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그들은 왜 유물을 위조했는가 본문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역사의 위조
무엇인가를 발굴해서 새로운 사실을 통해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역사의 위조로 이어졌다.
사실 위조라는 주제만으로 몇백 권의 책을 내도 될 정도로 그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
위조의 장본인들은 때로는 재미로, 때로는 명예욕으로 역사를 위조한다.
하지만 위조는 고고학 연구를 파괴하는 행위다.
대표적인 예는 인류의 기원과 관련된 사기극인 필트다운인 Piltdown Man 위조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12년 찰스 도슨 Charles Dawson이 조작한 사람뼈(인골人骨)를 영국 필트다운 지역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해 이후 40여 년 동안 주요한 고고학적 발굴로 남아 있었던 대표적인 유물 조작사건이다.
영국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찰스 도슨이 집 근처에서 사람뼈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당시에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의견에 동조했고, 이는 곧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필트다운인 사건은 마치 찰스 도슨의 개인적인 공명심이 원인이라는 식으로만 치부된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근본적인 원인에는 영국이 세계 제일이라는 영국 중심적 사고가 깔려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에 서양 각국은 경쟁했다.
가장 앞서간 나라는 독일이었다.
약 50만 년 전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해골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Heidelberg에서 발견되었고, 현생인류가 등장하기 바로 직전까지 살았던 유명한 사람뼈 역시 네안데르탈 계곡[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s(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Homo neanderthalensis)으로 명명]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사람뼈 대신에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와 다양한 석기들을 연구함으로써 태곳적 인류의 연구에서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유독 영국에서는 그런 발견이 나오지 않았으니, 영국 신사의 자존심이 상할 만했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사람의 머리뼈(두개골)에 오랑우탄 orangutan의 턱을 조합하는 식으로 조작한 필트다운인 유골이었다.
턱은 진화가 덜 되었지만 머리뼈는 현생인류와 비슷한 규모의 지능을 가진 것으로 조작된 인류의 기원이 영국에서 발견된 것이다.
영국에서 살던 고인류는 비록 원시시대라고 해도 지능이 높다는 뜻이니, 필트다운인은 영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상징이 되었다.
이후 필트다운인은 여러 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30여 년 동안 영국을 대표하는 고인류로 자리 잡았고, 심지어는 '첫 번째 영국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영국의 위대한 조상 역할을 했다.
필트다운인의 발견 직후 수많은 비판에 직면한 찰스 도슨은 그 주변에서 두 번째 필트다운인을 발견해서 그 논란을 잠재우고자 했다.
그런데 이후 계속되는 다른 사람뼈의 발굴 결과 필트다운인이 인류의 진화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고 1950년대가 되어서 이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지금도 그 주범에 대해서 많은 설왕설래가 있다.
당시 찰스 도슨과 같이 활동하던 고고학 동호회 회원 가운데는 영국의 유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스 도슨의 조작이 밝혀진 당시는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후였기 때문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연루되었는지 밝히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찰스 도슨의 단독 범행이라는 식으로 결론이 난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도 찰스 도슨과 함께 고고학 동호회 활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의혹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찰스 도슨이 단독으로 이 모든 일을 하기에는 무리다.
위조한 사람뼈가 40여 년 동안 진품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려면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고인류학, 지질학 등의 지식을 동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코난 도일 Conan Doyle과 테이야르 샤르댕 Teilhard Chardin 같은 유명한 신부가 옆에서 그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이들 유명인사들이 설사 직접 위조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떠한 형태의 머리뼈를 가진 인류가 나와야 하는지를 토론했을 것이다.
그러한 조작 시나리오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주었음은 분명할 테니 그들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지금 고고학자들의 판단이다.
여하튼 관련자 모두 세상을 떠난 후이니 진실도 같이 묻혀 버렸다.
또 다른 구석기 유물 위조사건은 얼마 전에 일본에서 일어났다.
1990년대에 세상을 뒤흔든 발굴로 유명했던 일본 구석기 연구자 후지무라 신이치(등촌신일藤村新一)가 벌인 사건이다.
필트다운인과 달리 후지무라는 적어도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유물을 위조했다.
후지무라가 새로운 유물을 '발견'할 때마다 전 일본은 열광했고 교과서에서는 일본 역사의 시작 부분을 매번 개정했다.
후지무라는 1972년에 고졸의 학력으로 고고학적 배경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구석기 연구에 입문했다.
1980년대 후지무라는 3만 년 내외에 불과했던 구석기시대의 역사를 바꾸는 발견을 매년 해냈다.
해마다 이어진 후지무라의 발굴로 그의 조작이 폭로되기 전까지 일본의 구석기시대는 70만 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구석기시대는 인류 역사의 거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시기로 인류가 세상 각지에서 정착하고 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대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유물이라고는 얼마 안 되는 사람뼈를 제외하면 대부분 뗀석기뿐이다.
대체로 150만 년 전에 아프리카 Africa를 탈출한 곧선사람(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이 각지에서 정착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 곧선사람에서 시작하여 약 30만 년 전까지를 전기 구석기라고 한다.
다음으로 30만~5만 년 전은 중기 구석기가 되고 5만 년 전부터 빙하기가 끝나기 시작하는 1만 2000년 전까지를 후기 구석기라고 한다.
워낙 남아 있는 유물이 적고 대상으로 하는 시간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의 논쟁도 많은 시대이다.
예컨대 남한에서 가장 빠른 구석기시대로 꼽히는 연천 전곡리의 주먹도끼 유적도 학자에 따라서 5만 년 전 설에서 20만 년 전 설을 주장할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니 구석기 유적이 하나 나오고 그 연대를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는 몇십 년의 토론이 필요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3만 년 전밖에 안 되었던 일본 구석기시대가 후지무라 신이치가 등장하고 10년 사이에 70만 년 전으로 바뀌었으니, 이것은 가히 구석기시대 연구에서 세계 신기록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유물 조작이 발각되지 않았으면 지금쯤 일본이 세계 인류의 발상지가 되었을 거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일반적인 고고학자라면 평생 한 번 이루기도 어려운 발견을 후지무라는 해마다 일구어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족족 위대한 발견이 나오니 동료 고고학자들은 그를 '신의 손 God's hand'이라고 불렀다.
사실 후지무라가 이렇게 장기간 어처구니없는 위조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침묵했던 주변 고고학자들에게도 원인이 있었다.
물론 일부 고고학자들은 그가 발견한 석기는 1만 년 전에 일본에서 시작된 신석기시대 죠몽(승문繩文)시대의 것과 비슷하다는 언급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고고학계는 침묵했다.
설사 해마다 새로운 유적을 발견했다고 해도 각 유적이 그 연대를 인정받으려면 토론과 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구석기는 유물 자체보다는 그 유물의 지질학적 특징과 발굴 정황에 대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또한 석기는 몇십만 년에 걸쳐서 천천히 그 제작기술이 발달했다.
그래서 몇십만 년 전의 석기를 위조하려면 당시의 석기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그 제작기술을 복원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위조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후지무라가 직접 만들거나 후대의 석기를 가져와서 몰래 파묻는 식으로 어설프게 조작을 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면 오히려 일본 구석기 연구의 수준을 의심해야 할 상황이다.
어쩌면 후지무라의 발견에 의문이 들었다고 해도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면 사회와 학계에서 지탄을 받을까 두려웠을 수도 있다.
후지무라의 조작은 단순히 한 고고학자의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들의 역사를 무조건 올리려고 하는 일본의 쇼비니즘적 chauvinism(광신적인 애국주의나 국수적인 이기주의) 시각과 야합한 결과이다.
후지무라가 유물을 파묻다 발각된 카미타카모리(상고삼上高森) 유적은 사실 후지무라가 구덩이에 자기가 만든 석기 몇 개를 파묻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후지무라에 의해 이 석기는 70만 년 전의 구석기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던 유물로 변했다.
이 말이 맞다면 세계 최초의 제사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뜻이다.
세계 문명의 기원이 일본이며,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신토이즘 Shintoism)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종교라는, 극우세력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얘기였다.
후지무라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는 곧 바로 극우 성향의 교과서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니시오 간지(서미간이西尾幹二) 회장이 쓴 교과서 ≪국민의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이 교과서에서는 후지무라가 발견한 유적을 첫머리에 내세우며 "이집트 Egypt와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라는 여러 황당한 망언의 기반으로 활용했다.
극우세력의 준동에 후지무라의 위조가 동원되었지만 일본의 고고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암묵적인 동조를 했다.
극우 사관이라는 독버섯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서 후지무라의 위조는 더욱 활개를 칠 수밖에 없었다.
후지무라의 석기 위조가 폭로된 1999년 11월 5일에도 발굴장 근처에는 세계의 구석기 연구자들이 학술대회 참석을 위해 모여 있었다.
후지무라는 세계의 학자들을 불러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조작한 유적을 널리 알리려던 참이었다.
후지무라의 조작을 폭로한 것은 구석기를 가장 잘 아는 동료학자가 아니었다.
심층취재를 하던 마이니치(매일每日) 신문사의 기자였다.
후지무라의 발견에 의심을 품었던 기자가 몰래카메라를 설치해서 그가 유물을 파묻는 장면을 촬영했다.
결국 후지무라 조작사건은 후지무라 혼자 저지른 것으로 결론이 났으며, 그가 조사한 모든 유적은 위조라는 고고학계의 최종 조사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일본 특유의 꼬리자르기식 일처리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후지무리를 제외한 어떤 학자들도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지무라의 유물 조작의 여파는 다른 고고학자들에게도 미쳤다.
카가와 미츠오(하천광부賀川光夫) 벳푸(별부別府) 대학교 교수는 자신이 발굴한 구석기 유적인 히지리타키(성랑聖滝/聖瀧) 동굴의 유물도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어떤 기자의 기사에 항의하는 뜻으로 자살을 택했다.
실제로 카가와가 유적을 조사한 때는 조사방법이 발달하지 않은 1960년대였기 때문에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섞여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물론 몇 년 뒤에 카가와의 조사는 조작이 아니라 단순 실수였음이 밝혀졌다.
후지무라 사건이 가져온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후지무라가 절망의 나락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을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후지무라는 고고학계에서 퇴출되기는 했지만, 직장에서 자진사직을 한 경우라서 여전히 연금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혼 후 재혼을 해서 아내의 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정신병을 이유로 당시의 모든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추가적인 진실 규명도 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그는 그가 활동했던 도호쿠 지역에서 여전히 평온하게 살고 있다.
○종교에 대한 신념이 빚어낸 위조
1950년대 고고학계에 도입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은 몇백 년 논란을 끌어온 과거 유물들에 대한 과학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했다.
그 와중에 전통적으로 보물로 생각하는 유물들의 진위를 가리는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몇백 년 동안 유럽에서 예수가 사망한 뒤에 그 시신을 감쌌다고 믿어져 온 '토리노의 수의 Sindone di Torino(영어 Shroud of Turin)' 사건이 있다.
길이 4.5미터, 폭 1.1미터의 아마포(리넨 linen)로 만든 이 수의에는 한 남자가 손을 모으고 누워 있는 형상이 나타나 있다.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 번은 보았을 법한 유명한 유물이다.
14세기에 프랑스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이후 1694년부터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Turin Cathedral에 소장되어서 '토리노의 수의'라고 불린다.
<요한복음> 20장 6~7절에 따르면, 예수 Jejus의 제자였던 시몬 베드로 Simon Peter(Saint Peter)(?~서기 64?)가 예수를 장례 지내고 며칠 뒤 무덤으로 가보니 시신은 사라지고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와 머리 두건만 남아 있었다고 되어 있다.
즉, 시신이 사라진 아마포는 예수 최후의 만찬에 쓰였던 성배와 함께 예수 부활의 상징이 되는 최고의 성물이 된다.
하지만 실제 이 아마포가 등장한 것은 14세기 이후이며, 때문에 진품에 대한 논란은 줄곧 계속되어 왔다.
1988년,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토리노 대성당과 고고학자들은 이 옷에서 표본을 떼어내 연대를 측정하는 과제를 시작했다.
토리노 대성당에서는 우표 크기의 작은 천 조각을 떼어내서 그것을 동등하게 세 조각으로 나누어 옥스퍼드 Oxford, 애리조나 Arizona, 취리히 Zurich 등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실험실로 보냈다.
그리고 결과에 실험자의 주관이 들어갔을 가능성을 막기 위해 표본 정체를 실험자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또한 그 결과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연대가 분명한 다른 표본들도 같이 분석했다.
이 표본들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11~12세기의 이집트 Egypt 지역에서 출토된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미라의 아마포, 그리고 1300년대 프랑스 France에서 썼던 외투의 조각들이었다.
만에 하나 측정방법에 문제가 있다면 같이 측정한 다른 표본들의 연대도 다르게 나올 것이었다.
이렇게 교차분석을 한 결과, 세 실험실에서 모두 '토리노의 수의'의 제작연도가 1260~1390년인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같이 분석한 서로 다른 시기의 표본도 실제 연대와 거의 똑같이 나왔다.
결과가 정확하다는 사실이 검증된 셈이다.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사실 죽은 사람을 아마포로 감쌌을 때에 겉면에 사람의 형체가 나온다는 것 자체부터가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약 시신을 감싼 천에 마치 스탬프를 찍은 것처럼 죽은 사람의 형체가 나타난다면 왜 이제까지 근동 지역에서 발견된 수많은 아마포에서는 비슷한 예가 단 하나도 없었을까.
설사 자연적인 현상으로 시신의 형상이 찍혀 있다고 해도 그것은 2000년 동안 전혀 손상 없이 보존되기는 지극히 어렵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에서는 근동 지역에서 가져온 이국적인 물건들로 넘쳐났고, 그들 중에는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과 엮여 그럴듯하게 포장되어서 팔리거나 전시된 예가 무척 많았다.
토리노의 수의가 등장한 배경에는 신도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보고 믿을 수 있는 성물이 필요했던 시대적인 상황이 있다.
9~11세기에 현재의 프랑스 France와 독일 Germany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프랑크 왕국 Francia(또는 Kingdom of the Franks)의 카롤루스 왕조 Carolingian dynasty는 알프스 Alps 북쪽에도 기독교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성인의 유골(성유골聖遺骨)을 교회에 두고 지역주민들의 신앙을 다지게 했다.
카롤루스 왕조는 2번째 왕인 카롤루스 1세 Carolus I(샤를마뉴 대제 Carolus Magnus)(재위 768~814) 때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카롤루스 왕조는 알프스 북쪽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카롤루스 1세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북쪽 지역의 사람들도 신심을 제대로 갖도록 성인의 유골에 서약하는 관습을 모든 교회에 적용했다.
카롤루스 1세의 속셈은 상대적으로 기독교의 전통이 약한 카롤루스 왕조가 서로마제국을 대신하면서 그와 라이벌 격이 되는 동로마제국이나 유럽과 당당히 맞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성인의 유골이 기적을 행하고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여겼던 민간인들의 믿음을 이용했던 것이다.
성유골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 강해지며 10세기 이후에는 상황이 엉뚱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유럽 수도원의 권위가 상실되면서 수도원이 유지되려면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아이템, 즉 성인의 유골을 소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성인의 유골이라는 것이 어디 가지고 싶다고 쉽게 얻어지는 것인가.
그래서 경쟁 교회에서 성유골을 훔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말 그대로 해골 쟁탈전이었다.
그리고 공동묘지에서 파거나 경로가 불분명한 많은 해골들이 등장해서 성인의 유골로 둔갑하기도 했다.
토리노의 수의는 이런 중세시대를 거쳐서 12세기 십자군 원정이 일어난 때에 등장했다.
십자군을 통해 근동 지역에서 새롭게 엄청난 양의, 성유골이라 칭해지는 해골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설화와 관련된 수많은 유물들이 유입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위도 불분명한 해골에 관심을 잃기 시작했다.
토리노의 수의는 새로운 믿음의 징표가 필요한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론은 존재한다.
또 다른 연구는 분석한 부분이 중세시대 이래로 계속 덧대어 기운 부분이라며, 실제 연대는 1300~3300년이라고 주장했다.
탄소연대의 오차는 보통 100년 이내이다.
그런데 이 연대 측정치의 연대폭은 2000년이니 고고학적으로 볼 때 사실상 이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
이 결과에 동의하지 않고 다소 유물의 손상을 감내할 수 있다면 안료나 직물 성분 등의 검사 과정을 거칠 수도 있다.
하지만 가톨릭 쪽에서는 하나하나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고 결론 내렸다.
2013년 3월, 토리노 수의를 친견한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co(영어 Pope Francis)은 "이 수의의 사람은 우리를 나사렛 예수 Jesus of Nazareth에게 다가가도록 초대한다"라고 이 수의의 의미에 대해 말했다.
애초에 이 유물은 사람들의 믿음을 더 깊게 하기 위해 등장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 수의를 보면서 믿음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성물로서의 의의를 충분히 달성했다는 뜻이다.
긍정도 부정도 않는 절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고고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수의가 믿기 어렵다는 것은 충분히 알 것이다.
○국보 제274호가 영구 결번된 이유
전쟁터란 양쪽의 군대가 뒤섞여서 싸우는 곳이다.
예컨대 남해안 일대에서 활약했던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의 전적을 찾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그곳에서 실제 유물을 찾아내기도 어려우며 적이었던 일본군의 유물이 나올 가능성도 크지 않다.
일본 수군의 유물이 나온다고 해도 감추거나 한국의 것으로 주장할 필요는 없다.
또한 조선 수군의 유물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임진왜란 때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수많은 검증과 연구가 필요하다.
단번에 찾고 싶은 것을 찾는 고고학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과욕을 부리다가 위조의 유혹에 빠져서 범법자가 된 경우도 있다.
1992년에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서 16세기 말의 귀함별황자총통龜艦別黃字銃筒이라는 대포를 건져 올린 일이 있었다.
겉에는 몇백 년 동안 물속에 수장되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귀함황자경적선일사적선필수장龜艦黃字驚敵船一射敵船必水葬(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은 수장시킨다)'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한산도라는 지역, 거기에 거북선이라는, 마치 필요한 퍼즐을 맞춤형으로 끼워 넣은 듯한 유물이 나온 것이다.
전국이 들썩였고, 해군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이 이 유물의 발굴을 발표하고 이틀 뒤에 국가의 문화재를 평가하고 결정하는 최고 기관인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 말의 유물이 틀림없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탄력을 받은 정부는 발견 17일 만에 실물도 보지 않고 덜컥 국보 제274호로 지정했다.
이렇게 빨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보물인 국보로 지정된 예는 전무후무했다.
국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보물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오랜 연구와 평가 그리고 사회적인 의미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결정해야 한다.
예컨대, 1971년에 발굴된 백제를 대표하는 무령왕릉의 황금 유물도 국보로 지정된 것은 3년이나 지난 1974년 9월이었고, 신라의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도 발굴된 지 5년이 지나서야 국보가 되었다.
그런데 별황자총통은 바다에서 건져 올렸기 때문에 발굴의 상황이 불분명함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속도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당시 국보 상정을 위해서는 문화재전문위원의 현장답사를 포함하여 최소한 1~2개월의 조사를 거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 별황자총통에 대해서는 모든 과정이 생략되었고 당시 한 문화재위원이 작성했다는 200자 원고지 5장의 평가서가 국보를 평가하는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
이후 1996년에 검찰에서 다른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이 유물을 위조한 사람의 진술을 확보했다.
그리고 추가 조사 결과 해군 유물발굴단의 관계자가 연루되었다는 점도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결국 거북선 발굴에 성과가 없는 것에 조바심을 낸 당시 해군의 발굴단장이 과욕을 부려서 유물을 조작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결과 국보 제274호는 결번이 되었다.
범죄자의 조작은 당연히 문제이지만, 당시에 졸속으로 국보로 지정한 문화재위원들에게도 비판의 화살은 향했다.
왜냐하면 조작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이다.
별황자총통의 보존 상태는 너무나 좋았고, 조선시대에는 쓰이지 않는 글자인 '귀함龜艦'이라는 글씨도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거북선을 '귀선龜船'이라고 썼다.
그밖에도 찬찬히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돌아보면 1990년대는 졸속으로 빨리빨리 일을 처리하던 문화가 한국 내에 극에 달했던 때였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안타까운 사건들을 떠올려보라.
사실 별황자총통은 그러한 사회적인 조급증이 정부와 문화재 학계로 미친 결과였다.
이 유물 발견 당시 언론에서는 이순신의 유물이 나왔는데 정부는 뭐하고 있냐는 식으로 질타하는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어떻게든 빨리 국보로 지정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바다에서 건진 유물을 짧은 시간 안에 평가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질 낮은 가짜 유물을 이순신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최단기간 졸속으로 국보로 지정한 사건은 우리나라 문화제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그렇게 프로스포츠에서 유명한 선수에게 부여하는 가장 큰 영예인 영구결번이 국보에서는 부끄러움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고고학의 진실은 유물에 있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흙구덩이를 파며 일생을 보낸다.
하지만 가끔 자신이 발견한 유물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거나 아니면 다른 고고학자가 학계의 주목을 받으면 초조해질 수 있다.
그러면 경쟁적으로 일반인들이 좋아할 만한(주로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들)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또 그러한 기사를 선호하는 언론도 이러한 경쟁을 부추기기도 한다.
최근에는 고령의 대가야고분에서 금관가야의 탄생설화인 '구지가龜旨歌'를 증명하는 진흙으로 만든 방울이 나왔다고 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끈 적이 있다.
김해를 중심으로 있었던 금관가야의 유물이 왜 관계 없는 대가야에서 나오는가는 둘째치고서라도 추상적으로 그은 몇 개의 그림이 실제 신화의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고고학자라고 예외겠는가.
특히나 세상과 멀어져서 외롭게 땅을 파고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자에게 세상의 관심은 삶에 큰 활력소가 된다.
내가 힘들게 발굴하고 연구한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라도 된다면 비록 그 유물의 설명에 발굴자의 이름은 없더라도 뿌듯하고 기쁜 게 사실이다.
그리고 한민족이나 인류의 기원 같은 모든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문제를 유물로 밝혀줄 수 있다면 더할나위없는 영광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어떠한 주장이든 유물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고고학자에게 진실은 유물에서 시작해서 유물로 끝난다.
고고학자들은 새로운 발견 앞에서 최대한 상상력을 억제하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실 실제 유물을 앞에 놓고 있으면 없는 상상력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물을 두고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고고학 유물의 가변성에 있다.
문헌을 주로 연구하는 역사와 달리 고고학이 대상으로 하는 유물들은 매일 새롭게 쌓인다.
언제나 고고학자들의 주장을 뒤엎는 새로운 발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한두 개의 발견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고고학자에게 명성은 마치 헤엄치는 고래와 같다.
고래는 오랜 기간 물속에 잠겨 있다가 때가 되면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분출한다.
너무 오랫동안 수면 밑에 있어서도 안 되지만 수면 위에 계속 머물러서도 안 된다.
너무 오래 수면 위에 있다면 결국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가끔 수면 위에서 따뜻한 햇살을 바라보는 건 좋지만 고래가 살아야 할 곳은 물속이듯, 결국 고고학자의 가장 큰 즐거움은 혼자 외롭게 유물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피어나야 한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2. 2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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