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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7: 17세기 식민 활동과 무역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7: 17세기 식민 활동과 무역
새샘 2025. 3. 2. 19:25
18세기 유럽의 경제를 진전시킨 설탕, 담배, 차, 커피, 초콜릿, 도자기, 면직 의류 같은 주요 산물을 포함한 새로운 소비재 중 상당수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유럽의 식민지 제국에서 생산된 산물이었다.
증대되는 유럽의 부는 단순히 식민 제국을 소유해서 이룬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없이 이러한 번영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럽의 제국들과 18세기 세계 경제에서 그들이 행한 발전적 역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17세기 유럽의 식민 활동 유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에스파냐의 식민 활동
콘키스타도르 conquistador(스페인 침략자를 뜻하는 스페인 말이며, 특히 15세기부터 17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침입한 스페인 침략자들)의 착취 이후 에스파냐 España는 페루 Peru와 멕시코 Mexico에 식민지 정부를 세우고 이를 마드리드 Madrid에서 통제했다.
에스파냐 정부는 중상주의 이론에 따라 오로지 에스파냐의 상인에게만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무역을 허용했으며, 그들에게 모든 식민지의 수출품과 수입품이 정부가 관장하는 세관에 등록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에스파냐 항구[처음에는 세비야 Sevilla(영어 Seville)만, 나중에는 한결 항해하기 쉬운 카디스 Cádiz(영어 Cadiz)]를 이용할 것을 요구했다.
16세기 동안 이 체제는 적당히 잘 작용했다.
에스파냐의 식민지 경제는 광산업이 지배했다.
동아시아에서의 수지맞는 은 시장은 마닐라 Manila에 전초기지를 설치함으로써 에스파냐에 이로운 일이 되도록 했다.
에스파냐의 상인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마닐라에서 아시아의 비단과 교환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에스파냐는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농업과 목축업을 장려하는 단계를 밟았고, 플로리다 Florida와 캘리포니아 California에 정착지를 세웠다.
에스파냐가 식민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자 다른 나라의 상인들도 그 금과 은을 차지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졌다.
아마도 가장 대담한 도전자는 영국인들이었고, 그중에서 주도적인 해적은 노련한 뱃사람이라고 불린 프랜시스 드레이크 Francis Drake(1540?~1596)였다.
드레이크는 세 번이나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습격했다.
그리고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패배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의 경력은 잉글랜드 England가 식민지 무역에 뛰어들기 위한 초기 노력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해적 행위와 애국심의 혼합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1650년대까지 잉글랜드인은 에스파냐의 수지맞는 금과 은, 피혁, 비단, 노예무역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영국의 식민 활동
영국이 소유한 아메리카 식민지는 값진 광물 자원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의 식민지인들은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Caribbean Sea 안쪽에 농업 정착지를 세움으로써 이윤을 얻고자 했다.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영국 최초의 항구 식민지가 1607년 버지니아 Virginia의 제임스타운 Jamestown에 건설되었다.
이후 40년에 걸쳐 8만 명의 영국 이주민이 신세계에 20개 이상의 자치 정착지를 세우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초기 정착민 중 상당수는 종교적 동기로 이주했다.
1620년 매사추세츠 Massachusetts의 플리머스 Plymouth에 상륙한 순례 시조 Pilgrim Fathers는 종교적 통일성을 부과하려는 영국 정부에게서 벗어나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고자 했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도가 포함된 비非영국국교회 Non-Church of England 집단의 하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 American Indians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데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선교 활동은 대부분 중앙 및 남아메리카를 식민화하려는 에스파냐와 북아메리카 오지를 관통하려는 프랑스 France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 영국 정착지의 대다수는 사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정착지들이 번성하자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임기 1653~1658)과 찰스 2세 Charles II(재위 1660~1685)의 정부는 정착지의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651년과 1660년에 통과되고 이후 엄격하게 시행된 중상주의에 따른 일련의 항해법은 영국 식민지에서 모국으로 오는 모든 수출품은 영국 선박을 이용하도록 규정했고, 식민지에서 직접 생산된 일부 '특정' 상품이 식민지에서 유럽 대륙의 항구로 바로 수출되는 것을 금지시켰다.
식민지에서 생산된 물품 가운데 가장 값어치가 있던 것은 설탕과 담배였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했던 중세 유럽에는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던 설탕은 유럽인이 지중해와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 생산하기 시작한 15세기 말에 인기 있는 사치품이 되었다.
하지만 오직 신세계에서만 엄청난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양의 설탕 생산이 가능했다.
17세기 중엽 유럽의 설탕 수요는 이미 엄청난 규모에 도달했다.
18세기 영국이 서인도 제도 西印度諸島 West Indies의 자그마한 식민지인 바베이도스 Barbados와 자메이카 Jamaica에서 수입한 설탕의 값어치는 영국이 중국과 인도에서 수입한 모든 물건의 값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사탕수수는 지리적으로나 기후 면에서 매우 제한된 지역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지만, 담배 tobacco의 재배는 훨씬 더 융통성이 있었다.
에스퍄냐인 Españoles(영어 Spaniards)이 유럽에 담배를 처음 들여온 것은 16세기 중반이었지만, 유럽인이 흡연 습관을 들이는 데는 반세기가 더 흘러야 했다.
처음에는 담배에 기적의 치유력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신성한 담배 holy tobacco' 또는 '우리의 신성한 니코의 약초 our holy Nico's herb'라고 불렀다('니코틴 nicotine'은 담배를 프랑스로 들여온 포르투갈 Portugal 주재 프랑스 대사 장 니코 Jean Nicot의 이름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국 탐험가들이 흡연을 대중화시켰는데, 월터 롤리 Walter Raleigh(1554~1618)는 버지니아에서 인디언들과 함께 살면서 흡연을 배웠다.
이후로 흡연은 유럽 사회의 모든 계급에게 빠르게 번져갔다.
처음에 정부는 교회와 함께 흡연을 비난했으나, 17세기 말 무렵에는 흡연으로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담배의 생산과 소비를 장려했다.
○프랑스의 식민 활동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루이 14세 Louis XIV(재위 1643~1715)의 재무장관이자 중상주의자였던 장 밥티스트(또는 바티스트)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임기 1665~1683)가 활동하던 기간에 완성되었다.
콜베르는 대외 팽창을 필수불가결한 국가 경제정책으로 인식했다.
그는 영국과 경쟁하기 위해 서인도 제도에 설탕 생산 식민지의 개발을 권장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식민지는 생 도밍그 Saint-Domingue(오늘날 아이티 Haiti)였다.
또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내륙 지방을 지배했다.
아카디아 Acadia에서 퀘벡 Quebec 그리고 루이지애나 Louisiana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프랑스 상인들은 인디언들에게서 모피를 사들였고,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하지만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크기에 비해 재정 수입이 미약했다.
많은 양의 모피, 생선, 담배가 유럽 시장으로 수출되었지만 카리브 해의 설탕 식민지나 인도의 무역기지에서 나오는 이익에 비견되지 못했다.
○네덜란드의 식민 활동
1670년대까지는 네덜란드는 17세기에 가장 번성하는 상업 제국을 세웠다.
오늘날 남아프리카 South Arfrica의 희망봉 Cape of Good Hope에 있는 정착지를 포함해 일부 네덜란드인 Dutch 정착지가 세워지긴 했지만 네덜란드의 식민 활동은 대체로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확립한 이른바 '요새와 공장 Fortress and Factory' 모델(유럽 강대국이 무역로를 통제하고 귀중 상품에 접근하기 위해 건설한 요새화된 무역소)을 따랐다.
1602년에 설립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Dutch East India Company는 동남아시아의 수마트라 Sumatra, 보르네오 Borneo, 몰루카 Moluccas(향신료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 회사는 이전에 포르투갈 무역상이 지배했던 이 지역에서 그들을 몰라내고 후추, 계피, 육두구肉荳蔲(예로부터 서양에서 향미료로 쓰거나 화장품과 리큐어의 향료, 건위제, 미약 따위로 이용하는 늘푸른 넓은잎 나무이며, 학명은 미리스티카 프라그란스 Myristica fragrans), 메이스 mace(육두구 껍질을 말린 향신료), 정향丁香(한약의 재료로 쓰이는 말린 정향나무의 꽃봉오리) 등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점권을 확립했다.
또한 네덜란드인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독점권을 확보했고 중국과 인도에 군사 및 무역 전초기지를 유지했다.
하지만 서반구(아메리카, 태평양, 대서양 지역을 포함하는 지구의 서쪽 지역)에서는 네덜란드의 진출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영국과 일련의 무역 전쟁을 치른 이후 1667년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뉴암스테르담 New Amsterdam(현재의 뉴욕 New York)을 공식적으로 양도하고 수리남 Suriname(남아메리카의 북서 해안에 위치)과 카리브 해의 큐라소 Curaçao와 토바고 Tobago(서인도 제도에 위치)만 보유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는 17세기 동안 노예 무역을 지배했지만, 1713년 이후 그 지위마저 영국에게 빼앗겼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유럽 최고의 금융 국가로서 식민지 사업에 투자하기 위한 새로운 기법을 개척했다.
이들 기법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Dutch East India Company가 효시였던 유한회사 joint-stock company였다.
이런 유한회사는 회사 사업에 대한 주식을 투자가들에게 판매하여 현금을 모았는데, 투자가들은 회사 운영에 대한 어떠한 역할도 맡지 않고 사업의 공동 소유주로서 자신이 투자한 금액에 따라 이윤을 분배받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처음에는 회사 창건 10년 뒤 투자가들에게 이익을 지불할 생각이었으나, 이 회사의 이사들은 이내 이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612년 무렵 선박, 부두, 창고, 화물 등으로 구성된 이 유한회사의 자산은 지구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더욱이 이 회사의 상업적 전망은 계속 향상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사진은 이윤 실현을 갈망하는 투자가들에게 그들의 주식을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에서 다른 투자가들에게 팔도록 설득했다.
그럼으로써 이사진은 자신들의 사업에서 지속적인 운영을 보장받았고 그 과정에서 얼마 안 가 유럽의 다른 곳에 전파될 지속적인 기업 자금 조달 방식을 확립했던 것이다.
○대조적인 식민지 정착 유형
유럽 열강들이 신세계 식민지들과 수립한 상업적 관계는 이들 식민지 사이의 정착 유형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중앙 및 남아메리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에스파냐인이 복합적이고 인구가 조밀한 토착 아메리카인의 사회를 정복했다.
이러한 새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에스파냐는 재빨리 토착민 엘리트 élite를 에스파냐인 행정가와 성직자로 대체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대체로 기존 토착 문화를 뿌리 뽑거나 제거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에 에스파냐는 국왕을 위해 식민지의 광물 자원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짜내기 위해 토착민의 노동을 통제하고 착취하는데 노력을 경주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토착민은 대부분 크고 잘 조직된 촌락과 마을에서 살았다.
에스파냐의 식민 정책은 그러한 공동체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그들을 가톨릭교로 개종시키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는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자들과 토착민 사이의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인종 간 결혼과 결합된 광범위한 문화적 동화였다.
이런 현실에서 복합적이면서도 뚜렷한 인종적·사회적 계급 제도가 등장했다.
최상층에는 순수 혈통의 에스파냐인, 중간에는 혼혈인(토착민, 에스파냐인, 아프리카인의 다양한 조합), 최하층에는 부족을 이루지 못한 인디언으로 구성된 계급 제도였다.
이론적으로 인종적 범주는 계급 구별과 일치하지만, 실제로는 인종과 계급이 항상 부합되는 것은 아니고 인종 자체도 종종 사회적 허구였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혼혈인은 엘리트(에스파냐인) 지위를 특징짓는 사회적 관행을 채택함으로써 자신의 '순수한' 에스파냐계 가계를 확립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인은 빈곤해지더라도 항상 사회적 계급 제도의 최상층에 남아 있었다.
에스파냐의 식민지처럼 프랑스 식민지도 국왕 직속의 사업으로 세워지고 관리되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는 주로 군사적 전초기지와 교역 중심지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정착지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프랑스 식민지 사회의 엘리트는 파리 Paris에서 파견된 군 장교와 행정가였으며, 그 아래에 북아메리카 프랑스 정착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부, 모피 교역상, 소농, 병사의 광범위한 이익 공동체가 있었다.
카리브 해 지역을 제외하고 프랑스 식민지는 대개 모피 교역과 어업이 주를 이루었으며, 두 사업은 모두 토착민과의 협력 관계에 의존했다.
따라서 상호간의 경제적 의존 관계가 프랑스 식민지와 주변 지역 주민 사이에 발전했다.
인종 간 결혼은 특히 프랑스 모피 교역상과 토착민 여성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대부분의 프랑스 식민지는 모국에서 보내는 임금과 보급품에 의존했으며, 이들 식민지가 자급적 경제를 일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형성된 영국의 식민지는 에스파냐와 프랑스와는 다른 경로를 따랐다.
영국의 식민지는 국왕의 사업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유한회사(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의 식민지) 아니면 개인적인 영주 식민지(메릴랜드 Maryland와 펜실베이니아 Pennsylvania의 식민지)로 건설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개척들은 아일랜드 Ireland에서의 경험에 입각해 우선 대농장—이곳에서 식민지인들은 영국적 생활방식의 많은 측면을 가능한 한 많이 도입하고자 했다—이라고 부르는 계획된 정착지를 세웠다.
지리적 여건 또한 영국인이 집중적인 정착 유형을 보여주는데 기여했다.
북아메리카 동부의 수많은 강과 만은 신세계에서 영국 식민지인의 첫 번째 발판이 되었으며, 대서양은 서로 떨어진 정착지들을 한데 묶는데 도움을 주었다.
허드슨 강 Hudson River을 제외하면 북아메리카 동부에는 식민지인들을 내륙 깊숙이 인도해줄 큰 강이 없었기에 그들은 해안에 의존하면서 서로 연결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처럼 영국의 초기 식민지는 수출을 위한 어업과 모피 교역에 의존했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는 일차적으로 농업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중소 규모의 지주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에게는 토지의 관리가 부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런 현상은 부분적으로 그들을 신세계로 이주하도록 설득한 식민 사업의 후원자가 지닌 개인적 의도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농업에 집중된 또 다른 이유는 16세기 후반 대서양 연안의 토착민에게 타격을 주었던 인구학적 대변동 때문이기도 했다.
에스파냐 군대와 뉴잉글란드 New England 해안의 풍족한 어장에 빈번히 출몰했던 프랑스·영국·포르투갈의 어부들이 옮겨온 유럽의 질병은 최초의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북아메리카 동부의 수많은 토착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상당한 면적의 농토가 단순히 경작할 토착민 농부가 충분하지 않다는 방치되었고, 이는 많은 토착민 집단이 처음에 유럽에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을 환영했던 한 가지 이유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서양 연안을 따라 정착한 영국 식민지인들은 에스파냐인과는 달리 대규모 토착민 노동력을 통제할 필요가 없었고 그럴 기회조차도 없었다.
오히려 영국 식민지인들이 원한 것은 토착민의 토지에 대한 완전한 독점적 지배였다.
이를 위해 영국 식민지인들은 곧 원주민을 추방하고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펜실베이니아의 퀘이커교도 Quaker(경건주의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한 종파) 식민지에서는 식민지인과 토착민이 반세기 이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캐롤라이나 Carolina에서는 토착민을 서인도 제도에 팔아버리거나 1690년대부터 해안을 따라 들어선 쌀 대농장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노예로 삼는 일이 널리 자행되었다.
하지만 북아메리카 토착민을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인 대농장주들이 예속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자 영국으로부터 계약 노동자를 고용해 오거나(그들 대부분은 일정 기간의 노동 이후 자유를 얻는다) 아프리카에서 사로잡혀 온 (대개 죽을 때까지 노예가 될) 사람들을 사들였다.
영국 식민지인과 토착민 사이의 사회적 관계 또한 신세계의 다른 곳과는 사뭇 달랐다.
에스파냐나 프랑스의 식민지와는 대조적으로 영국 식민지인과 토착민 사이의 인종 간 결혼은 드물었고, 대신에 계급과는 무관하게 모든 유럽인을 모든 토착민과 아프리카인과 구별하는 엄격한 인종적 구분이 등장했다.
토착민과 아프리카인 사이의 인종 간 결혼은 상대적으로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영국인과 그들의 지배 아래 있는 식민지 원주민 사이에는 이내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생겨났다.
○식민지 사이의 경쟁
식민 제국의 운은 17세기와 18세기 초를 거치면서 극적으로 변화했다.
지속적인 경기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일련의 소모적인 전쟁과 국내 반란에 휘말린 에스파냐는 식민지 무역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은 1650년대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자메이카 섬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의 카디스 항으로 향하고 있던 보물선들을 포획했으며, 에스파냐 세관 관리들에게 상당액의 뇌물을 제공함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
18세기 후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판매되는 수입품의 3분의 2는 네덜란드·영국·프랑스의 무역상들이 밀수한 것이었다.
1700년 무렵 에스파냐는 여전히 식민 제국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식민 제국들은 훨씬 역동적인 경쟁국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18세기 중엽 한층 계몽된 지도력 아래 한동안 운이 되살아는 듯했지만, 그 무엇도 에스파냐의 궁극적인 추락을 막아내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자국의 식민 제국에 외국 세력이 침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특히 영국은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상업적 이점을 획득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1703년 영국은 포르투갈과 조약을 맺어 영국 상인이 포르투갈에 모직물을 면세로 수출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포르투갈인이 포도주(와인) wine를 영국에 면세로 수출하는 것을 허용했다.
영국과 포르투갈 간의 교역 증대는 영국에서 중요한 설탕 생산지이자 신세계 전체의 최대 아프리카 노예 시장인 포르투갈 식민지 브라질 Brazil과의 교역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상인은 브라질 교역로를 지배하게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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