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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뒤바꾼 명약 '인삼'

새샘 2025. 2. 27. 17:17

인삼(출처-https://www.shinsegaegroupnewsroom.com/20532/)

 

최근 들어 김치, 한복 등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서 여러 문화를 두고 원조 논쟁이 한창이다.

하지만 중국이 자신 있게 자신들이 원조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인삼人蔘 Insam(흔히 ginseng)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인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오직 고려 인삼만을 최고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인삼의 효능은 서양으로까지 전해졌다.

2022년 농림축산식품부 발표에 따르면, 인삼은 김치에 이어 농수산물 수출 품목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가히 인삼은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삼은 어떠한 매력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명약이 되었을까?

 

 

○2,000년 전에 등장한 인삼

 

인삼은 약 2,000년 전 중국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 내용이 그리 자세하지는 않다.

중국인들은 인삼을 직접 캐지 않고 굉장히 먼 데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삼의 대표적인 산지는 백두산 일대다.

인삼은 일교차, 계절에 따른 기온차가 뚜렷하고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약용작물이다.

중국과 인삼교역을 시작한 시기는 고조선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백두산 일대에서 얻은 모피를 중국과 교역한 흔적이 있는데, 이때 한반도 인삼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졌던 것 같다.

 

우리 인삼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삼국시대에 들어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진상품으로 중국에 인삼을 선물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인삼이 유명하다는 기록은 6세기 무렵부터 등장한다.

통일신라도 당나라에 인삼을 보낸 기록이 있지만, 인삼의 품질이 고구려나 백제 인삼에 미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 당나라가 통일신라에서 보낸 인삼을 받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통일신라가 인삼의 주요 산지인 백두산 일대와 멀어서 생산량이 적었던 데다 채취한 인삼을 저장하는 기술도 발달하지 못했던 탓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인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발해다.

신라 인삼에 대한 기록은 8세기 말 이후에 사라진다.

이 시기는 발해가 한반도에서 인삼의 주요 거래 국가로 등장하는 시점과 맞물린다.

발해의 영토는 시베리아 호랑이 Siberian tiger(백두산 호랑이 또는 한국호랑이)로 유명한 연해주 시호테알린산맥 Sikhote-Alin Mountains 백두산 일대로까지 확장되었는데, 이 지역이 바로 인삼의 주요 산지였다.

일본도 8세기 초에 발해를 통해서 인삼을 처음 접한다.

발해는 기후가 냉랭하고 산세가 험한 지형에 위치했지만 그러한 토양에서 잘 자랐던 특산품 인삼 덕분에 이를 수출해 국고를 쌓을 수 있었다.

 

(위)발해 유적에서 발굴된 인삼 같은 약초를 캐는 도구와 (아래)금산군에서 발굴된 조선시대의 인삼 캐는 도구.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의 인삼 캐는 도구의 모양이 똑 같다.(출처-출처자료1)

 

최근 러시아의 발해 유적에서 발해가 인삼 산지로 유명했음을 밝혀주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바로 인삼을 채취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동물의 뼈로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도 삼과 쇠는 상극이기 때문에 인삼을 채취할 때 나무나 골제로 된 도구를 사용한다.

흥미롭게도 인삼 캐는 도구가 발견된 곳들은 발해 유적들 가운데서도 최북단 산악 지역이었다.

 

 

○인삼, 세계사를 주무르다

 

인삼은 청淸나라의 건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는 17세기 초 여진족 족장 누르하치 Nurhaci(천명제天命帝)가 중국 대륙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세운 후금後金이 그 시작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조선만이 인삼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이 기술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월경하여 조선 땅을 침범해 인삼을 캐가는 등 인삼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 Hong Taiji(숭덕제崇德帝)가 조선을 침략했던(정묘호란, 병자호란) 이유가 만주의 인삼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홍타이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 인삼을 캐는 조선인에 대해 항의하는 서한을 인조에게 보내기도 했을 정도다.

대만 학자 장주샨(장죽산蔣竹山)은 '인삼의 제국'이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인삼이 청나라라는 거대한 제국을 움직인 물건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북동타타르지≫에 등장한 조선의 인삼(출처-출처자료1)

 

인삼은 유럽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17세기 후반 네덜란드 Netherlands 외교관이었던 니콜라스 빗선 Nicolaes Witsen이 집필한, 서양 최초의 동아시아 백과사전인 ≪북동타타르지 Noord en Oost Tartarye(영어 North and East Tartary)≫(타타르 Tatar/Tartar는 몽골 계통의 지역을 통칭하는 단어)에는 인삼을 잔뿌리까지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이 나온다.

이 기록은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하멜 Hamel과 함께 제주에 표류했던 의사 마테우스 에이보켄 Mattheus Eibokken이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한다.

에이보켄은 조선과 그 북쪽의 타타리아 Tataria/Tartaria(시베리아와 북중국)의 험한 산속은 눈이 사시사철 쌓여 있고 호랑이도 많지만 인삼 뿌리가 있기에 사람들이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캐서 일본, 중국과 교역한다고 기록했다.

일본에 주재했던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이 본국에 고려 인삼을 보내며 '이 뿌리는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에 충분하다'라고 언급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서양인들은 인삼의 효능에 감탄했다.

 

 

○인삼과 맞바꾼 눈문과 비밀 무기

 

인삼과 관련해서 인상적인 에피소드 episode를 하나 꼽으라면 리지린(리지림李志林)과 고힐강顧詰剛이라는 두 학자 사이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리지린은 ≪고조선 연구≫라는 책으로 유명한 북한의 역사학자다.

그는 1959~1961년 북한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베이징대학교(북경北京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하며 중국의 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고힐강에게 사사한다.

리지린은 박사논문에서 만주 일대가 한국의 역사적 영토라는 주장을 펼친다.

중국 입장에서는 달가워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고힐강 역시 중국의 역사를 빼앗으려는 리지린을 나중에는 학문적 간첩이라고 대놓고 비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리지린의 박사논문을 지도한 죄로 중국 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는다.

리지린에 대한 고힐강의 감정이 좋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가 쓴 일기에 따르면 고힐강은 리지린이 졸업 기념으로 선물한 고려 인삼만은 무척 애지중지했다.

이 인삼은 리지린이 최종 박사논문 발표회를 앞두고 조선노동당의 이름으로 고힐강에게 선물한 최고급 인삼이었다.

고힐강이 이 인삼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마지막 남은 인삼을 털어 먹으면서 '이제 인삼은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라고 한탄하는 내용을 일기에 적을 정도다.

 

소련에서는 인삼주와 비밀 군사 기술을 바꾸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1970년 말, 지금은 우크라이나 Ukraine 수도인 키이우 Kyiv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푸슈카르 Pushkar라는 기술자는 함께 근무하던 동료에게서 인삼주를 선물받는다.

그에게 인삼주를 선물한 이는 같은 군수공장에서 연수 중이던 북한 사람들이었다.

사실 이들이 푸슈카르에게 인삼주를 선물로 주며 접근한 까닭은 소련의 고급 군사기밀을 빼내기 위해서였다.

푸슈카르는 인삼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당시 소련을 대표하는 무기였던 대전차 공격포 '팔랑가 Phalanga'의 도면을 건네준다.

이후에도 북한 기술자들은 그에게 더 많은 도면을 요구했고, 그에 따른 선물도 많아졌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그의 행적은 KGB에 포착되었고 그는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취조 결과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최고 군사기밀을 건네고 받은 것이라고는 고작 인삼주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결국 푸슈카르는 수용소에 끌려가 수감 생황을 하다가 1987년에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별다른 자양강장식품이 없었기 때문에 인삼이 그야말로 큰 선물이었던 것 같다.

 

 

○한국 약초의 아이콘

 

지금까지도 인삼의 정확한 약리 작용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하지만 지난 2,000년 동안 인삼을 둘러싼 이야기가 무궁무진할 만큼 그 약효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러한 명성은 단순한 입소문이거나 플라세보(속임약 또는 헛약) 효과 placebo effect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실제로 고려 인삼의 효능이 대단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반도는 인삼이 잘 자라는 환경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삼을 잘 가공하고 보존하는 방법, 약효를 지속시키는 법 등에 대한 노하우(비법秘法) knowhow가 상당했다.

중국이 인삼의 기원을 중국이라고 강력해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탁월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는 것이야말로 원조나 기원에 대한 논쟁보다 더 중요함을 인삼의 역사를 통해 새삼 깨닫는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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