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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궁모란대병

새샘 2025. 2. 13. 22:07

"축제의 현장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부귀의 상징"

궁모란대병(6곡 병풍), 19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각 폭 192.5x71.0cm, 개인(출처-출처자료1)

 

조선왕조는 개국 때부터 도화서圖畫署(처음에는 도화원圖畫院이라 했다)를 설치하여 왕실과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에 관한 일을 전담케 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1484)이 완성된 성종(완성 당시의 이름은 ≪을사대전乙巳大典≫) 때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의 정원은 20명이었으며, 조선 후기고 들어오면 나라 살람이 커지면서 정조 때의 ≪대전통편大典通編≫(1785)에서는 정원이 30명으로 늘어났다.

고종 때는 왕조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을 반포하면서 각 관아의 시행 규정을 명시한 ≪육전조례六典條例≫(1867)도 간행하였는데 여기서는 도화서 화원 30명에 생도生徒 30명이 추가되었다.

 

≪육전조례≫는 도화서 화원의 임무를 아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화원들이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말해준다.

이에 따르면 화원은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비롯하여 어보御寶(국새)와 관인官印에 필요한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그림의 제작을 담당했다.

 

"궁전 각 처소에 필요로 하는 일월오봉병, 가례嘉禮(궁중 결혼식) 때 사용하는 병풍과 장막帳幕(둘러치는 막), 보수褓繡(커튼), 사신 접대에 사용되는 병풍인 칙사병勅使屛 등 각종 궁중 장식화의 제작"

 

궁모란대병(6곡 병풍) 부분(출처-출처자료1)

 

'궁중 장식화의 제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모란병풍牡丹屛風이었다.

가례가 있을 때면 십여 틀씩 새로 제작하여 연회장을 장식하였다.

가례뿐만 아니라 임금의 50세 축하연, 왕대비의 환갑연 또는 종묘제례 같은 길례吉禮(관례나 혼례 따위의 경사스러운 예식) 때도 모란병풍을 야외에 설치했다.

유득공柳得恭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궁중의 공식적인 잔치인 공연公燕에서는 제용감濟用監(궁중의 재물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마련한 모란대병을 사용한다."

 

이를 궁모란대병宮牡丹大屛이라 하며, 오늘날에도 제법 많이 전해져 국립고궁박물관에만 거의 100틀이 소장되어 있다.

궁모란대병은 대개 19세기 작품으로 도상에 일정한 형식이 있다.

4폭, 6폭, 8폭, 10폭으로 연회장의 크기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하였는데 대개 각 폭마다 곧게 뻗어 올라간 줄기 서너 개에 활짝 핀 꽃 아홉 송이와 꽃봉오리 세 송이가 맺혀 있고 바닥엔 신비로운 형태의 괴석怪石이 그려져 있다.

 

꽃송이는 빨강·하양·노랑·분홍이고, 줄기는 갈색, 잎은 초록색이어서 오색이 현란하다.

장식을 위한 것이기에 꽃과 꽃잎이 추상적으로 변형되었고 똑 같은 그림이 동어반복식同語反復式으로 펼쳐져 현대미술의 올 오버 페인팅 all over painting(전면균질 그림: 화면 전체를 동일한 방법 및 같은 강도로 칠한 그림) 같은 공간 확대감이 일어나며 더없이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궁모란대병 또한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왕조 궁중문화가 낳은 대단히 현대적이고 조형적인 발상의 그림이다.

 

그렇다고 모란 그림이 왕실의 전유물이거나 상징은 아니었다.

예부터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꽃의 왕(화왕花王)'으로 불리며 왕실부터 민간까지 널리 사랑받아왔다.

문헌상으로는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나타나며 고려 상감청자와 고려불화, 조선 분청사기와 청화백자에서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어 왔다.

그런 모란 그림을 조선왕조는 궁중미술답게 정형화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궁모란대병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정형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로 생각된다.

18세기 장황粧䌙/裝潢(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이나 족자 따위)을 간직한 <궁모란병풍>(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10폭 전체가 하나의 화폭으로 되어 있어서 필시 고식古式(옛날의 법도와 양식)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의 양식이 정착하려면 이런 과정을 거치곤 한다.

 

궁모란대병의 형식은 민간에도 그대로 전래되어 수없이 많은 민화 모란병풍이 전하고 있다.

민가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는 거의 반드시 모란병풍을 치고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였다.

그래서 각 마을에는 상여와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는 모란병풍이 있었다.

그러니 모란병풍이 얼마나 많았을지 능히 짐작된다.

서민적으로 변형된 민화 모란병풍도 나름의 멋이 있지만 화가의 기량, 안료의 질, 크기에서 궁모란대병과 비교할 것이 못 된다.

그래서 유득공은 이렇게 증언했다.

 

"사족士族(양반)들이 혼례 때면 제용감에서 제작해둔 궁모란대병을 빌려다 쓰기도 한다."

 

궁모란대병은 조선시대 왕실문화가 낳은 독특한 형식의 아름다운 장식화인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5. 2.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