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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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창덕궁의 현판과 주련

새샘 2025. 2. 25. 18:36

"영조의 <영화당>엔 화색이 완연하네"

 

동궐도(부분), 19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273x576cm, 국보 제249호, 고려대박물관(출처-출처자료1)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었다.

경복궁의 별궁이 아니라 이궁離宮/离宮(행궁行宮: 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으로 세워진 또 하나의 궁궐이다.
경복궁이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태종이 궁궐을 또 지은 것은 경복궁의 풍수와 나쁜 기억 때문이었다.
 
경복궁은 정도전이 주도하여 지어질 때부터 말이 많았다.
풍수에 밝았던 재상 하륜은 상소를 올려 '경복궁 터는 산이 갇히고 물이 마르니 왕이 사로잡히고 족속族屬(같은 문중이나 계통에 속하는 겨레붙이)이 멸할 지형'이라며 공사를 중단하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이미 터를 다 닦았고 전각을 짓는 중이며 중국의 사신을 응접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곳에서 맞아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1398년(태조 7)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살해하고 당시 생존하고 있던 형들 가운데 맏형을 왕으로 앉힌 것이다.
얼떨결에 즉위한 정종은 경복궁 터가 좋지 않다면서 1399년(정종 1)에 태조가 즉위한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으로 왕궁을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 이방원은 정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아 태종으로 즉위한 뒤 곧바로 창덕궁 공사를 지시하였다.
중신들은 경복궁을 사용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태종은 경복궁은 터가 좋지 않고, 자신으로서는 형제를 죽인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창덕궁을 지었노라고 고백하였다.
그 대신 사신 접대 등 법궁法宮(으뜸이 되는 궁궐로서 정식 조회와 왕실의 생활이 이루어진 궁궐)으로서의 경복궁 지위는 유지하겠다며 자신의 약속을 분명히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박자청朴子靑에게 경복궁에 경회루慶會樓를 짓게 했다.
이리하여 1405년(태종 5) 창덕궁이 완공되자 태종은 다시 서울로 수도를 옮기고 창덕궁에서 집무했다.
 

태종 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풍수도 풍수지만 창덕궁은 산자락에 편하게 올라앉아 아늑하고 인간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덕궁와 창경궁을 합친 동궐東闕은 약 20만 평의 숲이 든든히 등을 받치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 창덕궁을 먼저 재건한 이후부터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창덕궁은 285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임금이 평소 거주하면서 정치 행위를 펼치는 궁궐) 역할을 했다.
사실상 조선 왕실의 역사는 창덕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대 왕을 거치면서 창덕궁의 뒷산은 정원으로 계속 개발되었다.
인조는 창덕궁 안으로 흐르는 옥류천玉流川에 인공 곡수曲水(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물)를 만들고 정자를 지었다.
정조는 부용정芙蓉亭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웠고, 순조는 99칸 양반가를 재현한 연경당演慶堂을 지었으며, 헌종은 자신이 기거할 낙선재樂善齋를 새로 지었다.
이를 후원後苑 또는 금원禁苑이라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더 이상 왕궁으로 사용되지 않으면서 창덕궁 전체를 비원秘苑이라고 부르며 이를 관리하는 비원청秘苑廳을 두었다.
이것이 창덕궁의 변천사이다.
 
창덕궁은 이런 연이은 증축으로 몇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왕실의 의식을 행하는 외조外朝 공간으로서 인정전仁政殿 권역, 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 권역, 국정 자문을 위한 학술기관으로서 규장각 권역, 사대부 생활공간을 본뜬 연경당과 낙선재 권역 그리고 옥류천, 부용정을 비롯한 후원 권역 등이다.
 

창덕궁은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나라 건축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건축과 정원의 해답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때문에 창덕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답사처가 되었다.

 

돈화문 현판(출처-출처자료1)

 
창덕궁을 답사하다 보면 잘생긴 전각, 아기자기한 연못과 정원, 아름다운 나무에 이끌려 눈이 잘 가지 않는 유물이 하나 있다.

궁궐의 현판懸板(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다는 널조각)과 주련柱聯(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이 그것이다.

현판과 주련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고 그 뜻과 글씨의 멋까지 알아볼 수 있다면 창덕궁 관람은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현판부터 그렇다.
돈화문은 육축陸築(석축石築: 성이나 문의 아래에 돌을 쌓아 만든 축대 부분)이 없기 때문에 경복궁의 광화문만큼 장중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판의 글씨를 보면 참으로 장중莊重하다(장엄하고 무게가 있다).
누구의 글씨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대자 천자문 大字 千字文≫을 연상케 하는 범적이면서 고고한 기품이 있다.
'돈화敦化'란 '교화敎化(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를 돈독敦篤히(도탑고 성실하게)한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에서 나온 말이지만 여기서는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 뜻이 얼마나 든든한가.
 
창덕궁의 현판들은 건물 개축을 거듭하면서 근래에 새로 제작해 단 것이 많다.
그런데 원래 모습을 갖고 있는 현판이 정말로 아름답다.
이상한 일이다.
왜 옛것이 새것보다 더 아름다울까.
글씨 문화만은 지금이 옛날만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당 현판(출처-출처자료1)

 

창덕궁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판을 꼽자면 단연코 영조가 쓴 춘당대春塘臺의 <영화당暎花堂> 현판이다.

본래 춘당대는 창경궁의 춘당지까지 연결된 넓은 공간으로 왕이 직접 참관한 가운데 과거시험이 치러지던 곳이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 급제할 때 시험 본 장소도 여기였다.
그때 시험문제로 나온 글이 '춘당대의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라는 뜻의 '춘당춘색 고금동 春塘春色 古今同'이었다고 한다.
 
춘당대 서쪽 끝, 부용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건물이 영화당이다.
1692년(숙종 18)에 건립된 것으로 여기서도 과거시험이 자주 치러지고, 무예청 무사들이 무술 시범을 보이기도 했으며, 왕이 활쏘기를 하고 신하들과 시회詩會를 열기도 했다.
'영화暎花'란 꽃이 '어우러진다'는 뜻이니 주변에 꽃이 많아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영조는 영화당 안에 역대 임금 다섯 분의 글씨가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시를 짓고 친히 써서 걸게 했다고 하는데 영화당 현판도 그때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판 글씨 앞뒤에 작게 '어필御筆, 갑술甲戌'이라고 새겨 있어 1754년(영조 30)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현판 글씨의 획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가느다라면서 쭉 뻗은 획에는 고아한 멋이 한껏 들어 있다.
글씨가 그 사람의 얼굴이라면 임금의 초상인 어진을 보는 듯하다.
본래 임금은 동궁 시절부터 글씨 수업을 받기 때문에 글씨를 잘 썼다.
그래서 이를 모아 ≪열성어필첩列聖御筆帖≫이라는 책을 꾸미기도 했는데 특히 선조, 숙종, 영조, 정조의 글씨가 가히 명필이라 할 만하다.
 
창덕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옥류천은 참으로 환상적인 공간이다.
넓은 바위에 물길을 돌려 작은 폭포를 이루게 한 기발한 구성의 곡수曲水가 일품인데 물이 돌아가도록 막고 있는 육중한 바위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와 숙종이 지은 오언절구가 새겨 있다.
인조의 옥류천이라는 글씨 또한 정중하면서도 아름답다.
숙종의 씨는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이 또한 왕궁에 걸맞은 단아한 서체이다.
숙종은 옥류천을 이렇게 읊었다.
 
"삼백 척 높이에서 날아 흐르니         (비류삼백척 飛流三百尺)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    (요락구천래 遙落九天來)
 바라볼 땐 흰 무지개 일어나더니       (간시백홍기 看是白虹起)
 갑자기 온 골짜기 우레 소리 이루었네  (번성만학뇌 飜成萬壑雷)"
 
연경당과 옥류천 사이 계곡에는 긴 연못이 있고, 연못가와 산자락에는 존덕정尊德亭, 청연각淸讌閣, 폄우사砭愚榭, 청심정淸心亭 등 여러 정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 중심이 되는 곳은 계곡에 바짝 붙어 있는 존덕정이다.
존덕정은 1644년(인조 22)에 세워져 처음에는 건물 모습대로 '육면정六面亭'이라 했다가 나중에 이름을 고쳤다.
 
존덕정은 육각형 지붕을 두 겹으로 올리고 그 지붕을 받치는 기둥을 별도로 세운 특이한 구조다.
특히 바깥 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세 개를 무리지어 세워서 튼실해 보인다.
이 존덕정 안에는 정조가 쓴 <만천명월 주인옹 자서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긴 글이 현판으로 새겨져 걸여 있다.
1798년(정도 22)에 정조가 지은 것으로 정조는 자서自序(스스로 지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달은 하나이나 물의 흐름은 만 갈래다. 물은 백성이고 달은 태극이니, 태극이란 바로 임금인 나이다."
 
얼핏 생각하면 임금의 권위를 앞세운 글로 비칠 수도 있지만 정조는 그런 분이 아니다.
진실로 만백성의 어둠을 비춰주는 임금이기를 소망한, 진실로 달빛 같은 계몽군주였다.
 

(위)관람정 현판, (아래)향천연지 각석(출처-출처자료1)

 
창덕궁에는 십여 개의 정자가 있는데 제각기 이름을 갖고 있으며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존덕정 앞 연못은 한반도처럼 생겼다고 해서 한때 반도지半島池라고 불렀지만 <동궐도형東闕圖形>을 보면 본래는 호리병 모양이었다.
이 연못가에는 관람정觀纜亭이라는 부채꼴 모양의 귀여운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에 걸려 있는 <觀纜亭> 현판은 예쁜 나뭇잎 모양로 귀염성이 넘친다.
 
이처럼 아기자기한 현판과 편안한 공간이 있어 우리나라 궁궐은 다른 나라의 궁궐과는 달리 마음이 편안해진다.
 

(위)장락문 현판, (아래)낙선재 현판(출처-출처자료1)

 
낙선재樂善齋는 본래 창경궁昌慶宮에 속해 있던 건물로 헌종의 왕비에게 후사가 생기지 않자 경빈김씨를 후궁으로 맞으면서 새로 지은 공간이다.
헌종은 자신의 서재 겸 사랑채도 함께 지으면서 양반 가옥처럼 단청을 하지 말라고 했다.
불과 5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헌종은 여기서 시서화를 즐겼다.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영향을 받아 청나라의 신문물에 심취해 있었기에 낙선재에는 청나라 학자의 글씨가 많이 걸려 있다.
<樂善齋> 현판은 추사의 친구이기도 한 섭지선葉志詵의 글씨이고 주련은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글씨다.
낙선재 현판 중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정문에 걸린 <장락문長樂門>이다.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중후함과 멋이 가히 감동적이다.
 
낙선재 뒤란(집 뒤 울타리의 안)으로 돌아 올라가면 승화루承華樓라는 서화고書畵庫가 있는데 후원 한쪽에는 반듯하게 잘 깎은 물확(돌확: 돌덩어리에 큰 홈을 파서 물을 담아 마당에 놓아 두는 전통 조경)이 있다.
물확의 한쪽 면에는 '향천연지香泉硏池'라고 새겨져 있다.
'향기로운 샘물 같은 벼루 모양의 연못'이라는 뜻이다.
이름도 아름답지만 글씨도 정말 예쁘다.
 

창덕궁엔 이처럼 아름다운 글씨들이 갖가지 형태로 곳곳에 있다.

그럼에도 창덕궁 안내책자를 보면 그 많은 현판 중 연경당 입구에 전서체로 쓰여 있는 불로문不老門 하나 정도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안타까워 필자는 문화재청장 시절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 연구를 의뢰하여 이광호 교수 책임 아래 ≪궁궐의 현판과 주련≫(수류산방, 2007)이라는 책을 세 권으로 펴낸 바 있다.
 
인문정신을 습득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문자의 해독과 문장의 이해이다.

한자를 읽을 수 없고, 또 그 뜻을 모르면 현판은 알지 못할 부적 글씨와 다름이 없다.

선조들의 정신이 들어 있는 한자와 한문을 외래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지게 하면 우리 전통 문화유산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이 지닌 깊은 뜻과 아름다운 멋을 관람자들이 가슴속에 담아갈 수 있는 문화적 성숙을 길러야 할 때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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