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숭례문 현판 본문
"사람들은 양녕대군 글씨로 믿고 싶어 했다"
한양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은 1396년(태조 5)에 한양 성곽 건설과 함께 창건되어 1447년(세종 29)과 1479년(성종 10)에 고쳐 지은 것이다.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문화재청장직에서 사임한 필자로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화재의 와중에 현판을 구해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길이 문루로 번지기 시작하자 한 사려 깊은 소방관이 현판의 대못을 뽑아내고 바닥으로 떨어뜨려 놓았고, 이것을 당시 문화재청 직원이던 강임산 씨가 밖으로 끌어내 살린 것이다.
당시 네티즌 가운데는 현판을 마구 다루어 떨어뜨렸다며 불만을 표한 이도 있었지만 현판은 길이 3.5미터, 폭 1.5미터에 무게가 자그마치 150킬로그램이나 된다.
끌어내온 현판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데 경찰이 10여 명이나 동원되었다.
멀리서 올려다보기만 했기 때문에 그 크기를 잘 몰랐던 것이다.
숭례문 현판 글씨는 참으로 장대하다.
한 획의 길이가 1미터나 되는 것도 있다.
과연 당대의 명필이 쓴 정중하면서도 품위 있는 글씨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떻게 이렇게 큰 글씨가 균형을 잘 갖추고 획마다 붓 맛이 역력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큰 글씨를 어떤 붓으로 어떻게 썼을까 궁금해진다.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보면 대동강 부벽루 현판을 쓴 평양의 명필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이 대자大字(큰 글자)를 쓸 때면 절굿공이만 한 붓대에 큰 새끼를 동여매어 이를 어깨에 걸어 메고는 쟁기를 갈듯 큰 걸음으로 걸어 다니며 썼다고 한다.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이 육군사관학교 간판인 '화랑대'를 쓸 때는 먹을 잔뜩 갈아 대야에 듬뿍 담아놓고 썼다고 한다.
모두 허투루 말하는 과장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확실치 않다.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 신장申檣(1382~1433), 정난종鄭蘭宗(1433~1489), 유진동柳辰仝(1497~1561)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각 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세종대왕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1614),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이렇게 전한다.
"한양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는 남대문이라 부른다."
그래서 "글씨의 장려하고 빼어남은 양녕대군의 사람담을 상상하게 한다"는 전설까지 생겼다.
이 이야기는 고종(재위 1864~1907) 때 간행된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 일반적으로 조선 말기까지 양녕대군의 글씨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일찍부터 학자들은 양녕대군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왔다.
백과전서라고 할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편액은 세상에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하지만 사실은 정난종이 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완당전집≫ 제7권에서 무슨 근거로 그랬는지 신장의 글씨라고 말했다.
신장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신숙주의 아버지이다.
"숭례문 편액은 곧 신장의 글씨로 깊이 뼛속까지 치고 들어갔고 ······:
그런데 조선 후기 학자 정동유鄭東愈가 쓴 백과사전 ≪주영편晝永編≫(1805~1806)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1871 탈고)에는 현판을 유진동이 썼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설득력이 있었는지 일제강점기 잡지인 ≪별건곤別乾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 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는 글이 실려 있다.
숭례문 현판은 유진동이 썼다는 주장은 일찍이 남태응南泰膺(1687~1740)이 ≪청죽만록聽竹漫錄≫에서 증언한 것임이 훗날 밝혀졌다.
"숭례문 글씨는 신장 또는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전해왔는데 숙종 때 문을 수리하다 보니 대들보에 유진동의 글씨라고 적혀 있어 이제까지 구전으로 전한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각 설이 분분하기 때문에 학자들도 어느 설이 맞다고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러 설을 종합하여 본래는 양녕대군 글씨였던 것을 중건하면서 유진동 글씨로 교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 그리고 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역시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것이다.
특히 전주이씨 양녕대군과 후손들은 크게 번성하여 조선시대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명사가 나와 지금도 장관, 국회의원 중에 그 후손이 여럿 있다.
후손들은 숭례문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현판 탁본을 가보로 삼고 있다.
대문에 걸려 있는 이 거대한 현판을 탁본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으리라.
150여 년 전,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李承輔(1814~1881)는 경복궁 영건도감의 제조를 맡았을 때 그 일을 기회로 삼아 숭례문 현판을 탁본해두었다.
지금도 서울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 묘소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 보관되어 있다.
숭례문 현판을 복원할 때 지덕사 탁본은 큰 도움이 되었다.
기존에 있던 숭례문 현판은 1960년대 보수할 때 호분, 석간주 등 안료를 칠하면서 글자 획 끝이 뭉개져버려 글씨의 묘미를 상실했는데, 이 탁본 덕분에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현판 복원 작업에는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 오옥진과 단청장丹靑匠 홍창원이 참여했다.
우리 시대의 기술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전보다 아름다운 현판을 걸게 되었다.
아울러 숭례문에 대한 상식을 덧붙여둔다.
서울 남대문의 이름을 숭례문이라 한 것은 유교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일컫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에 근거한 것이다.
이를 오행의 방위에 맞추어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북쪽은 홍지문弘智門, 동쪽은 흥인문興仁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이 되었고, 서울 한가운데에 종각을 세우면서 보신각普信閣이라 했다.
이때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지문興仁之門 네 글자로 했는데, 풍수상으로 볼 때 서울의 동쪽이 서쪽 인왕산에 비해 약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옹성을 두르고 이름도 보강한 것이다.
숭례문은 오행으로 볼 때 남쪽이 '화火'에 해당하며 서울의 풍수상 관악산이 '화火'의 성격에 강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 현판을 다른 대문과 달리 세로로 세웠다.
이번에 복구된 숭례문은 크게 두 가지가 달라졌다.
하나는 성곽 일부가 복원된 점이다.
종래엔 숭례문이 섬처럼 동떨어져 있어 한양도성 남대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이번 복원에서 숭례문 동쪽에 53미터, 서쪽에 16미터 구간의 성곽이 복원됨으로써 비로소 성곽의 대문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숭례문이 원래의 바닥을 다시 찾았다는 점이다.
서울의 현재 지반은 한양 천도 또는 흥선대원군 경복궁 복원 당시에 비해 30~50센티미터 정도 높아져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흙이 쌓여 지반이 높아졌는데 이런 상태에서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현재의 지표가 되었다.
그런데 숭례문 복원 때 500여 년 동안 대문을 지나다닌 사람들의 발자국에 닳고 닳아 반들거리는 바닥돌이 나왔다.
그야말로 역사를 간직한 유물이었다.
이 바닥돌에 맞춰 숭례문의 지반 높이를 낮추었다.
이렇게 원 모습에 많이 가까워진 숭례문을 보면서 다시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기를 비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구글 관련 자료
2024. 12. 24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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