬운 정복지를 갖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7세기를 거치는 동안 보유 토지의 상당 부분을 교회에 헌납했다.

메로빙거 왕들이 연달아 단명하면서 일은 더욱 복잡하게 꼬였고,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687년 아우스트라시아 귀족 지도자인 헤르스탈 Herstal의 피핀 Pepin(피핀 2세 Pepin II)(재위 687~695)은 '궁재宮宰 Mayor of Palace' 지위를 무력으로 쟁취하는데 성공했고,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 두 지역에 대한 지배권 장악을 도모했다.

그러나 피핀 가문이 메로빙거 궁정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것은, 717년 피핀의 사생아인 카를 마르텔(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이 두 지역에서 반대파를 물리친 뒤의 일이었다.

그 후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카를 마르텔과 그의 아들들이 지배한 왕국에서 이름뿐인 왕 노릇을 했다.

 

카를 마르텔 Carl Martel(재위 718~741)은 위대한 전사왕 클로비스 Great Warrior King Clovis I(재위 481~511)의 뒤를 이은 프랑크 왕국 제2의 건설자로 간주되곤 한다.

첫째, 그는 733년이나 734년(전통적인 연대인 732년은 오류로 밝혀짐)에 메로빙거 왕조 수도인 파리 Paris에서 240킬로미터쯤 떨어진 투르 Tours(푸아티에 Poitiers가 아니다)에서 에스파냐 España 방면에서 침략해온 무슬림 muslim 군대를 격파했다.

무슬림 군대는 정규군이 아닌 약탈자의 무리였지만, 이 침공은 에스파냐 우마이야 왕조 Umayyad Dynasty의 서북 유럽 공략에서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카를은 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크게 위신을 높일 수 있었다.

둘째,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카를이 잉글랜드 England의 베네딕투스 수도회 Benedictine Monastery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프리지아 Frisia(현 네델란드의 북쪽과 독일의 북서쪽 해변 지역)와 독일에 대한 개종사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카를 가문은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대한 정복 및 식민사업에 적극적이었으므로, 그는 선교사업과 프랑크 왕국 Frankish Kingdom(Francia)의 팽창이 나란히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했다.

카를은 성 보니파티우스 Saint Bonifatius(또는 보니파키우스 Bonifacius)와 그 추종자들의 개종 사업을 기꺼이 지원했다.

한편 잉글랜드의 베네딕투스 수도사들은 마르텔과 그 후예들을 교황과 접촉하게 해주었고, 프랑크 왕국 교회에 대한 ㅏ르텔의 개혁및 장악 노력을 지원했다.

 

카를 마르텔은 741년에 죽었다.

마르텔은 결코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지만, 생애 만년 카르텔은 명백히 갈리아의 유일한 실질적 지배자였다.

따라서 737년 메로빙거 왕이 죽었을 때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새로운 왕의 선임을 주관했다.

그러나 743년 마르텔의 두 아들 카를로만 Carloman과 피핀(피핀 3세 Pepin III)은 정통 왕권의 위엄에 굴복했고, 뒤이어 새로운 메로빙거 왕이 왕위에 올랐다.

750년 카를로만은 공적 생활에서 은퇴해 수도원에 들어갔고, 피핀(피핀 3세)은 직접 왕권을 장악하기로 결심했다.

왕조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프랑크 교회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메로빙거 갈리아의 주교들이 교황의 인가 없이 그런 찬탈 행위를 지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피핀은 단념하지 않았다.

그의 가문은 성 보티파티우스를 지원했기에 피핀은 일찍이 로마에서 호평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교황은 성상파괴聖像破壞 iconoclasm(그리스도와 성인의 형상 즉 아이콘 icons 숭배 금지) 문제를 놓고 비잔티움 Byzantium 황제들과, 그리고 중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놓고 롬바르드 Lombard 왕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기에 피핀의 왕권 찬탈에 기꺼이 협력했다.

교황은 강력한 신흥국가인 프랑크 왕국의 지배자가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에 맞서 교황의 이익을 보호하는 책무를 비잔티움 황제를 대신해 떠맡아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751년 성 보니파티우스는 교황의 사절 자격으로 성유식聖油式(성스러운 기름을 부음으로써 성령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베풂으로써 피핀(피핀 3세)(재위 751~768)을 프랑크 왕으로 인정했다.

새로운 국왕에게 성스러운 기름을 붓는 의식은 성경에서 따온 아이디어였다(예언자 사무엘 Samuel은 이스라엘 Israel의 첫 왕 '사울 Saul'에게 기름을 부었다).

≪구약성서≫와 결부된 이런 권력은 피핀(피핀 3세)의 아들인 샤를마뉴 Charlemagne(따라서 그는 '다윗 David'이 되었다)(재위 768~814)와 손자 루트비히 경건왕 Ludwig the Pious King(그는 '솔로몬 Solomon'이 되었다)(재위 814~840) 치세에 확대되었다.

그리고 751년 당시의 시점에서 보면, ≪구약성서≫와의 연관은 오히려 마지막 메로빙거 왕의 폐위 과정, 그리고 메로빙거 왕조의 피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새로운 국왕이 거의 300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얼마나 생경하고 불안정했는지를 강조하는 인상을 주었을 뿐이다.

756년 피핀(피핀 3세)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족에 대한 군사 원정에 착수함으로써 교황에게 진 빚을 갚았다.

그러나 원정의 성과가 여의치 않자 피핀은 이를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피핀(피핀 3세)의 즉위는 새로운 프랑크 왕국이 '가톨릭교회 및 베네딕투스 수도회 세력 범주'에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의 피핀은 새로운 왕국의 지배권을 장악하기에도 버거울 지역이었다.

 

 

○샤를마뉴 치세

 

814년의 샤를마뉴 제국(사진 출처-출처자료1)

가톨릭교회, 프랑크 왕국, 베네딕투스 수도회 사이의 새로운 제휴가 공고해진 것은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 치세(768~814) 때의 일이다.

샤를마뉴의 라틴어 이름은 카롤루스 마그누스 Carolus Magnus인데,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768년 샤를마뉴가 왕위에 올랐을 때 프랑크 왕국 Frankish Kingdom은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아키텐 Aquitaine 등 적대 지역으로 분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경이로운 군사 원정을 통해 샤를마뉴는 프랑크인을 결속시켰고, 그들을 이끌고 정복에 나서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왕국, 작센 Sachsen(영어: Saxony)을 포함한 독일 대부분, 중부 유럽 일부, 카탈루냐 Catalunya(영어: Catalonia) 등을 병합했다.

성공적인 정복활동은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에 대한 신의 재가를 확증해주는 일이었다.

정복활동으로 획득한 약탈품, 전리품, 새로운 땅 등으로 샤를마뉴는 프랑크족 추종자들에게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와 영광을 안겨주었다.

샤를마뉴에게 정복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미 그리스도교도였다.

그러나 작센 지역에서 샤를마뉴 군대는 20년이나 원정활동을 한 끝에 마침내 이교도 작센인을 굴복시키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개종을 강요했다.

독일은 이렇게 해서 프랑크 왕국의 영토에 강제 통합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샤를마뉴가 수행한 작센 정복 사업이 정복과 개종을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정복과 개종의 통합은 앞으로 1,000년 동안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광대한 정복지를 지배하기 위해 샤를마뉴는 주백州伯 counts—라틴어 comites는 '추종자들'이란 뜻—이라 불린 프랑크 귀족들을 임명해 관할 지역의 지방 행정을 주관하도록 했다.

주백의 여러 의무 중에는 재판 집행과 군대 모병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궁정 관리, 통행세 수납, 국왕 영지 관리, 세금 징수 등의 업무를 감독할 지방 행정관 네트워크도 확립했다.

또한 샤를마뉴는 은화 1파운드를 240페니로 정한 화폐제도를 창안했는데, 이 제도는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시기까지 지속되었고, 영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마침내 십진법에 기초한 통화로 대체되었다.

앞서 살폈듯이, 이 새로운 화폐제도에 사용된 은의 대부분은 아바스 왕조 Abbasid Dynasty에서 왔다.

스칸디나비아 Scandinavia 상인은 러시아 Russia와 발트 해 Baltic Sea를 경유해 라인란트 Rheinland로 가져간 은을 샤를마뉴가 작센인 Sachsen(영어: Saxon)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노예, 모피, 직물 등과 교환했고, 그것들을 다시 바그다드 Baghdad로 수출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행정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이 새로운 화폐제도는 문서와 훈령을 규칙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유지되었다.

그러나 샤를마뉴는 자신의 의도를 알리기 위해 문서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궁정에서 특별 임무를 띤 대리인—'영주의 사절'—을 정기적으로 파견해, 지방을 순회하면서 왕의 훈령을 직접 하달하고 지방 행정관을 감시하도록 했다.

샤를마뉴의 통치 제제는 결코 완전하지 않았다.

지방 관리는 지위를 남용했고, 귀족은 자유농민을 부자유한 농노로 만들려 했으며, 지방 법정에서는 정의가 실행되기보다는 거부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나 샤를마뉴 체제는 로마 멸망 이후 유럽에 등장한 가장 훌륭한 정부였으며, 그 후 300년 동안 서유럽 지배자들은 샤를마뉴 체제를 모델 삼아 행정 체계를 구축했다.

 

 

○그리스도교와 왕권

 

치세 전 시기를 통해 샤를마뉴는 그리스도교도 왕으로서의 책임감을 진지하게 느꼈다.

그러나 제국이 확대되면서 그는 스스로를 프랑크 왕국의 지배자일 뿐만 아니라 통일된 그리스도교 사회 및 그리스도교 국가의 지배자이기도 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국가를 군사적·정신적으로 적들로부터 방어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카롤링거 세계는 비잔티움·이슬람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을 구분 짓지 않았다(두 영역의 구분은 12세기 이후에야 유럽인의 삶을 특징짓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교도 사이에서 왕권이란 교회를 보호하고 그리스도교도들을 지키며 그들의 구원을 장려하기 위해 신이 제정한 신성한 직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종교적 개혁은 정의와 영토 수호 못지않게 왕권의 핵심 사안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왕국의 종교생활에 대한 왕의 책임은 다른 책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신민의 삶이 신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어떤 왕국도 번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정신적 책무에 관한 이런 사상은 8세기 말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샤를마뉴가 휘둘렀던 비범한 권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중세 초기에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샤를마뉴는 주백이나 다른 관리를 다루듯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고했다.

그는 또한 프랑크 왕국 교회의 기도문을 변경했고, 프랑크 왕국 수도원의 예배 규율을 개혁했고,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문의 변경을 선포했고, 이교적 습속을 금지했고, 프랑크 왕국 농민에게 십일조(농업 생산물의 10분의 1을 교회에 바쳐야 했다)를 강요했고, 작센의 피정복민에게 세례를 포함한 기본적인 그리스도교 의식을 강제했다.

신이 선택한 새로운 이스라엘—프랑크 왕국이 성경 속의 이스라엘 백성이 신에게 불순종할 때마다 마주쳐야 했던 운명을 피할려면 샤를마뉴는 마땅히 그러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정치권력을 지닌 샤를마뉴는 교황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교황의 역할을 조심스럽게 인정하긴 했지만, 샤를마뉴는 교황을 프랑크 왕국의 여느 주교와 마찬가지로 대했다.

그는 교황 선출을 주관하고 재가했으며 교황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796년 교황 레오 3세 Pope Leo III(재위 795~816) 선출 직후 샤를마뉴는 그의 권위와 교황의 권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는 편지를 에로 3세에게 보냈다.

 

"거룩한 미덕의 도우심에 따라 밖으로는 이교도의 침략과 비그리스도교도의 약탈로부터 모든 거룩한 그리스도 교회를 군사력으로 지켜내고, 안으로는 가톨릭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교회를 강건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중재자로서의 교황 성하와 우리를 인도하고 베푸시는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교도들이 모든 곳에서 거룩한 이름을 대적하는 자들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교황 성하께서는 우리의 군대를 도울 의무가 있습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카롤링거 르네상스 Carolingian Renaissance—카롤링거 궁정 중심의 문화적·지적 번영에도 그와 비슷한 이상이 가로놓여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Hebrew 왕 다윗과 솔로몬이 그랬던 것처럼,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 루트비히 경건왕은 문학과 학문의 후원자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지적·문화적 중심으로서의 궁정이라는 이상을 고안해냈고, 그것은 19세기 말까지 서유럽인의 문화적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의 학문 지원 배후에는 고전 학문이 그리스도교적 지혜의 토대이며 그 지혜가 신의 백성의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확신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학문을 후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군주의 으뜸가는 의무였다.

 

고전 학문과 그리스도교적 지혜를 장려하기 위행 샤를마뉴는 유럽 전역에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들 가운데 잉글랜드의 베네딕투스 수도사 앨퀸 Alcuin도 있었는데, 고전 라틴어 문법의 권위자였던 그는 샤를마뉴 궁정의 지적 우두머리가 되었다.

카롤링거 시대 학자들은 상당량의 독창적인 라틴 시와 다량의 신학·목회 문헌을 창작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앨퀸의 지도 아래 고전 라틴 문헌의 대조, 교정, 필사 등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라틴 문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라틴어 성경이었는데, 누대에 걸친 필사자들의 오류 때문에 훼손되어 있었다.

이런 오류를 찾아내 바로잡기 위해 앨퀸과 동료들은 가능한 한 많은 다양한 성경 사본을 수집해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대조했다.

그들은 모든 사본을 검토하고 그중 올바른 판본을 결정한 뒤 새롭게 교정된 사본을 만들고 다른 사본들은 파괴해 버렸다.

그들은 또한 글자 형태를 간소하게 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간을 확보한 새로운 글씨체를 개발함으로써 후대의 필사자들이 새롭게 교정된 텍스트를 오독할 가능성을 크게 줄여주었다.

15세기 르네상스 학자들에 의해 다시 수정되기는 했지만, 이 새로운 글씨체—카롤링거 소문자 Carolingian minuscule—는 현재 유럽에서 출판되고 있는 거의 모든 서적의 인쇄에 사용되는 활자체의 바탕이 되었다.

 

 

○샤를마뉴와 서로마 제국의 부활

 

샤를마뉴 생애는 800년 크리스마스에 로마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날 그는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새로운 서로마 황제의 관을 썼다.

여러 세기가 지난 뒤 교황들은 이 사건에서 교황이 맡은 역할을 신성 로마 황제(12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지만, 편의상 샤를마뉴 이후의 서유럽 황제들을 가리키는 호칭으로도 쓸 수 있다)에 대한 정치적 수월성의 선례로 인용했다.

그러나 800년 당시의 시점에서 교황 레오는 샤를마뉴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훗날 샤를마뉴는 자신에게 관을 씌우려던 레오의 계획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날 교회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교황 레오가 샤를마뉴의 사전 인지 내지 동의 없이 그런 대관식을 치렀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적어도 그 대관식은 비잔티움인 Byzantine—그들은 샤를마뉴와 이미 긴장관계에 있었다—을 분노케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황제 칭호가 프랑크 왕국의 왕인 샤를마뉴의 지위에 보태주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샤를마뉴는 왜 그것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813년 그것을 아들 루트비히 경건왕에게 물려주었는가?

 

그 이유를 역사가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이 사건이 갖는 상징적 중요성이다.

800년까지는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에서 지배하던 로마 황제만이 아우구스투스 황제 Emperor Augustus의 직계 후예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은 비록 서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잃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서유럽을 막연하게나마 제국의 변방 정도로 간주하고 있던 터였다.

샤를마뉴의 황제 칭호 채택은 비잔티움인의 뺨을 후려친 것과 다름없었다.

비잔티움인은 이미 샤를마뉴와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3대 칼리프 Caliph(또는 칼리파 Khalifa)인 하룬 알 라시드 Harun al-Rashid—비잔티움의 적이었다—와의 관계를 수상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시각에서 그 사건은 서유럽인의 자신감과 독립성을 내외에 천명한 것이었고, 그 사실은 그 후로도 결코 잊히지 않았다.

때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서유럽인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황제의 머리에 계속해서 관을 씌워주었다.

그러므로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샤를마뉴가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킨 것은 서유럽 문명의 자의식 발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이었음이 분명하다.

 

 

○카롤링거 제국의 붕괴

 

814년 샤를마뉴가 죽었을 때 그의 제국은 외아들 루트비히 경건왕(재위 814~840)에게 온전히 넘어갔다.

그러나 루트비히 치세에 제국은 급속히 분열되기 시작했고, 840년 루트비히가 사망했을 때 제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서프랑크(그 후 프랑스가 되었다)는 대머리왕 샤를 Charles the Bald에게, 동프랑크(독일이 되었다)는 독일인 루트비히 Ludwig the German에게, 그리고 라인란트에서 로마까지 뻗은 이른바 중왕국 Middle Francia은 황제 칭호와 함께 로타르 Lothair에게 넘어갔다.

856년 로타르의 혈통이 끊기자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사이에는 로타르의 영토와 황제 칭호를 취하기 위한 내전이 벌어졌다.

로타링기아 Lotharingia(또는 프랑스어로 알자스-로렌 Alsace-Lorraine)로 알려진 이 영토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적개심의 발화점으로 남게 되었다.

 

카롤링거 제국의 붕괴 원인은 루트비히 경건왕의 정치적 무능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곤 했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루트비히는 무능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는 부왕이 건설한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지만 거의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샤를마뉴 제국은 성공적인 정복의 기반 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814년에 이르러 샤를마뉴 제국의 경계는 최대 판도까지 확장되었다.

샤를마뉴는 서쪽으로 에스파냐의 우마이야 지배자와 마주했고, 북쪽으로 바이킹 Viking과 마주했다.

동쪽으로 진출한 샤를마뉴 군대는 이미 정복된 독일 영토에서의 정주에 몰두한 나머지 그 너머에 있은 슬라브족 Slavs의 땅으로 밀고 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을 정복활동으로 밀어낸 압력—추종자들을 격려·보상해줄 전리품, 땅, 약탈물 등의 필요성—은 샤를마뉴가 거둔 성공으로 인해 한층 더 커졌다.

샤를마뉴 치세의 프랑크 왕국에서는 주백의 숫자는 대략 100명에서 300명으로 3배가 늘어났다.

하지만 루트비히 경건왕은 300명의 주백을 900명으로 늘릴 수 없었다.

그것을 가능케 해줄 재원이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자신에게 보상해줄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 프랑크 왕국 귀족들은 서로를 물어뜯었다.

루트비히의 싸우기 좋아하고 다루기 힘든 아들들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고, 아우스트라시아인, 네우스트리아인, 아키텐인 사이에 지역적 적대감이 다시 불붙었다.

중앙의 황제 권위가 무너지자 8세기 카롤링거 세계의 핵심 집단인 자유농민은 강력한 지방 귀족의 지배 아래 놓였다.

귀족은 그들을 마치 부자유한 농노처럼 취급에 토지에 결박시키고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 아바스 제국의 국내 혼란으로 인해 바이킹 상인이 아바스의 은을 카롤링거 영역으로 들여오던 교역로가 파괴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바이킹은 해안선을 따라 하천망을 거슬러 오르며 파괴적 약탈을 자행했다.

이런 복합적인 압력 아래 카롤링거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유럽의 새로운 정치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바이킹

 

스칸디나비아 상인은 카롤링거 시대가 시작하던 무렵 유럽의 북해와 발트 해 항구에서 이미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북부 러시아에서 상인 거류지를 건립하고 그곳에서 출발해 러시아 하천망을 따라 (흑해 Black Sea를 통과해) 비잔티움까지, 그리고 (카스피 해 Caspian Sea를 통과해) 아바스 칼리프국 Abbasid Caliphate(아바스 왕조 Abbasid Dynasty)에 이르기까지 교역로를 열었다.

그러나 790년대부터 스칸디나비아 침략자들(적들에게는 '약탈자'를 뜻하는 '바이킹 Vikings'으로 알려졌다)은 북유럽의 해안 항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이런 침략 행위는 약탈품, 몸값, 공물 징수, 노예매매 등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추진력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9세기 중반에 이르러 양상이 바뀌었다.

바이킹은 수천 명의 군대를 조직해 공격을 가했고, 그들의 목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Scotalnd, 아일랜드 Ireland, 북부 프랑스 등지를 정복해 독립적인 공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1세기 초 바이킹은 아이슬란드 Iceland, 그린란드 Greenland, 뉴펀들랜드 Newfoundland에 정주지를 확립했다.

바이킹 지도자들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노르망디 Normandy(북방 사람, 즉 '바이킹의 땅'이란 뜻), 러시아 등지에서 공국을 통치했다.

바이킹 군대는 덴마크 Denmark 국왕 크누트 Cnut(또는 Canute)를 잉글랜드 왕위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 바이킹 공격의 위협은 줄어들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10세기 말부터 급속히 진행되었다.

한편 프랑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 등지의 바이킹 지배자와 정주자들은 서북 유럽의 문화·정치 세계에 급속히 동화되었다.

1066년 노르망디의 바이킹 군대가 헤이스팅스 전투 Battle of Hastings에서 승리를 거두고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그러나 정복당한 잉글랜드인(그들 상당수는 바이킹 침략자의 후손이었다)은 1066년의 노르망디 정복자들을 바이킹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인으로 간주했다.

 

바이킹이 유럽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착한 바이킹, 나쁜 바이킹 식의 흑백논리는 가능하지도 않고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바이킹 침략의 파괴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바이킹만이 9세기와 10세기 혼란의 유일한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카롤링거 프랑스의 내전, 남부 이탈리아와 프로방스 Provence에서의 무슬림 공격, 동남부 독일에서 헝가리인 Hungarians의 공격, 그리고 거의 모든 지방에서 벌어졌던 정치적 대립 등 실로 다양한 요인들이 카롤링거 이후 세계의 혼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이킹이 무질서의 근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와 동부 잉글랜드에서 바이킹은 새로운 도시들을 건립했고, 그 지역에서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고품질 도기의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원거리 상인으로서 바이킹은 처음에는 9세기 초에, 다음으로 10세기 전반에 다량의 은을 서유럽에 반출했고 이를 통해 유럽 경제에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곧 보겠지만, 바이킹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한 유럽 여러 지역의 지배자들은 승리를 통해 얻은 높은 위상에 힘입어 과거보다 훨씬 강력한 왕국과 공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수도원에 무수히 많은 공격을 가함으로써 바이킹은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지적·예술적 업적을 상당 부분 파괴했다.

그러나 바이킹의 광범위한 지정학적 영향력은 그들의 라틴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과 결합하여, 유럽의 문화적·정치적 결속을 긴밀히 함으로써 유럽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는 데 기여했다.

 

 

○카롤링거 시대의 유산

 

하나로 통합된 그리스도교 유럽이라고 하는 카롤링거 왕조의 비전은 9·10세기의 혼돈 속에서 무너졌다.

유럽 내부에는 새로운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고, 그것은 향후 대단히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는 단 한 번도 샤를마뉴 제국에 편입된 적이 없었고, 그때까지 서로 적대적인 여러 앵글로색슨 Anglo-Saxson 소국들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알프레드 대왕 Alfred the Great(재위 871~899)과 그 후계자들의 치세에 처음으로 하나의 통일 왕국으로 성장했다.

알프레드와 그 후계자들은 군대를 재편하고 지방 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잉글랜드 법률을 편찬했다.

알프레드는 궁정 학교를 설립했고 앵글로색슨 문자 등 민족문화의 여러 분야에 대한 관심을 장려했다.

이 모든 활동에서 알프레드는 카롤링거 제국을 직접적인 모델로 삼고 있었다.

바이킹의 공격에 맞서 웨섹스(또는 웨식스) 왕국 Kingdom of Wessex(또는 웨스트색슨 왕국 Kingdom of the West Saxons)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는 업적에 더해, 알프레드와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앵글로색슨 왕조들이 바이킹에 의해 파멸되었기에, 알프레드와 그 후계자들은 하나로 통합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양모 교역으로 왕국의 부가 증대한 것도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1000년에 이르러 잉글랜드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행정적으로 가장 세련된 국가가 되었다.

 

10세기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는 작센 공 Duke Saxony(독일어: Sachsen)이었는데, 그는 카롤링거 왕실의 대가 끊긴 뒤 917년 독일 왕국 Kingdom of Germany(동프랑크 East Francia)의 왕이 되었다.

잉글랜드의 웨섹스 왕처럼 독일의 작센 왕들도 카롤링거 왕조를 직접 모델로 삼아 왕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작센 왕들은 자신이 공유하고 있던 카롤링거 유산의 다른 국면에 의존하고 있었다.

10세기 잉글랜드는 중앙집권화된 화폐 및 사법 체계, 그리고 도시와 상업에 대한 광범한 지배권을 통해 매우 효율적인 행정제도를 지닌 왕국이 되어 있었다.

반면 10세기 독일의 왕권은 상업과 행정에서의 이익보다는 정복활동의 성공으로 얻어진 이익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8세기의 카롤링거 왕조는 작센에서의 성공적인 정복활동에 의지해 권력을 구축했다.

마찬가지로 작센을 근거지로 한 10세기 독일 오토 왕조 Ottonian Dynasty의 왕들은 동부의 '부드러운 변경'인 슬라브 영토에 대한 성공적인 정복활동을 바탕으로 권력을 구축했다.

그들은 또한 카롤링거 왕조를 모델로 삼아 조심스럽게 그리스도교도 군주의 이미지를 키웠다.

955년 오토 1세 Otto I(재위 936~973)는 샤를마뉴가 소지했던 성스러운 창을 지니고 이교도인 헝가리인과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오토는 중부 유럽의 지배자로서 그리고 샤를마뉴의 황제 지위를 이어받을 자격을 갖춘 인물로서 자리매김했다.

962년 로마에 간 오토는 교황 주재하에 서로마 황제로 대관했다.

당시 교황은 젊고 방탕하기 짝이 없는 요하네스 12세 Pope Ioannes(영어: John) XII(재위 955~964)였다.

교황은 오토를 로마에서 벌어진 당파 싸움에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오토는 교황 요하네스가 더 이상 자신을 이용할 일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본국에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교황 요하네스의 행동을 괘씸하게 여긴 오토는 요하네스를 폐위하고 새 교황을 선출했다.

 

황제가 된 오토는 독일 교회에 대한 지배권의 강화를 원했고,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Burgundy—한때 황제 로타르가 장악했던 중왕국의 일부—에서 황제권을 주장하여 각종 이권을 챙기고 싶었다.

물론 교황권 보호는 카롤링거 식의 황제를 표방한 오토가 이행해야 할 책임이었다.

하지만 오토는 한층 구체적인 목표인 이권 확보를 얻어내기 위해 교황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토는 자신이 로마에 상주하지 않는 한 교황을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북부 이탈리아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던 지극히 독립적인 성향의 도시들을 장악하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다.

반면 그가 이탈리아에 너무 오래 머물 경우 작센에서의 권위는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지방 영주들이 동부의 슬라브 영토에서 정복활동을 통해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작센에서의 지방적 차원의 관심과 이탈리아에서의 황제로서의 관심, 이 둘을 조화시키는 문제는 오토 1세도, 그의 아들(오토 2세 Otto II, 재위 973~983)도, 그의 손자(오토 3세 Otto III, 재위 983~1002)도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였다.

그 결과 작센 귀족은 황제로부터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런 거리두기는 1024년 이후 극적으로 가속화되었다.

그해 독일 왕위는 새로운 왕조인 잘리어 왕조 Salian Dynasty—작센이 아닌 프랑켄 Franken에 본거지를 둔 왕조—에 넘어갔다.

잘리어 왕조의 하인리히 4세 Heinrich IV(재위 1056~1105)가 작센 및 동쪽 슬라브 영토에 있는 구 왕실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재천명한 것은 107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의 지배권 재천명은 왕실과 작센 귀족계급 사이에 내전을 촉발시켰고, 그것은 독일뿐만 아니라 서유럽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작센 전쟁(또는 작센 반란) Saxon Revolt(1073~1075)의 결과에 대해서는 제9장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가 남긴 다양한 유산은 10세기 지중해 세계에도 남아 있었다.

카탈루냐 Catalonia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임명된 주백의 계승자들이 10세기 전 시기를 통해 공법과 토지법을 계속해서 주관하고 있었고, 자유농민은 새로운 땅에 정주해 번영을 누렸으며, 고전 학문과 그리스도교 학문은 개혁된 베네딕투스 수도원 및 성당에서 번성했다.

주백은 국유지와 통행세—팽창일로의 교역활동에 대해 부과했다—에서 수입을 얻었다.

바르셀로나 Barcelona 시는 카탈루냐 주백의 보호 아래 원거리 교역 시장 및 지역 시장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아키텐 Aquitaine에서도 푸아티에 Poitiers 및 툴루즈 Toulouse 주백은 카롤링거 왕조의 기반 위에 11세기까지 계속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결국 11세기에 이르러 아키텐과 카탈루냐 두 지역에서 카롤링거 공권력의 전통은 무너지고 말았다.

 

10세기 서유럽, 특히 카롤링거 왕조를 모델로 한 지배자들의 영역에서는 도시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웨섹스 국왕들은 새로운 도시들을 세우고 기존 도시들의 성장을 장려했다.

그들은 화폐 주조를 규제하고 시장의 성장을 장려했다.

세금을 주화로 납부하도록 요구한 것도 이를 위해서였다.

1066년 잉글랜드가 노르망디인 Normans에게 정복되었을 때 잉글랜드 인구의 1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거주했을 정도로 잉글랜드는 11세기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였다.

저지대 지방과 라인란트에서는 원거리 교역(특히 양모 원사와 모직물)과 작센 산악 지대에서 발견된 은광 덕분에 도시가 급속히 성장했다.

카탈루냐의 경우, 바르셀로나의 성장은 이 나라의 정치적·사회적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한편 아키텐에서는 푸아티에와 툴루드 두 도시가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 유럽을 잇는 육상 교역로에 위치한 지리점 이점을 활용해 번영을 누렸다.

 

10·11세기 이탈리아에서의 도시 성장은 카롤링거 식의 유력한 지배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10세기 이탈리아의 도시 번영은 비잔티움 황제가 동부 지중해에서 무슬림 해적 진압 작전에 성공한 덕분에 가능했다.

10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들은 비잔티움이 통제하던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에는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 남쪽에는 아말피 Amalfi·나폴리 Napoli(영어: Naples)·팔레르모 Palermo 등이 있었다.

그들은 비잔티움과 무슬림 세계에서 서유럽으로 비단과 향신료 등의 사치품을 실어 나르는 해운업에 종사함으로써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1세기에 있었던 노르망디인의 남부 이탈리아 침공은 이러한 교역 체계를 붕괴시켰고, 투르크 Turk의 소아시아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반도) 침공은 비잔티움의 관심을 동쪽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11세기 말에 이르러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해군은 동부 지중해를 제패했고, 그 결과 이들 도시의 주민은 비잔티움 세계와 무슬림 세계와 서유럽을 오가며 수익성 좋은 물품의 중개상 역할을 함으로써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이런 발전은 카롤링거 왕조의 중심부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곳에서 카롤링거 식의 왕권은 10세기를 거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바이킹 침략, 경제 붕괴, 지방 영주의 세력 증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일부 카롤링거 제도들—공공 법정과 중앙에서 주조된 주화 등—이 주백과 공작의 수중에서 살아남기도 했다.

그들은 앙주 Anjou, 노르망디 Normandie, 플랑드르 Flandre, 아키텐 Aquitaine 같은 새롭고 자율적인 연방 공국을 수립하기 위해 이 제도들을 활용했다.

하지만 프랑스 다른 지역에서는 카롤링거 세계와의 미미한 연속성마저 사라져버렸다.

프랑스에는 샤를마뉴 옛 영토의 서쪽 지배자로 인정받는 한 명의 왕이 아직 있었다.

그러나 987년 이후 프랑스의 왕은 더 이상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 아니었다.

새로운 카페 왕조 Capetian dynasty(프랑스어: Dynastie des Capétiens)는 바이킹에 맞서 도시를 방어한 파리 주백으로서 명성을 떨친 뒤 왕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들이 옛 왕조를 파멸로 몰고 간 요인들을 극복하고 프랑스 왕권을 새로운 기초 위에 재건하기 시작한 것은 한 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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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7.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