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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DNA에 새겨진 방랑 본능

새샘 2024. 12. 28. 21:30

3년 가까이 이어진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되었다.

한동안 이동을 자제했던 사람들은 다시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물가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래도 휴가 기간엔 여행을 가야지' 하며 조금이라도 저렴한 숙소와 비행기 표를 찾아 여리 인터넷 사이트를 방랑한다.

 

사실 인류는 지구상에 출몰한 이래 끊임없이 여행을 해왔다.

여기서 여행은 여유 있는 휴식 내지 관광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먼 곳으로의) 이동을 가리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건 간에 여행의 본질은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장소를 떠나는 것'이다.

떠나고자 하는 욕망은 태곳적부터 인류의 DNA에 새겨진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인류를 만든 세 번의 대이동

 

2022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는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s을 연구한 스웨덴 진화인류학자 스반테 파보 Svante Pääbo(1955~)였다.

그는 현생인류(슬기사람  즉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비교분석했을 때, 약 1~4퍼센트 정도 수준으로 공통된 부분이 있음을 밝혀냈다.

고고학이 유물과 유적을 통해 옛 인류의 생활, 문화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고인류학은 스반테 파보의 연구처럼 인류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고인류학계에서는 현생인류의 확산을 아프리카에서 발현한 한 줌의 집단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이동하고 퍼져나간 과정으로 설명하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은 크게 세 번에 걸쳐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먼저 180만 년 전을 기점으로 곧선사람(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이 사하라 사막 Sahara Desert을 건너 근동 지역을 거쳐 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되었다.

그다음으로 약 60만 년 전을 기점으로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인 하이델베르크인(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 Homo heidelbergensis )이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마지막으로 현생인류인 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이 10만 년 전(최근에는 20만 년 전이라는 주장도 있음)을 기점으로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현생인류는 1만 7,000년 전,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갔다.

이윽고 한 줌의 작은 집단에 불과했던 현생인류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인류가 지구 지질 및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킴으로써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시대)'라는 말이 창안될 정도로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생물 종으로 등극했다.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서 목숨을 걸고 이동한 사람들의 여정은 곧 인류의 역사가 되었다.

생존에 적합한 곳을 찾아 기존에 살던 곳을 떠나 개척할 줄 아는 본능이 없었다면 인류는 오늘날의 문명사회를 건설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터전을 찾아서 새로운 곳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들만이 생존했다.

목숨을 걸고 떠날 수 있었던 인류의 용기가 우리의 진화를 선도했다.

 

 

○여행, 역사를 만들다

 

근대 이후 관광이 발달하면서 여행은 낭만과 힐링 healing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여행은 목숨을 건 도전이자 도박이기도 했다.

이는 비단 개인적인 여행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파견하는 사신단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비단길을 여행하는 사람(중국 오르도스 박물관 소장)(출처-출처자료1)

 

가령, 발해는 8세기에 약 100년 동안 16번이나 일본으로 사신단을 파견했는데, 그중 절반은 사신단을 실은 배가 표류하거나 난파했다.

배가 전복되어 40여 명의 사신단이 수장되거나 잘못 기착해서 아이누 Ainu(일본 홋카이도와 사할린 등지에 사는 종족)들에게 사신단 전체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비단길(실크로드) Silk road을  개척했던 중국 전한시대의 외교가 장건張騫(?~서기전 114년)도 흉노에게 잡혀 10년 넘게 억류 생활을 했다.

그리스 Greece 최초의 서사문학인 <오디세이아 Odyssey>나 아랍어로 쓰인 설화집인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모험담들만 봐도 여행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여정이었다.

 

 

계림로 고분에서 출토된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 신라로 온 비단길 카자흐스탄의 황금 보검(출처-출처자료1)

 

인류가 오래전부터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은 상당하다.

발굴 작업은 하다보면 발굴지와는 관계없는 머나먼 지역의 물건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기도 한다.

가령, 크림반도 Crimean Peninsula에서는 3,000년 전의 것으로 짐작되는 중국 주周나라(서기전 1046~서기전 256) 전사가 쓰던 칼과 창이 발견되었다.

트로이 Troy 유적에서는 만주 일대에서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말 재갈과 청동 무기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3년 경북 경주시 계림로 고분 발굴 현장에서 카자흐스탄 Kazakhstan 지역의 왕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황금 보검이 출토되었다.

당시에 이 정도로 진귀한 물건은 사람이 직접 전달했을 것이다.

어떤 연유로 카자흐스탄이 황금 보검이 과거 신라 땅으로까지 전해졌는지 그 내력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비단길을 통해 초원의 민족과 신라인이 활발히 이동하고 교류했다는 사실이다.

 

 

○영원으로 떠나는 여행

(왼쪽)길가메시 조각상과 (오른쪽)길가메시 점토판(출처-출처자료1)

 

인간은 현실에 나 있는 길로만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영원한 삶을 꿈꿨던 인간은 내세에 대한 믿음과 상상을 토대로 더 멀고, 더 아득한 여행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 믿음과 상상은 이야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길가메시 Gilgamesh>다.

 

<길가메시>는 4,800년 전 수메르 Sumer 문명권 국가 중 하나인 우루크 Uruk를 다스렸던 전설의 왕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떠난 이야기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리던 길가메시는 절친 엔키두 Enkidu의 죽음을 목도하고 영생을 얻고자 여행을 떠나지만 모험 끝에 길가메시는 영생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흥미롭게도 길가메시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가 새겨진 설형문자 점토판도 우여곡절의 여정을 겪었다.

길가메시 점토판은 본래 이라크 박물관 Iraq Museum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1년 걸프전쟁 Gulf War 중 도난당해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불법적으로 반입되었고, 이후 미국 워싱턴 D.C. 성경 박물관 Museum of the Bilble까지 건너가게 된다.

길가메시 점토판은 미국으로 반입된 이라크 고대 유물 반환 절차 과정에서 이라크로 다시 반환되었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 만의 귀환이었으니 길가메시 못지않은 여정을 거친 셈이다.

 

영생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몇천 년 동안 인간의 상상 속에서 함께했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일본 만화 <은하철도銀河 999>는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주인공이, 메텔 メーテル Maetel이라는 여성의 도움을 받아 영원한 삶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큰 줄거리다.

<은하철도 999>의 원작은 일본 작가 미야자와 겐지(궁택현치宮沢賢治, 1896~1933)의 소설 ≪은하철도의 밤≫이다.

그는 사랑하던 동생의 요절을 계기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에게 죽음은 가장 큰 공포다.

영생을 염원하며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주요 발굴 무대인 수많은 무덤은 죽은 사람이 영원을 향해 먼 길을 떠나기를 바랐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흔적이다.

 

 

스칸디나비아 포솜 유적 암각화에 그려진 배를 타고 여행하는 장면(출처-출처자료1)

 

영원을 향해 떠나는 여정을 묘사한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울산광역시에 있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蔚州 大谷里 盤龜臺 岩刻畵 Petroglyphs of Bangudae Terrace in Daegok-ri, Ulju.

반구대 암각화 가장 높은 곳, 마치 태양이 떠 있을 법한 위치에는 배를 탄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태양을 향해 배를 타고 떠나는 모습이 새겨진 암각화는 북유럽과 시베리아 바닷가 암각화에서 흔히 발견된다.

 

유목 민족들의 무덤에서 발굴되는 사람뼈의 모습을 통해서도 죽은 자의 편안한 저승 여행을 기원했던 옛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유목 민족의 무덤에서 발굴되는 사람뼈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하늘을 보고 누운 형태가 아닌 옆으로 구부린 모습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사람뼈 옆에서 발견된 말뼈를 통해 밝혀졌다.

시신을 기마 자세로 묻은 것이다.

이는 죽은 자가 저승길을 갈 때 천마를 타고 달릴 수 있기를 바라던 유목 민족들의 마음이 담긴 풍습이다.

 

여행의 본능은 인류의 진화와 생존, 번영과 안식을 두루 가능하게 했다.

현생인류는 아프리카를 떠나 자신의 영역을 점차 전 지구로 넓혀갔다.

비단길을 비롯해 바닷길, 하늘길을 통해 인류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문화와 기술을 나누고 번성했다.

죽음의 공포가 덮쳐올 때는 현생인류만의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영원에 대한 이야기를 짓고 나누며 두려움을 달랬다.

여행은 늘 인간을 꿈꾸게 만들었다.

머무르지 않고 떠나는 인간만이 새로운 길을 열어젖힌다.

지금 당신 안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갈망이 꿈틀댄다면, 그것은 곧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2. 2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