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3: 에스파냐, 프랑스, 잉글랜드의 서로 다른 경로(1600~166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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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4장 종교전쟁과 국가 건설(1540~1660) 3: 에스파냐, 프랑스, 잉글랜드의 서로 다른 경로(1600~1660)

새샘 2024. 12. 26. 11:15

1540년부터 1660년까지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은 서유럽 주요 왕국들 사이의 세력 균형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30년 전쟁에서 빠져나온 독일 Germany은 황폐하고 고갈되었다.

에스파냐 España는 1600년 이후 끊임없는 군사 작전 때문에 무기력해졌다.

반면 프랑스 왕국은 착실하게 힘을 키웠다.

1660년에 이르러 프랑스 France는 에스파냐를 확실하게 능가함으로써 유럽 본토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떠올랐다.

한편 잉글랜드 England에서는 왕과 의회 사이에 유혈 내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짧은 공화정 실험 끝에 잉글랜드는 1660년에 왕과 의회가 권력을 공유하는 '혼합' 군주정으로 헌정에 복귀했다.

 

 

○에스파냐의 쇠퇴

 

17세기에 에스파냐가 영광스러운 지위에서 몰락한 사건은 그 냉혹한 전개 과정이 마치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킨다.

1588년의 무적함대 패배에도 불구하고 1600년 무렵의 에스파냐 제국은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으니, 영토만 해도 이베리아 반도 Iberia peninsula 전체(1580년 펠리페 2세 Felipe II가 병합한 포르투갈 Portugal 포함), 이탈리아 Italia의 절반,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전체, 그리고 필리핀 제도 Philippine Islands를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지지 않던 에스파냐 제국은 이로부터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의 근본적인 취약점은 경제였다.
1600년 무렵에도 그보다 30~4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양의 아메리카산 은이 세비야 Sevilla(영어 Seville)의 부두에 계속 하역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동시대인들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에스파냐가 정복한 신세계가 오히려 거꾸로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있었다".

에스파냐는 농업, 광물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서양 연안의 경쟁국들이 달성한 것과 같은 수준의 산업 발전 및 무역수지 균형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귀족계급은 무슬림 muslim(이슬람교도)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영토를 수복하는 전쟁에 참전했던 중세 이래로, 실용적 사업보다도 기사도의 이상을 더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에스파냐의 귀족계급은 아메리카산 은을 유럽 다른 지역에서 공산품을 수입해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고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는데 흥청망청 써버렸다.

그 결과 새로운 산업은 거의 발전되지 못했다.
마침내 은의 유입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에스파냐의 경제는 늘어나는 부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왕실은 반종교개혁 지원과 국제적 패권 유지에 골몰한 나머지 대외 전쟁을 멈출 수 없었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던 1608년에도 700만 더컷 ducat(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처음 만들어져 128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에서 통용된 금화 또는 은화 화폐 단위)의 전체 세입 중에서 400만 더컷이 군사비로 지출되었다.

에스파냐가 30년 전쟁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자, 전비 지출은 감당 못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1643년 프랑스군은 로크루아 Rocroi에서 용맹을 자랑하던 에스파냐 보병에게 간담이 서늘한 정도의 패배를 안겨주었는데, 이는 페르난도 2세 Fernando II와 이사벨 1세 Isabel I 치세 이후 에스파냐 군대가 전투에서 패배한 최초의 사례였다.

더욱 나빴던 것은 그 무렵 에스파냐 제국의 유럽에 속한 두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피레네 조약 기념 메달(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D%94%BC%EB%A0%88%EB%84%A4%20%EC%A1%B0%EC%95%BD)

 

이들 반란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17세기에 에스파냐의 정부 권력이 실질적으로 미친 곳이 카스티야 Castilla뿐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469년에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 Aragón의 페르난도가 결혼한 후 카스티야는 에스파냐 연합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고, 1580년 포르투갈을 병합한 뒤에는 더욱 막강해졌다.

반자치 상태의 카탈루냐 Cataluña(영어 Catalonia)(아라곤 안에서 가장 독립성이 강한 지역)는 재정적 어려움이 크지 않았던 시기에는 카스티야의 지배권을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1640년 전쟁의 압박에 시달리던 카스티야가 더 많은 돈과 인력을 끌어내기 위해 카탈루냐의 자유를 제한하려 하자 카탈루냐는 반란을 일으켜 카스티야 총독을 내쫓아버렸다.

포르투갈 또한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남부 이탈리아인도 카스티야 총독에 저항해 1647년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에스파냐 제국은 주적인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이 절호의 기회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던 덕분에 그나마 완전한 파멸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 틈을 타 카스티야 정부는 신속히 이탈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했고, 1652년 무렵 카탈루냐 역시 굴복시켰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독립을 지켜냈다.

1659년 프랑스와 체결한 피레네 조약 Treaty of the Pyrenees으로 에스파냐는 사실상 유럽 지배의 야심을 포기했다.

 

 

○프랑스의 성장

 

17세기 전반기 에스파냐외 프랑스를 비교해보면 두 나라 사이에는 몇 가지 놀라운 유사점이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차이점이 결정적으로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두 나라는 영토의 크기가 거의 같았고, 다 같이 영토 확장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다.

카스티야 왕실이 아라곤, 카탈루냐, 그라나다 Granada, 포르투갈을 획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왕국도 랑그도크 Languedoc, 도피네 Dauphiné, 프로방스 Provence, 부르고뉴 Bourgogne, 브르타뉴 Bretagne 같은 여러 영토를 하나씩 추가하면서 성장했으며, 다양한 영토의 주민들은 카탈루냐인이나 포르투갈인만큼이나 지방적 독립의 전통을 소중히 여겼다.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에스파냐 통치자들처럼 지방을 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지배하기로 작정했으므로—특히 30년 전쟁으로 인한 절박한 재정 압박으로 무자비한 세금 징수가 절실했을 때 그렇게 했다에스파냐처럼 프랑스에서도 중앙 정부와 지방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에스파냐는 폭풍우를 이겨내지 못했지만, 프랑스는 그 고비를 무사히 넘기면서 더욱 많은 부를, 프랑스 왕실은 더욱 막강한 위신을 얻게 되었다.

 

호황기의 프랑스인 대부분—변경 지방에 사는 주민까지 포함해서—은 왕을 존경했다.

앙리 4세 Henri IV 치세의 프랑스인이 그런 태도를 갖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붙임성 좋은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 Edict of Nantes 공포로 종교적 평화를 이룩한 뒤, 일요일마다 모든 프랑스 가정의 식탁에 닭고기 요리가 오르도록 하겠노라고 선언하고, 40년에 걸친 내란으로 황폐해진 프랑스의 원상 복구 과업에 착수했다.

다행히 프랑스는 대단히 풍부하고 다양한 농업자원 덕분에 놀라운 경제 회복 능력을 보였다.

식량을 수입해야 했던 에스파냐와 달리 프랑스는 정상적인 식량 자급자족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앙리 4세의 재무장관 쉴리 공작 Duke of Sully은 프랑스를 자급자족 농업국가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다.

쉴리는 농업 기술 안내서를 프랑스 전역에 무료로 배포했고, 상품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로·교량·운하의 보수 및 신축에 적극적으로 재정을 투입했다.

또한 앙리 4세는 수정水晶(크리스털 crystal), 유리, 태피스트리 tapestry 같은 사치품 제조를 위한 왕립 공장의 건설을 명했느며, 전국 각지에 비단, 리넨 linen(아마포亞麻布), 모직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앙리 4세는 탐험가 사무엘 드 샹플랭 Samuel de Champlain을 후원함으로써 캐나다 Canada 일부 지역을 신세계 최초의 프랑스 세력 거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앙리 4세의 치세는 프랑스 전 역사에서 가장 자애로운 시대 중 하나로 간주된다.

 

 

●리슐리외 추기경

 

리슐리외 추기경(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5%B4%EB%A7%9D_%EC%9E%A5_%EB%92%A4_%ED%94%8C%EB%A0%88%EC%8B%9C_%EB%93%9C_%EB%A6%AC%EC%8A%90%EB%A6%AC%EC%99%B8)

 

앙리 4세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프랑스를 통치했던 리슐리외(1585~1642) 추기경 Cardinal de Richelieu은 앙리보다 훨씬 덜 자애로웠다.

물론 리슐리외 추기경이 프랑스의 진정한 왕은 결코 아니었다.

왕좌에는 앙리 4세의 무능한 아들인 루이 13세 Louis XIII가 1610년부터 1643년까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리슐리외는 1624년부터 1642년 사망할 때까지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마음대로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는 국내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위그노 Huguenot(16~17세기 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가 낭트 칙령에 규정된 제약에 저항하며 반기를 들었을 때 리슐리외는 혹독하게 그들을 진압했으며, 1629년 낭트 칙령을 수정해 위그노의 모든 정치적·군사적 권리를 박탈했다.

위그노에 대한 무력 진압에 꽤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추기경은 부르고뉴, 도피네, 프로방스의 반자치권을 폐지함으로써 왕실 수입의 증대를 꾀했고, 세 지역 모두에서 왕실의 직접세를 징수할 수 있었다.

나중에 리슐리외는 세금의 효과적 징수를 위해 앵탕당 intendant이라는 왕실 행정관을 파견함으로써 지방 정부 운영의 새로운 체제를 수립했다.

앵탕당들은 지방의 어떠한 저항도 마구 짓밟을 수 있는 권한을 특별히 위임받았다.

이러한 방법으로 리슐리외는 프랑스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공고히 했으며 왕실 수입도 두 배로 늘렸다.

그러나 그 역시 오스트리아 Austria·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 Haus Habsburg(영어 House of Habsburg)를 겨냥한 야심찬 대외정책에 끌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30년 전쟁 참전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가 사망한 뒤에는 국내의 반발 압력이 높아졌다.

 

 

●프롱드의 난

 

프랑스 정부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은 1648~1653년에 발생한 일련의 반란으로 표출되었다.

이 반란들을 한데 묶어 '새총 폭동 slingshot tumults' 또는 프랑스어로 '프롱드의 난 La Fronde(영어 The Fronde)'이라고 일컫는다.

그 무렵 루이 13세의 왕위는 어린 아들 루이 14세 Luise XIV에게 계승되었다.

그래서 어린 왕을 대신해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안 도트리슈 Anne d'Autriche와 그녀의 정부 마자랭 추기경 Cardinal de Mazarin이 섭정을 맡았다.

두 사람 모두 외국인—안은 합스부르크가 출신이었고, 본명이 귈리오 마자리니 Giulio Mazarini인 마자랭은 이탈리아 출신 협잡꾼이었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유력 귀족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프랑스인이 두 사람을 증오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중의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막대한 전쟁비용에다 여러 해에 걸친 흉작까지 겹쳐 프랑스가 일시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족 파벌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마자랭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하자 그들은 전국에 걸쳐 상당한 지지를 얻었고, 섭정 정부에 대한 반란의 불길은 여러 해에 걸쳐 간헐적으로 타올랐다.

 

그러나 프랑스는 분열로 치닫지 않았다.

무엇보다 프랑스 왕은 확고히 정립된 국민적 전통 덕분에, 그리고 앙리 4세와 리슐리외가 쌓아올린 탄탄한 업적 덕분에 커다란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고, 따라서 왕실 자체가 공격받는 일은 결코 없었다.

프롱드의 난을 이끈 귀족 지도자들도, 그들과 함께 반란에 가담한 평민들도, 어린 왕에 대해서가 아니라 마자랭의 부패와 실정에 항거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반란자 중 일부는 마자랭의 실책이 리슐리외의 중앙집권적이고도 반지방적인 정책을 답습한 데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롱드의 난을 이끌었던 귀족 대부분은 '권력 내부'에 들어가고 싶어 한 '주변인'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끼리도 종종 다툼을 벌였고—섭정과 편의적 협정을 체결하는가 하면, 놀랍게도 프랑스의 적인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공동 계획을 위한 통일된 지원책도 이끌어낼 수 없었다.

따라서 1651년 루이 14세가 직접 통치를 시작하자 부패한 각료들에 대한 반란이라는 구실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게 되었고, 모든 반대는 이내 잠잠해졌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상주의자와 빈민이 반란의 가장 큰 대가를 치렀다.

1653년 보르도 Bordeaux에서 발생한 민중봉기가 실패하자 봉기의 지도자는 바퀴에 묶인 채 망치로 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형벌을 당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세금 징수가 공포되었다.

루이 14세는 남은 생애 동안 두고두고 프롱드의 난이 몰고 왔던 혼란을 곱씹으면서 귀족계급과 지방 세력이 또다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했고, 급기야 프랑스 사상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절대 군주로서 다스렸다.

 

 

○잉글랜드 내전

 

잉글랜드 내전(1603~1660년)
스튜어트 왕조 시작
찰스 1세 치세
의회 없는 지배
잉글랜드 내전
찰스 1세 처형
공화정
호국경 체제
왕정복고
   1603년
1625~1649년
1629~1640년
1642~1649년
1649년
1649~1653년
1653~1658년
1660년

 

 

17세기 중반 유럽을 뒤흔들었던 모든 반란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잉글랜드 내전 English Civil War이었다.

그 갈등의 원인은 에스파냐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반란의 원인과 비슷하다.

즉, 왕국 내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의 적대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적대감, 권력을 장악한 (프로테스탄트) 진영 내부에서 싹튼 적대감, 궁정 안의 대립하는 귀족 파벌들 사이의 권력 투쟁, 늘어나는 전쟁비용은 고사하고 정부 지출도 따라잡지 못한 재무 제도 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오직 잉글랜드에서만 그러한 대립이 왕의 폐위와 처형(1649)로 귀결되었다.

11년의 '잉글랜드 공위시대 English Interregnum'(1649~1660) 중 잉글랜드는 공식적으로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결국 정부 내에서 의회의 지위를 보장하고, 모든 프로테스탄트에게 제한된 종교적 관용을 보장하는 조건 아래 왕정이 복고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의 기원

 

1642년 왕과 의회 사이에 벌어진 무력 충돌의 씨앗은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말년에 뿌려졌다.

1590년대에 여왕의 정부는 에스파냐와의 전쟁 및 아일랜드 Ireland 반란에 소요된 비용, 엄청난 곡물 흉작, 잉글랜드의 불합리한 낡은 조세 제도 등으로 인해 심각한 채무에 시달렸다.

늙은 여왕의 죽음을 예감한 신료들이 왕위 계승자로 예상되는 스코틀랜드 Scotland 왕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uart 밑에서 권력을 얻으려고 갖가지 술수를 쓰면서, 궁정을 둘러싼 파벌 다툼도 점점 심해졌다.

그러나 여왕은 임종의 자리에서야 비로소 왕위가 스코틀랜드의 사촌에게 계승될 것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리하여 1603년 제임스 1세 Jame I(재위 1603~1625)가 왕위에 올랐을 때, 왕과 그를 왕으로 맞이하게 된 잉글랜드 신민은 서로가 상대방을 잘 알지 못했다.

 

왕과 신민의 관계는 순조롭게 시작되지 않았다.

제임스 1세의 잉글랜드 신민들은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런던 London에 내려온 스코틀랜드인들을 얕잡아보았다.

잉글랜드 신료들은 새로운 왕이 그들에게 손 크게 베푼 특전은 기꺼이 받았지만, 왕이 스코틀랜드인 지지자들에게 준 하사금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신료들은 그 하사금 때문에 왕실 채무가 생겨났다고 비난했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한편 제임스 1세는 채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거둬야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의회 대표들과 세금 인상을 위한 협상을 하는 대신, 왕을 지상의 신에 견주면서 의원들에게 왕의 대권에 관한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신론이자 신성모독인 것처럼, 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신민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자 건방진 모독이다."

이런 접근방법으로 필요한 세금을 거둬들이는데 실패하자, 제임스 1세는 에스파냐와 강화를 맺고 의회의 승인 없이 다짜고짜 세금을 올렸다.

그리고 교역에 새로운 통행세를 물리는가 하면, 총애하는 일부 신료들에게 무역독점권을 팔았다.

그런 조치는 왕에 대한 분노를 증폭시켰고 의회의 자발적인 과세 승인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왕의 재정 상황은 끊임없이 악화되었다.

 

제임스 1세는 종교 정책에 관해서는 좀 더 노회했다.

스코틀랜드는 1560년대 이후 확고한 칼뱅주의 즉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타협으로 신학적 선명성이 한층 떨어졌다.

1603년에 이르러 잉글랜드는 분명 프로테스탄트 국가였지만,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 중 상당수는 그들의 교회를 좀 더 확고한 칼뱅주의 원칙에 맞추기 위해 제2, 제3의 종교개혁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하지만 여타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런 노력을 거부하면서, 칼뱅주의를 고집하는 그들에게 '청교도淸敎徒 Puritans'라는 딱지를 붙였다.

제임스 1세는 왕으로서 그런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대체로 그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개혁교회가 주교들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확신했고, 잉글랜드에서는 칼뱅주의 교리를 권장하되 기도서나 39개조 신앙고백의 변경만은 단호히 거부했다.

제임스 1세는 가톨릭이 압도했던 아일랜드 Ireland에서는 미래의 화근을 남겨두었다.

8,000명이 넘는 스코틀랜드 칼뱅주의자를 북부의 얼스터 Ulster 지방에 이주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의 재산권을 침범했고, 그때 생겨난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종교적 혐오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임스 1세 치세에 유지되던 미묘한 종교적 균형은 1625년 그의 아들 찰스 1세 Charles I(재위 1625~1649)가 즉위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부왕의 몸에 밴 조심성을 대담하게 내던진 찰스 1세는 즉각 에스파냐와의 새로운 전쟁에 돌입함으로써 재정 문제를 악화시켰고, 독일에서 복무할 병력의 충원을 위해 아일랜드 가톨릭 군대를 모집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민들을 놀라게 했다.

프로테스탄트의 놀라움은 찰스 1세가 프랑스 앙리 4세의 막내딸인 가톨릭교도 앙리에트 마리 Henriette Marie와 결혼했을 때 더욱 커졌다.

찰스 1세가 신임 캔터버리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 윌리엄 로드 William Laud의 도움으로 잉글랜드 교회에 지극히 반反칼뱅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나아가 이 종교 정책—철저히 주교가 장악하는 교회 정부 및 새로운 기도서 채택이 포함되었다—을 스코틀랜드의 칼뱅주의 교회에 강요했을 때, 상황은 대단히 위태로워졌다.

스코틀랜드인은 반란을 일으켰고, 1640년 스코틀랜드 군대가 남쪽 잉글랜드에 행군해 들어와 찰스 1세의 가톨릭 종교정책 철회를 요구했다.

 

스코틀랜드의 위협에 직면한 찰스 1세는 11년 만에 처음으로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과 의회의 관계는 1620년대 말에 이미 깨진 상태였다.

이 무렵 찰스 1세는 추가 자금 지원을 거부한 의회에 맞서 신민에게 강제 대출을 요구하는가 하면, 병사의 자택 숙박을 거부한 자들을 처벌하거나 재판 없이 투옥했다.

그에 맞서 의회는 1628년 왕에게 권리청원 Petition of Right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 문서는 의회에서 표결되지 안흥ㄴ 모든 세금은 불법이라고 선언했고, 군인이 민가에서 숙영하는 것을 규탄했으며, 자의적 투옥 및 평화 시 계엄령 선포를 금지시켰다.

찰스 1세는 의회의 권리청원으로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분노를 폭발시켰거고, 아예 의회 없이 통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630년대를 지내는 동안 의회 동의 없이 부과된 각종 세금과 벌과금으로 정부 자금을 충당했다.

 

찰스 1세가 새로이 의회를 소집한 단 하나의 이유는 스코틀랜드인의 침공이었다.

그러나 일단 의회가 소집되자, 의원들은 스코틀랜드인에 맞서 싸울 병사를 모집할 자금을 왕에게 허락할지 여부를 논의하기에 앞서, 왕의 급진적 개혁 조치를 요구했다.

찰스 1세는 처음에는 개혁에 협조적이었다.

의회가 재상 토머스 웬트워스 스트래퍼드 Thomas Wentworth, The Earl of Strafford(1593~1641) 백작을 처형하는 것마저 용인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회 지도자들이 스코틀랜드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오히려 의회와 스크틀랜드인 양자 간에는 사실상의 동맹관계가 수립되었는데, 그 동맹은 그들의 종교적 공통분모인 칼뱅주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1642년 찰스 1세는 할 만큼 다해봤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는 호위병을 하원에 난입시켜 하원 지도자 5명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찰스 1세는 런던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군대를 모집했다.

의회는 자체 병력을 소집하고 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과세를 표결하는 것으로써 응수했다.

1642년에 이르러 왕과 의회 사이에는 공공연한 전쟁이 벌어졌다.

 

 

●내전과 공화국

 

잉글랜드 내전의 전개(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E%89%EA%B8%80%EB%9E%9C%EB%93%9C%20%EB%82%B4%EC%A0%84)

 

국왕 편에 선 사람들은 잉글랜드 귀족과 대지주들로서 대부분 '고교회파 high-church' 국교도로서 '왕당파 Royalists'로 불렸다.

이에 반해 의회군은 소지주, 상인, 제조업자 등으로 대다수는 '청교도 Puritans'였으며 '의회파 Parliamentarians'로 불렸다.

왕당파는 보통 '기사당 Cavaliers'이라는 귀족적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고, 의회파는 곱슬머리 가발 착용 관습을 경멸하는 뜻에서 머리를 짧게 깎았기 때문에 조롱조로 '원두당 Roundheads'이라 했다.

내전 초기에는 왕당파가 풍부한 군사적 경험의 이점을 살려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1644년 의회군이 재조직된 후 전투 양상이 바뀌었다.

왕당파(기사당) 군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1646년 왕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교제는 즉각 폐지되고 칼뱅주의 교회가 잉글랜드 전역에 수립되었다.

 

만약 의회파 안에서 불화만 생기지 않았다면 싸움은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의원 대다수는 국왕과 화평을 주장하는 장로파 Presbyterians로서 획일적인 칼뱅주의 신앙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국교로 삼기로 합의하고, 찰스 1세를 제한군주로서 왕위에 복귀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파 Independents로 알려진 소수의 급진적 청교도는 찰스 1세를 불신했고, 독립파를 포함한 모든 프로테스탄트 분파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다.

독립파의 지도자는 의회파(원두당) 군대의 지휘를 맡았던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1599~1658)이었다.

 

(계속)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2. 2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