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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영조의 '효손' 본문
영조英祖(재위 1724~1776)가 세상을 떠난 것은 재위 52년, 나이 83세 때인 1776년 3월 5일이었다.
병석에 누워 임종이 임박함을 느낀 영조에게 마음속 걱정이란 오로지 어린 왕세손인 정조正祖가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 또 대신들이 제대로 정조를 보필해줄 것인지였다.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까지 국정을 꾸려갔던 터라 그 걱정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거두지 못했다.
영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2월 7일 집경당緝敬堂(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책을 읽는 곳)에 나아가 왕세손과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이때 영조는 왕세손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조선시대에 승정원에서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의 기사를 삭제해달라고 요청한 효심에 감동하여 직접 '효손孝孫'(효성스러운 손자)이라 쓰고 이를 은銀 도장(은인銀印)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공표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2년(1776) 2월 7일자 기사에는 이때의 일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친히 효손 두 자를 써서 보寶(도장)를 주조鑄造하여(녹인 쇠붙이를 거푸집에 부어 물건을 만들어) 세손에게 주어 그 효성을 나타내려 한다'하매, 영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참으로 좋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판서를 시켜 주조를 끝낸 뒤에 가지고 들어오게 하라. 내가 (병석에) 누워서 친히 주려 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우리 손자의 지극한 효도를 팔방에 보일 수 있고 도 만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 은 도장과 관계된 일괄 유물이 있다.
하나는 '효손팔십삼서孝孫八十三書'라고 새겨진 거북 모양의 은 도장이다.
영조가 83세에 썼다고 낙관한 것이다.
도장은 주칠朱漆(누런색이 조금 섞인 붉은색의 칠)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데 상자에는 '어필은인御筆銀印'(임금이 글자를 쓴 은 도장)이라고 쓴 동판이 붙어 있다.
아울러 영조가 세손에게 이르는 글인 <유세손서諭世孫書>가 함께 전한다.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 임금이 25세 손자에게 의지한다. 오늘날 종통宗統(종가宗家 맏아들의 혈통)을 바르게 하니 나라는 태산반석처럼 편안하다. ······ ≪승정원일기≫의 세초洗草(삭제)는 실로 너의 뜻에 따른 것이다. 또 듣건대 어제 (사도세자) 무덤에서의 네 모습을 본 사람들은 눈물로 옷깃을 적시었다고 한다.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이 글은 나무통 안에 들어 있는데 겉에는 '어제유서御製諭書'(임금이 지어 이르는 글)라는 동판이 붙어 있다.
영조는 이 글을 쓰고 한 달 뒤인 3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효손孝孫'이라는 은 도장을 담은 상자와 <유세손서>를 넣은 나무통을 항시 지니고 다녔다.
멀리 행차할 때도 들고 오게 하여 자신 앞에 놓게 하였다.
정조 때 그린 의궤도儀軌圖(조선시대에,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하기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그린 그림)를 보면 옥좌 앞에 도장함과 나무통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조가 재위 25년 동안 그렇게 지니고 다녔기에 나무통엔 손때가 깊이 배어 있다.
<효손> 은 도장과 <유세손서> 나무통, 그리고 영조의 글을 보고 있자면 그 내용의 애절함에 가슴이 절로 뭉클해진다.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게 한 아비의 한과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종통이 지켜져야 한다는 늙은 왕의 간절한 소망이 절절히 다가온다.
조선왕조가 500년을 이어간 것은 절대로 저절로 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국가를 지키려는 왕가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간절한 내용 때문에 은 도장이 멋지고, 주칠상자가 아름답고, 영조의 글씨가 임종한 당년인지라 비록 흐트러짐이 있을지언정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생각은 한참 뒤에 일어나게 된다.
확실히 예술은 형식보다 내용이 먼저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5. 3. 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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