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4: 중세 초기의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명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3부 중세 - 7장 로마의 후예들: 비잔티움, 이슬람, 서유럽 4: 중세 초기의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명

새샘 2023. 7. 2. 23:07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7%B8%EB%A0%88%EA%B3%A0%EB%A6%AC%EC%98%A4%201%EC%84%B8)

 
서유럽의 7세기 역시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 세계를 잇는 전환기였다.
6세기 말 프랑크 왕국 Frankish Kingdom(Frankish Empire)의 연대기 작가인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Grégoire de Tours(538~594)는 자신이 도시, 교역, 과세, 지방 행정 등에서 아직 확연히 로마적인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을 비롯한 가문의 남성 인척이 타고난 권리와 지위에 따라 주교가 되어 교구 도시 및 인근 지역을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간주했다.
같은 계급에 속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리우스는 여전히 라틴어를 말하고 썼다.
물론 600년 전 키케로 Cicero가 썼던 세련된 산문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그것은 분명 라틴어였다.
키케로 시대에 비해 많이 바뀐 라틴어이긴 했지만, 제프리 초서 Geoffrey Chaucer(1343~1400)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영어가 변화된 것보다 변화의 정도가 덜한 라틴어였다.
물론 그레고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이 이제 프랑크족 Franks, 서고트족 Visigoths, 롬바드르족 Lombards 왕들의 수중에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왕들을 로마인 Romans으로 보았다.
그들은 로마 Roma(영어 Rome)를 모델로 삼아 지배했고 프랑크족은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에 있는 로마 황제의 승인을 얻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야만인 왕들이 모두 정통 가톨릭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실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흡족해했다.
그레고리우스가 볼 때 이 개종 사건은 그들의 '로마인다움'을 강화시켰고, 따라서 야만인 왕들의 지배권에 세속적·종교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0년 뒤 프랑크 지배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샤를마뉴 Charlemagne(카롤루스 대제 Carolus Magnus)가 서유럽의 새로운 로마 황제로 즉위했을 때,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지난 날 가졌던 로마 세계와의 직접적인 연속성에 대한 느낌은 사라지고 없었다.
샤를마뉴가 제국의 문화·종교·정치에 대한 개혁에 착수했을 때 그의 목표는 자기 시대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겼던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샤를마뉴는 '로마 제국의 부활'을 추구했다.
몰락한 제국을 되살리겠노라는 구호를 통해 그는 자기 시대가 로마와 '단절'되어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와 샤를마뉴의 사이 어디에선가 서유럽인과 로마의 관계가 파열되고만 것이다.
교양 있는 유럽인은 자신이 로마 제국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았지 않다고 여겼고, 따라서 로마 제국 재건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로마와의 단절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은 7세기를 거치는 동안 형성되었다.
그것은 심대한 경제적·종교적·문화적 변화의 결과였다.

그것은 서유럽 문명의 역사에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경제적 해체와 정치적 불안정

 
앞에서 봤듯이 서로마 제국의 경제는 3세기 이후로 점점 더 지방 분권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는 6세기 말까지도 상당히 통합이 잘된 경제 단위로 남아 있었다.
550년에도 단일한 금화가 로마 제국으 동서 양쪽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었다.
비단, 향신료, 칼, 보석 같은 사치품은 서쪽으로 계속 흘러들어갔고, 노예, 포도주, 곡물, 가죽제품 등은 북아프리카, 갈리아 Gaul, 에스파냐 España에서 동쪽의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시리아 등지로 여전히 운송되고 있었다.
그러나 650년에 이르러 지중해 세계의 경제적 통일성은 깨지고 말았다.
이런 분열은 부분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Justinianus의 서로마 제국 재정복 시도에 따른 파괴와 재앙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이집트·북아프리카의 농경지에 대한 가혹한 세금 징수의 결과였다.
과도한 징세에 대한 지역 농민의 분노는 이슬람이 서유럽 정복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무슬림 muslim(이슬람교도) 약탈자의 해적 행위 역시 7세기 지중해 세계의 경제를 파괴하는 데 한몫했다.
물론 무슬림은 신속하게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해상 교역자로 변신했고, 길게 보면 무슬림 정복은 지중해 상업 패턴의 파괴보다는 재건에 더 기여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일어난 7세기 경제 변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이탈리아, 갈리아, 에스파냐의 도시들은 계속 쇠퇴하고 있었다.
주교들은 여전히 도시에서 다스리고 있었고 시장에는 사치품이 어느 정도 공급되고 있긴 했지만, 서유럽의 왕과 귀족은 7세기를 거치면서 시장에서 양식을 구매하기보다는 거주지를 시골로 옮겨 가능한 한 사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살아갔다.
농경지, 특히 대규모 영지는 경작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지 소유주는 점점 독립적 성향을 드러내는 농민을 통제가히가 어려워진 것이다.
교역이 쇠퇴하자 영주의 통행로 수입도 줄었다.
로마 말기의 토지세 제도 또한 붕괴되고 있었다.
자유민인 프랑크족과 고트족이 세금 면제를 주장하면서, 로마 주민과 농민만 세금 납부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화폐제도 역시 와해되었다.
630년대 이후 시작된 이슬람 정복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금 공급량이 심각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금화는 일찌감치 대단히 품귀해져서 지방 시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지 오래였다.
660년대 이후 서유럽 지배자들은 기축 통화를 금화에서 은화로 바꾸었고, 유럽은 그 후 1천 년 동안 은화를 기축 통화로 삼았다.
 
그 결과 7세기 서유럽은 기본적으로 이중 경제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부유층 사이에서는 금·은·사치품이 통용되었지만, 농민은 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상거래의 편의를 위한 다양한 대체 통화에 의존했다.
영주는 농민에게서 식량을 제대로 거두었지만, 이렇게 납입된 곡물, 포도주, 육류 등을 7세기 귀족 사회의 위신을 드높여주던 물품인 무기, 보석, 비단 등으로 교환하기는 어려웠다.
영주의 권력이 군사적 추종자들의 위신을 높여주는 선물 제공 능력의 유무에 좌우되는 세계에서, 농민의 지대를 현금으로 전환할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결함이었다.
그것은 무기와 보석을 추종자들에게 제공하려 하는 유력자들이 이런 물품을 상인과 직인에게 구입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약탈과 공납을 통해 얻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느 쪽을 택하건 선물의 확보 과정이 불안정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7~9세기의 성공한 지배자들은, 부유하되 방어에 취약한 영지—손쉽게 공격해 많은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 영지—에 인접한 영지의 영주인 경우가 많았다.
그와 같은 '부드러운 변경'은 지배자에게 토지와 부—추종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는—를 제공해주었다.
이런 식의 성공을 거둔 영주는 추종자의 수를 늘릴 수 있었다.
추가적인 정복활동이 연이어 수행되는 한 권력과 부의 확대 과정은 계속될 것이었다.
그러나 약탈과 정복으로 획득한 권력은 근원적으로 불안정했다.
몇 차례의 패배를 당하기만 해도 그 모든 과정이 송두리째 뒤집힐 수 있었다.
 
중세 서유럽에서 권력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킨 또 다른 요인은, 중세 초기의 모든 왕조가 왕위 계승 절차를 제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5세기와 6세기의 침입 기간에 권력을 확립한 왕들은 해당 지역의 전통적인 왕실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시기에 서로마 제국을 장악한 야만인 군대는 단일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대개 다양한 종족—불만을 품은 상당수의 로마인 포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통일성이란 대부분 그들을 이끌던 카리스마적인 전사왕戰士王 Warrior King에 의해 창출된 것이었는데, 이 카리스마는 세습에 의해 전달되기 어려웠다.
 
5세기와 6세기 서로마 제국에 왕국을 수립한 야만인 집단 가운데 오직 프랑크족 Franks만이 단일 왕조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왕조에서 향후 250년 동안 프랑크족의 왕이 배출되었다.
이 왕조는 프랑크족의 위대한 전사왕 클로비스 Great Warrior King Clovis I(재위 481~511)가 확립했다.
그는 정통 가톨릭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자신의 왕조와 갈리아 Gaul의 막강한 로마 주교들 사이에 동맹관계를 수립했다.
하지만 이 왕조는 클로비스의 전설적인 조부인 '바다의 용 Sea Dragon' 메로비치 Merovech의 이름을 따서 메로빙거 왕조 Merovingian Dynasty로 알려지게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는 갈리아 안에서 왕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 아니었다.
서고트족 Visigoths의 에스파냐 España(영어: Spain), 앵글로색슨족 Anglo-Saxons의 잉글랜드 England, 롬바르드족 Lombards의 이탈리아 Italia(영어: Itlay)에서는 대립하는 왕가들이 훨씬 더 많았다.
더욱이 왕위 계승권은 왕가의 장남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중세 초기 유럽은 왕의 모든 아들(그리고 종종 왕의 사촌형제와 조카)이 왕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세계였다.
서고트족의 에스파냐에서는 왕이 죽은 뒤 이어진 피투성이의 왕위 계승 다툼이 그 지역에 거주하던 로마인을 어찌나 소름끼치게 만들었던지, 로마인은 왕위 계승 절차에 대한 통제 불능 상황을 질병—'고트족의 병 morbus Gothorum'—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갈리아의 프랑크족은 왕권 주장을 메로빙거 왕가의 후손에 국한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왕국을 여러 지역으로 분할하고 각 지역마다 다른 왕을 앉히는 메로빙거의 관행 때문에 메로빙거 갈리아는 수많은 내란을 피할 수 없었다.
 
 

○메로빙거 갈리아

 
메로빙거 왕조의 대립적인 왕들 사이에 벌어진 잔인한 투쟁은, 그들의 경쟁자이자 계승자였던 카롤링거 왕조 Carolingian Dynasty가 덮어씌운 오명과 결합해 메로빙거 왕조 지배방식의 진정한 장점과 세련된 수완을 가리기 일쑤다.
로마 말기의 지방 행정은 메로빙거 왕조 시기에 대부분 살아남아 있었다.
문자 해독능력은 메로빙거 행정의 중요한 요소였고 카롤링거 왕조는 메로빙거 왕조가 남겨준 기반 위에 건설되었다.
샤를마뉴 치세와 관련된 문화적 르네상스가 7세기 말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면 뤼세이유 Luseille 등지의 메로빙거 수도원에서는 성경을 비롯한 호화스러운 필사본들이 제작되고 있었다.
 
수도원은 메로빙거 왕조 시대—특히 7세기—에 현저히 늘어났는데, 그것은 이 나라가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보여준다.
700년 무렵 갈리아에 분포했던 약 550개의 수도원 가운데 300개 이상이 7세기의 100년 동안 건립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주교 관구 또한 메로빙거 왕조에서 번영을 누렸는데, 그들이 소유한 전체 토지의 4분의 3가량은 7세기 말에 획득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대대적인 부의 재편성은 프랑크 왕국의 경제적 무게 중심에 근본적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600년경 갈리아의 부는 로마 말기의 전 시기를 통해 항상 그랬듯이 여전히 남부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750년에 이르러 왕국의 경제 중심은 루아르 강 Loire River 이북 라인란트 Rheinland에서부터 서쪽으로 북해 North Sea까지 뻗어 있는 영토에 놓여 있었다.
7세기에 갈리아에 건립된 새로운 수도원은 대부분 그곳에서 기반을 잡았다.
 
이 같은 남부에서 북부로의 부의 이동 배후에는, 북부 프랑스 France의 비옥한 점토질 토양을 경작하기 위한 길고도 성공적인 노력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런 노력은 무겁고 바퀴 달린 쟁기—풀로 덮힌 대지를 파 들어가고 무거운 진흙을 뒤집을 수 있는의 발전에 의해, 그리고 이 쟁기를 끌 가축(주로 소였지만 대로는 말도 이용되었다)을 부리는 데 도움을 주는 편리한 각종 마구에 의해 가능했다.
점차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습한 북부 토지의 비옥도가 향상되었고, 작물의 생장기간이 늘어나 좀 더 효율적인 윤작 체계가 가능해졌다.
식량이 풍부해지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북부 프랑스는 여전히 울창한 숲에 의해 분리된 채 띄엄띄엄 섬처럼 흩어진 거주지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750년에는 600년에 비해 인구가 한층 더 조밀한 지역이 되었다.
이런 모든 발전은 카롤링거 시대와 그 다음 시대까지 계속될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가 북부에서의 이런 농업 번영의 결실을 향유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발전 과정은 앞선 시대인 7세기의 메로빙거 왕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수도원 제도와 개종

 
중대한 발전은 7세기의 종교생활, 특히 수도원에서 나타났다.
7세기에 그리스도교 유럽 전 지역에 걸쳐 수도원 건립이 급격히 늘어났다.
수도원은 4세기 이래 갈리아,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지에 산재했지만, 대부분은 남부 에스파냐, 갈리아, 북부 이탈리아 등 로마화가 고도로 진행된 도시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갈리아—이 지역의 메로빙거 왕들은 가톨릭을 신봉했다—에서는 이미 6세기부터 왕들이 수도원과의 결합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이탈리아, 잉글랜드 등처럼 지배자가 과거 아리우스 이단 Arian Heresy이었거나(에스파냐, 이탈리아) 또는 이교도였던(잉글랜드) 지역에서, 수도원과 왕국의 결합은 이들 지역의 왕조가 가톨릭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7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갈리아의 메로빙거 왕들과 프랑크 왕국 수도원 사이의 관계는, 왕실과 주요 귀족 가문이 대대적인 수도원 건립 운동—그것은 서유럽의 정신적 지형을 영구히 바꾸어놓았다—을 벌이기 시작한 6세기 말에 이르러 대단히 밀접해졌다.
 
7세기에 건립된 새로운 수도원은 대개 의도적으로 시골에 자리를 잡았고, 수도원은 해당 지역을 그리스도교화하기 위한 지속적 투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종 수도원들은 면책특권 immunity으로 알려진 특전을 허락받았다.
그 덕분에 수도원은 지방 주교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설립자에게만 종속되었다.
이 새로운 시설은 이중 수도원 double monasteries—남성 수도원과 여성 수도원이 함께 있다—이거나 여성 수도자만을 위한 수녀원 convents인 경우가 많았다.
어느 쪽이든 수도원은 대체로 왕실 여성—왕의 미망인, 왕녀, 때로은 현재의 왕비— 가운데서 발탁된 수녀원장 abbess에 의해 통솔되었다.
 
수도생활은 중세 초기 왕실 및 귀족 여성에게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
수도원은 그녀들에게 사회적으로 공인된 영역을 제공해주었다.

그녀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영향력—수도원 바깥에서는 거부되었던—을 상당한 정도 행사할 수 있었다.

수도원은 그녀들에게 사회적으로 명예로운 지위를 부여했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자기 가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한 유괴나 강간 또는 가문의 외교적·왕조적 이해관계 증진 명목으로 추진되는 강제 결혼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수도생활을 또한 수도원 바깥세상에서는 구원의 가망이 지극히 위태롭고 불확실하게 여겨졌던 시기에 구원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수도원이나 이중 수도원은 왕실 남성에게도 유리한 것이었다.

그들이 수도원을 건립하고 지원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수녀원은 왕의 미망인같이 성가신 잠재적 여성 권력자를 은퇴시키기에 적합한 위엄 있는 장소였다.

성스러운 여성의 기도는 왕국을 위한 신의 가호를 얻어내는 데 각별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출산 가능한 왕실 여성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수녀원은 잠재적 왕위 주창자의 수를 줄이는 데도 기여했다.

그러므로 왕실 여성의 수녀원 배치는 중세 초기 왕국들을 분열시키곤 했던 왕위 계승 다툼을 완화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새로운 수도원 중 상당수는 7세기의 세계를 특징지었던 활발한 선교활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도원 선교활동의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개종이다.

북부 잉글랜드의 그리스도교화 사업은 아일랜드 Ireland에서 건너온 수도사들의 주도로 6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은 597년에 왔다.

그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Pope Gregorius I(영어: Gregory I)가 파송派送(파견: 일정한 임무를 주어 사람을 보냄)하고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Saint Augustinus(영어: Augustine) of Canterbury(4~5세기에 주교이자 신학자인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Saint Augustinus of Hippo)와 혼동하지 말 것)가 이끈 40명의 베네딕투스 수도사 Benedictine monk들은 로마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잉글랜드 동남부의 켄트 왕국 Kingdom of Kent(455~871)에 도입했다.

초기 단계에서 약간의 차질이 있었지만, 7세기 말에 이르러 잉글랜드 전 지역이 로마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잉글랜드 수도사들은 프리슬란트 Friesland와 작센 Sachsen(영어: Saxony)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프랑크 왕국의 선교사들 또한 이들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그들은 저지대 지방과 서남쪽의 바스크 Basque 지역에서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교황과 갈리아의 입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잉글랜드 수도사들이 교황에 대해 각별한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로마 교황과 베네딕투스 수도회 사이의 새로운 동맹을 주도한 인물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Pope Gregorius I(재위 590~604)—그레고리우스 대교황 Gregorius Magnus—였다.

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교황들은 대체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및 동방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위세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과의 단절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자율적이고 서유럽 지향적인 라틴 교회를 창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신학자—위대한 라틴 교부敎父(가톨릭 고위 성직자) 가운데 네 번째 서열에 놓인다로서 그는 전대의 교부인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와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그리고 특히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of Hippo의 신학적 업적을 바탕으로 서유럽적인 특징이 묻어나는 독자적 신학 체계를 수립했다.

그의 신학은 죄 사함을 위한 고해와, 영혼이 천국에 이르기 전 정화되는 장소로서 연옥의 관념을 강조했다(서유럽인의 연옥에 대한 믿음은 그 후 동서 교회간에 중요한 교리상의 차이가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주교의 평신도에 대한 목회적 보살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주제와 관련해 간소한 라틴어 산문으로 작성된 영향력이 매우 큰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중세 초기에 가장 널리 활용된 주요 서적 중 하나였다.

그레고리우스가 작곡했다 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로 알려진 무반주 성악으로 부르는 힘찬 라틴 기도문 성가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 성가의 작곡 과정에서 그레고리우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며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모든 혁신은 서유럽 그리스도교를 그리스어 사용 동유럽으로부터 종교적·문화적으로 독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레고리우스는 또한 선대의 로마 교황드을 빼닮은 정치가이자 통치자였다.

이탈리아 안에서 그는 교황 영지 및 세입의 노련한 운영과 기민한 외교적 수단을 통해 교황권을 야만인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냈다.

그는 비잔티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서유럽 교회 주교들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베네틱투스 수도회를 후원했다.

그레고리우스의 후원으로 성 베네딕투스 계율은 서유럽의 대표적인 수도원 계율이 되었고, 베네딕투스 수도사는 중세 초기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선교집단으로 떠올랐다.

베네딕투스 선교사인 잉글랜드인 성 보니파티우스 Saint Bonifatius(영어: Boniface)(675 무렵~754)와 성 윌리브로드 Saint Willibrord(658 무렵~739)는 각별히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프리지아 Frisia(현 네델란드의 북쪽과 독일의 북서쪽 해변 지역)와 독일 Germany에서의 그들의 선교활동으로 두 지역이 서유럽 가톨릭교회의 품 안에 들어갔고, 그것은 앞으로 중세 초기 유럽을 변화시키게 될 교황과 프랑크 왕국 간 동맹의 기초가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생전에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이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서유럽 교회의 활력을 북돋운 그의 정책은 그 동맹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3. 7. 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