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두 병동의 비밀 - 산후열 본문
산모가 아기를 낳고 몸조리하는 10일 정도의 기간을 산후기産後期라 하고, 이 기간 동안 산모에게서 나는 열을 산후열産後熱(산욕열産褥熱) puerperal fever이라 한다.
산후열은 보통 출산 직후 나타나며, 며칠 동안 투병하느라 몸이 약해진 산모들이 가족 품에서 죽음을 맞기도 했다.
1800년대 초 산후열로 인한 산모 5명 중 1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공포의 질환이었다.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Ignaz Semmelweis(1818~1865)는 20세 때부터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병원 Allgemeines Krankenhaus der Stadt Wien 산부인과 의사로 일했다.
빈 대학병원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병원이라 제멜바이스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마친 넘쳐나는 산모로 병원에서는 산부인과 병동을 두 개로 확장했다.
그러자 출산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산후열로 사망하는 산모도 늘어났다.
산후열의 원인을 모르기는 의사도 일반인과 다를 것 없던 시절이었다.
의사들은 좀 더 유식하게 무식을 드러냈을 뿐이다.
많은 의학자들은 나쁜 공기가 산후열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공기를 뜻하는 라틴어를 따서 '미아스마 miasma' 이론이라고도 했다.
산모가 출산하러 수술실에 들어가면 애타는 가족들은 공기 정화를 위해 병원 근처에 연기를 피우기도 했다.
그 때문에 공기는 더 탁해졌을 것이다.
산후열의 원인을 찾던 제멜바이스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산부인과 병동 두 곳 중 제1병동의 산모 사망률이 제2병동에 비해 3배 이상 높았다.
사람들은 이를 '제1병동의 저주'라 일컬었다.
그런 까닭에 제1병동에 배치를 받은 산모와 가족들은 무릎을 꿇고 제2병동으로 보내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쁜 공기가 원인이라면 두 병동의 사망률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제멜바이스는 야콥 콜레츠카 Jakob Kolletschka라는 동료 의사가 산후열과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콜레츠카는 사망하기 며칠 전 산후열로 사망한 산모를 부검하다 수술용 칼에 손을 베인 적이 있었다.
제멜바이스는 산후열 산모의 사체로부터 산후열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콜레츠카에게 이동했다고 생각해 그것을 '시체 입자 cadaverous particles'라고 불렀다.
을씨년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1500년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의사인 프라카스토로 Girolamo Fracastoro가 '질병의 씨앗'이라 불렀던 병원체가 300년 만에 '시체 입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의학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제멜바이스는 산부인과 두 병동의 3년 동안의 사먕률 차이를 조사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조산사들이 관리한 제2병동의 산모 사망률이 2%였는데 반해 의사들이 맡었던 제1병동의 사망률은 무려 16%나 되었다.
제멜바이스는 고민에 빠졌다.
"두 병동의 차이점이 뭘까?"
오랜 고민 끝에 그가 생각해낸 두 병동 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제2병동 조산사들은 사체 부검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의사들은 산후열로 사망한 환자를 부검하다 그대로 장갑을 낀 채 다른 산모의 아이를 받았는데, 제멜바이스는 그 과정에서 부검 환자에게서 나온 시체 입자가 의사를 통해 출산하는 산모에게 옮겨진다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결론에 이르렀을 때 제멜바이스가 느꼈던 감정은 경악과 공포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수많은 산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살인범을 찾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범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제멜바이스의 심리적인 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을까?
제멜바이스는 의사들이 산모를 진료하기 전에 반드시 염소 소독액으로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방침에 따르는 제1병동 의사들이 늘어나면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1년 뒤 통계를 내보니 20%에 가깝던 산후열의 발생이 1%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수적인 의사들은 제멜바이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사가 시체 입자를 전해주어 산모가 죽다니, 그럼 우리가 산모들을 죽였다는 건가?"
예상한 반응이었다.
제멜바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병원 고위직 의사들은 그를 병원에서 쫓아냈고, 자연스럽게 종합병원의 손 씻는 규칙은 사라졌다.
제멜바이스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1860년 자신의 주장을 나름대로 정리해 책으로 펴냈는데 의료계는 비난보다 무서운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제멜바이스가 다소 산만하게 의견을 펼친 탓에 그의 주장이 동료 의사들에게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제멜바이스는 평생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권위 있는 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제메바이스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자신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살인자'라고 맹렬히 소리쳐 비난했으며, 갑자기 의사들의 회의장에 나타나 자신의 주장의 주장을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그의 이상한 행동을 본 연구자들은 다양한 정신 질환을 의심했지만, 그것들의 근본 원인은 자신과 다른 의사들에 의해 산후열로 의미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산모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1865년 어느 날, 제멜바이스는 다시 빈으로 복귀했다.
의사가 아닌 정신병원 환자로 말이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2주를 못 버티고 손의 상처에게 시작된 감염증으로 사망했다.
산후열이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2. 22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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