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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5: 러시아에서의 독재정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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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5: 러시아에서의 독재정치

새샘 2025. 2. 18. 23:21

러시아 제국의 팽창(출처-출처자료1)

 
한층 더 극적인 변화는 역동적인 통치자인 표트르 1세 Pyotr I (영어 Peter I)(재위 1672~1725) 치하의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표트르 1세(또는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는 그가 이룩한 업적만으로도 표트르 '대제'(영어 Peter the Great)라는 칭호를 얻을 만하다.
하지만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구와 농담을 하다가도 갑자기 격노하는 변덕스러운 성격 역시 그에게 그러한 칭호가 붙는 데 한몫했음에 틀림없다.
표트르는 자기 나라를 서유럽과 접촉하게 만든 첫 번째 차르 Tsar(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는 아니었지만, 그의 정책은 러시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이었다.
 
 

○표트르 1세의 치세 초기

 

표트르 대제의 1717년 초상화(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the_Great)

 
1613년 이래로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 Romanov dynasty의 지배를 받았다.
피에 굶주리고 반쯤은 미치광이었던 이반 4세 Ivan IV(재위 1533~1584)가 1584년 사망한 뒤 혼란스러운 '고난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 뒤 정치적 안정을 되찾으려는 로마노프 왕조의 시도는 얼마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1667~1671년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코사크 Cossack(반反자치적인 농민 기병대)의 지도자인 스텐카 라진 Stenka Razin(일명 스테판 라진 Stepan Razin)(1630?~1671)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남동 지역의 상당 부분을 휩쓸었던 것이다.
라진의 봉기는 억압받던 농노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Moscow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 볼가 강 Volga River 하류의 비非러시아계 부족들에게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알렉세이 1세 Aleksei I(영어 Alexis I 또는 Alex I)(재위 1654~1676)와 러시아 귀족은 열의는 가득했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한 10만 명 이상의 반란군을 살육하면서 스텐카 라진의 무리를 패배시켰다.
 
프랑스 France의 루이 14세 Louis XIV와 마찬가지로 표트르 1세는 소년 시절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그가 정치적 알력과 궁정 음모의 표적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1689년 17세가 된 표트르 1세는 배다른 누이 소피아 Sophia의 섭정을 무너뜨리고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장악했다.
젊은 차르는 러시아를 위대한 군사 강국으로 만들 결심을 하고 1690년대에 조선 기술을 연구하고 해군 건설을 도와줄 외국인 숙련 기술자를 구하기 위해 홀란드 Holland와 영국 England을 여행했다.
그런데 표트르 1세가 해외에 있는 동안 궁전 근위대(스트렐치 Streltsy)가 소피아를 복위시키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표트르 1세는 빈 Wien(영어 Vienna)에서 급거 귀국해 반란을 경악할 만큼 잔인하게 진압했다.
약 1,200명에 달하는 혐의자들을 즉시 처형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크렘린 궁 Kremlin Palace 벽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시신은 차르의 절대적 권력에 감히 도전하는 자들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여러 달 동안 매달린 채 썩어갔다.
 
 

○차르 국가의 변화

 
표트르 1세는 전통적인 러시아의 귀족에게 일련의 사회적·문화적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러시아를 서구화하려고 했던 차르로서 가장 유명하다.
그는 귀족에게 긴 수염과 늘어뜨린 소매를 자르도록 명했고, 바닥에 침을 뱉거나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을 금하는 예법에 관한 책을 출간했으며, 남녀 간에 점잖은 대화법을 장려했고, 귀족 여성에게는 결혼식, 주연, 기타 공적 행사에 남성과 더불어 서양식 복장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 귀족의 자녀는 교육을 위해 서유럽의 궁정에 위탁되었다.
표트르 1세가 세운 새로운 학교와 학원의 교사로 그리고 그가 건설하고자 하는 새로운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또한 차르의 육군, 해군, 행정 부문에 기여하기 위해 몇천 명의 서유럽 전문가들이 러시아로 초빙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중요했지만, 러시아를 근대화하고 서유럽화하고자 하는 표트르 1세의 욕구로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표트르 1세의 정책은 러시아인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목적은 러시아 사회를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군사 대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세대가 아니라 개인에게 세금을 부과했던 새로운 과세 체계(1724)는 러시아 농민 사회의 전통적인 구분을 거의 쓸모없게 만들었지만 전쟁을 위해 더 많은 돈을 거두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1722년에 부과된 표트르 1세의 품계표 Table of Ranks는 귀족계급에게 이와 비슷한 충격을 주었다.
표트르 대제 는 모든 귀족이 (하위) 지주 계급에서 (상위) 행정 계급과 (최고) 군사 계급으로 승진하도록 위계를 세워 러시아 귀족 사회의 전통적인 계급제도를 뒤집어놓았다.
그때까지의 전통적 방식은 출신에 따른 귀족을 능력에 따라 대두한 행정가와 군인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족계급을 차르를 위한 행정 및 군사적 복무로 끌어들이기 위해 강력한 새로운 유인책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전 러시아의 독재 군주로서 유럽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절대적인 주인이었다.

1649년 이후 러시아 Russia의 농민은 법적으로 지주의 재산이었지만 1750년 무렵 그중 절반은 농노였고 나머지 절반은 차르가 소유한 토지에 사는 국가 농민이었다.
국가 농민은 차르의 군대에서 병사로서, 차르의 공장에서 노동자로서(이들이 생산력은 포트르 대제의 치세에 엄청나게 증가했다), 또한 차르의 건설 사업에 강제 노동자로서 복무하기 위해 징집될 수 있었다.
하지만 농노 역시 차르로부터 과세되거나 자신의 영주가 그랬듯이 군 복무를 위해 소집될 수 있었다.

따라서 모든 러시아인 Russians은 계급이 무엇이든지간에 차르를 위해 봉사해야 했고 전 러시아는 어떤 의미에서 차르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집중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초보적인 의회인 두마 Duma를 군대와 민간 문제를 감독하는 임의로 선출된 9명의 행정관 집단인 상원으로 대체했고, 종교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 정교회의 일을 관장하는 제국 관리를 임명함으로써 정교회를 직접 통치했다.
그는 또한 전쟁에 필요한 것을 충당하기 위해 귀족 여부를 막론하고 선발한 사람들로 새롭고 규모가 크고 한층 더 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마련했다.
새로운 관료제에서의 지위는 출신에 의존하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의 주요한 조언자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멘시코프 Aleksandr Menshikov(1673~1729)는 요리사였지만 나중에는 공작이 되었다.
이 정도의 사회적 이동성은 당대의 어떤 서유럽 국가에서도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에 귀족의 지위는 모든 귀족이 표트르 대제의 군대나 행정에 참여해야 하는 공무 봉직에 달려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이 요구 사항을 강행하는데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고안한 행정 기구는 앞으로 200년 동안 러시아에 통치 계급을 제공해주었다.
 
 

○표트르 대제의 대외 정책

 

표트르의 대외 정책 목표는 러시아가 흑해 Black Sea와 발트해 Baltic Sea에서 부동항不凍港(일 년 내내 해수면이 얼지 않는 항구)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흑해에서 그의 적은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696년 그는 아조프 항 Azov port을 점령했지만 1711년 그 항구를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18세기 말까지 흑해에서 부동항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북부에서 표트르 대제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700년 그는 스웨덴 Sweden과 21년 전쟁이 될 전쟁을 시작했고 이후 발트해에서 지배 세력이 되었다.
1703년 무렵 표트르는 핀란드만 Gulf of Finland에 교두보를 확보했고 즉시 그곳에 자신이 상트페테르부르크(영어 Saint Petersburg)라고 이름 붙인 새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 Prussia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의 군대가 폴타바 전투 Battle of Poltava에서 스웨덴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던 1709년 이후 표트르의 새 수도 건설 작업은 가속화되었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영어 Palace of Versailles)을 모방하고 경쟁하기 위해 설계된 왕궁이 중심이었던 새 수도의 건설을 위해 수많은 농노가 징용되었다.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은 니스타드 평화조약 Peace Treaty of Nistad으로 종식되었다.
이 조약은 서유럽에서 위트레흐트 조약 Treaty of Utrecht이 발휘한 것에 견줄 만한 세력의 재편성을 동유럽에 가져다주었다.
스웨덴은 북해의 영토를 하노버 왕조 House of Hanover에게 그리고 발트해의 독일 영토를 프로이센에게 넘겨주었다.
핀란드만 전체, 리보니아 Livonia, 에스토니아 Estonia를 포함한 스웨덴의 동쪽 영토는 러시아로 넘어갔다.
스웨덴은 이제 북부 유럽에서 2류 국가로 전락했다.
폴란드 Poland-리투아니아 Lithuania는 살아남았지만 서쪽에서는 팽창하는 프로이센 세력과 동쪽에서는 확대되는 러시아 세력과 직면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시 쇠퇴하는 세력이었다.
18세기 말 이 왕국은 사라지고 그 영토는 한층 막강한 이웃 나라들이 집어삼키게 된다.
니스타드 평화조약에서의 승자는 프로이센과 러시아였다.
두 나라는 모두 발트 해안을 따라 영토를 확보했고, 수지맞는 서유럽과의 곡물 무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표트르의 승리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치세 동안 직접세는 무려 500퍼센트나 증가했고 그의 군대는 1720년대에 30만 명을 넘었다.
표트르는 러시아를 유럽 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만들었으나, 특히 러시아 귀족계급에게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표트르의 유일한 아들이자 상속자인 알렉세이 Alexei는 차르에 대항한 음모의 구심점이 되었고, 표트르는 마침내 1718년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를 체포해 처형했다.
그리하여 1725년 표트르가 사망했을 때 그는 자신을 승계할 아들을 두지 못했다.
궁전 근위병이 옹립한 몇 명의 무력한 차르가 이어지면서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표트르 대제가 이룩한 개혁의 상당 부분을 무위로 돌렸다.

하지만 1762년 왕위를 계승한 예카테리나 대제(영어 Catherine the Great)의 야망과 결의는 위대한 전임자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예카테리나 대제와 폴란드의 분할

 

예카테리나 대제 초상(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8%88%EC%B9%B4%ED%85%8C%EB%A6%AC%EB%82%98%202%EC%84%B8)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예카테리나 대제)(재위 1762~1796)는 1762년 자신의 남편이자 나약한(그리고 아마도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표트르 3세 Pyotr III가 죽자 제위에 오른 독일인이었다.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가 일을 꾸미는데 도움을 주었을 궁전 쿠데타로 폐위되어 처형되었다.
예카테리나는 계몽된 통치자(그녀는 프랑스 계몽 철학자들과 서신 교환을 했으며, 희곡을 쓰고 러시아 역사를 집필했다)의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자신을 제위에 올려준 귀족계급의 지지를 잃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은 병원과 고아원의 설립, 지방 귀족을 위한 초등학교 체제의 창설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같은 시대의 계몽적인 절대 군주인 오스트리아 Austria의 요제프 2세 Josepoh II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der Große(영어 Frederick the Great)처럼 1767년 그녀는 러시아의 법을 법전화하고 개정하기 위해 위원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법의 급진적 조항(사형제의 폐지, 사법상 고문의 금지, 농노의 판매 금지 등)은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그러한 조치들이 실시될 가능성은 1773~1775년 에밀리안 푸가초프 Yemelyan Pugachev(1742~1775)라는 코사크인 Cossack이 이끄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 잠시 모스크바를 위협했을 때 사라지고 말았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정부를 더 한층 중앙집권화하고 농민층에 대한 귀족의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반란에 대응했다.
 
예카테리나의 가장 큰 업적은 전쟁과 외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1769년 그녀는 흑해에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한 표트르 대제의 시도를 재개했다.
그 결과 오스만튀르크 Ottoman Turk와 치른 전쟁(1774년 종전)에서 러시아는 흑해의 북부 해안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고 크림 Crimea(1783년 러시아에 합병)의 독립을 지켜냈으며, 러시아 선박이 보스포루스 해협 Bosp(h)orus Strait을 통해 지중해地中海 Mediterranean Sea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다.
또한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도나우 강 Danube River 연안에 있는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의 몇몇 지방에 대한 통제권도 획득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발칸 반도 Balkan Peninsula 진출은 오스트리아를 놀라게 했다.
오스트리아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러시아 제국이 자국 남부의 코앞에 도달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프로이센 역시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으로서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진정한 이해관계는 자국에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안으로 폴란드의 분할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따르면, 도나우 정복을 포기한다면 러시아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100만 명에서 200만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 Polish을 포함한 폴란드 동부의 곡창 지대를 차지할 수 있고, 오스트리아는 250만 명의 폴란드인을 포함한 갈리시아 Galicia를 갖게 되면,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Brandenburg와 포메라니아 Pomerania를 동 프로이센과 분리시켜놓고 있는 그단스크 Gdańsk(독일어: 단치히 Danzig) 항을 포한한 폴란드의 해안 지역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1772년에 확정된 이 협약의 결과 폴란드는 영토의 약 30퍼센트와 인구의 절반 가량을 상실했다.
 
폴란드는 이제 정치적 보수주의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폴란드의 귀족계급은 주요 중부 유럽 세력 중에서 유일하게 군주정으로의 중앙집권을 향한 어떠한 움직임도 자신의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이에 반대했다.
그 자유 중 하나는 모든 귀족이 폴란드 대의기구, 즉 국회 Diet에서 제안된 어떤 법안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폴란드의 귀족은 폴란드 국왕 선거에서 투표의 대가로 외국 세력에게 뇌물을 받을 정도였다.
1764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연인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포냐토브스키 Stanisław Poniatowski (재위 1764~1795)가 폴란드의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되는데 개입했다.
1772년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나약했던 스타니스와프 국왕은 마지못해 자기 나라 즉 폴란드의 분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788년 그는 자신의 왕국에 남아 있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 발발한 러시아-튀르크 전쟁 Russo-Turkish wars을 이용했다.
그리하여 1791년 5월 이전에 존재했던 것보다 한층 더 강력한 군주정을 세우는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1792년 1월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끝나자 예카테리나 대제가 갑자기 덤벼들었다.
1793년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함께 비준 과정에 있던 새 헌법을 파괴하고 폴란드의 거대한 두 지역을 날름 삼켜버렸다.

1795년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이 마지막 한 조각마저 먹어치우자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에는 전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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