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4: 중부·동부 유럽의 재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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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4: 중부·동부 유럽의 재편

새샘 2025. 2. 12. 23:28
중부 유럽의 절대주의 통치자들
프랑스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1세
      카를 6세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

러시아
      표토르 대제
      예카테리나 대제


1643~1715년
1715~1774년
1774~1792년


1640~1688년
1688~1713년
1713~1740년
1740~1786년


1658~1705년
1711~1740년
1740~1780년
1765~1790년


1689~1725년
1762~1796년

 

1700년대 유럽 국가들의 영토(원본 출처-아틀라스 Atlasnews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17)

 

1680~1720년의 40년 동안은 중부·동부 유럽의 세력 균형을 재편성하는 결정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합스부르크 왕조 Habsburg Dynasty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Austria-Hungary Empire은 중부·남부 유럽에서 주도적 세력으로 등장했고, 북쪽에서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Brandenburg-Prussia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극적인 변화는 러시아 Russia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러시아는 스웨덴 Sweden과의 오랜 전쟁 끝에 발트 해 Baltic Sea에서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고, 곧어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Poland-Lithuanian Commonwealth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1683년 오스만튀르크 Ottoman Turk는 빈 Wien(영어 비엔나 Vienna)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고, 급파된 7만 명의 폴란드 Poland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수도를 포위망에서 구해냈다.
이후 남동 지역에서 오스만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1699년 무렵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의 대부분 지역을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으로부터 탈환했고, 1718년 무렵 헝가리 전 지역과 트란실바니아 Transilvania의 세르비아 Serbia를 장악했으며, 1722년 폴란드로부터 슐레지엔 Schlesien 영토를 획득했다.
이제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완충 국가가 되자 빈은 18세기 유럽의 위대한 문화적·정치적 수도 중 하나로 떠올랐고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중재국 중 하나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신성로마제국 Holy Roman Empire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고 1713년 이후에는 네덜란드 Netherlands와 이탈리아 Italia에 영토를 보유했지만, 이 왕조의 실질적인 권세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Bohemia(현 체코 Czech의 프라하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지역), 모라비아 Moravia(현 체코의 동부 지역), 갈리시아 Galicia(현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동부 지역), 헝가리 등에 미쳤다.
이들 영토는 지리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인종·종교·언어 면에서는 크게 달랐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자들이 중앙집권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의 제국은 매우 성격이 다른 영토와 보유자의 느슨한 연합체로 남았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합스부르크 제국 Habsburg Empire의 황제는 농민에게 영주를 위해 1주일에 3일을 무보수로 일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수출용 작물을 생산하도록 영주를 적극 지원해주었다.
그 대신에 이들 영토의 지주 엘리트 élite(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황제가 전통적인 입법 회의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축소하는 것을 용인했다.
하지만 헝가리에서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귀족층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그러한 유혹에 저항했다.
그 결과 헝가리는 제국 안에서 오스트리아인이 헝가리의 지원을 결코 당연시할 수 없는 반半자치적인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1740년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재위 1740~1780)와 그의 아들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 1765년에서 1780년까지 두 사람은 공동 통치자였다)는 그들의 제국 안에서 '계몽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방식을 개척했다.
그것은 빈으로 행정을 중앙집권화하고 세금을 증액하고 직업적인 상비군을 창설하고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국가 차원의 초등 교육제도를 신설하고 검열을 완화하며 한결 자유주의적인 새 형법을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절대주의는 그것이 계몽적이든 아니든 항상 제국 영토의 다양함과 지방 정부 제도의 취약성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등장

 
오스만 제국이 붕괴된 이후 오스트리아의 주된 위협은 떠오른 세력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Brandenburg-Prussia이었다.
오스트리아처럼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왕가House of Hohenzollern의 상속으로 획득된 지리적으로 나누어진 몇 개의 영토로 구성된 혼성 국가였다.
하지만 이 왕조의 주요 보유지는 수도인 베를린 Berlin을 중심으로 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Electorate of Brandenburg과 동프로이센 공국 Duchy of East Prussia이었다.
이 두 영토 사이에는 (스웨덴이 권리를 주장하는) 포메라니아 Pomerania(발트해 남쪽 연안 지역으로 현재는 거의 폴란드 영토)와 그단스크 Gdańsk(독일어로 단치히 Danzig) 항구를 포함하는 폴란드 왕국의 중요 부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엔촐레른 왕가의 목적은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영토를 확보해 통일시키는 것이었는데, 1세기 이상 지속적인 국가 건설 과정을 거쳐 결국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 과정에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중부 유럽의 군사적 강국으로 성장했고, 18세기 중엽 세력 균형 외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프로이센이 강성해 지는데 초석을 놓은 인물은 '대선제후大選帝侯 Great Elector'('선제후'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정하는 선거인단을 말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제후를 대선제후라고 부른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재위 1640~1688)이었다.
그는 1650년대 스웨덴에 대항한 전쟁에서 폴란드 편을 들면서 폴란드 왕에게 동프로이센에 대한 명목상의 지배권을 양도받았고, 1670년대에는 능란한 외교 솜씨를 발휘해 전쟁에서 획득한 포메라니아를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웨덴에 돌려주고 그 대신 프랑스의 공격으로부터 서부 지방을 보호했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 위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선제후 프리드리히가 군대를 창설하고 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재원을 동원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자신의 영토에 있는 강력한 귀족(융커 Junker)에게 휘하 농민을 농노로 격하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주고 군대의 장교단 구성을 그들에게 의존하면서 과세의 면제를 보장해줌으로써 그가 영토의 나머지 지역에 부과한 효과적이면서도 대단히 독재적인 과세 체제에 대한 귀족의 지원을 얻어냈다.
자신의 영지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고 서유럽과의 곡물 무역에서 얻은 이윤으로 부유해진 융커 계급은 프로이센의 국가 관리를 중앙집권화한 관료제에 넘겨주는 것에 만족했다.
이 관료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프로이센 군대의 규모와 군사력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군대는 대선제후가 통치하는 광범위한 영토에 대한 그의 통치력을 강화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대선제후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재위 1688~1713)는 에스파냐 España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원함으로써 스스로 프로이센 왕이라 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오스트리아 군주는 왕을 만들어낼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1세는 스웨덴에 대항한 북방 전쟁 Northern War(1700~1721)에서 러시아 편에 가담함으로써 포메라니아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확장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하지만 국왕으로서 주된 관심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선례를 따라 새로운 왕국의 수도인 베를린의 문화생활을 발전시키는데 전념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Friedrich Wilhelm I(재위 1713~1740)는 할아버지의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최고 수준의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것에 매우 골몰했던 그는 '하사관 왕 sergeant king'이란 별명을 얻었다—이었다.
그의 치세 동안 프로이센 군대는 3만 명에서 8만 3,000명으로 증강되어 프로이센은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네 번째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키 180센티미터가 넘는 병사로만 구성된 '포츠담 거인 부대 Potsdam Giants"라는 비밀 연대를 창설함으로써 또 다른 방식으로 프로이센 군대의 규모를 증강시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징수 방법을 간소화하는 한편 궁정에서 값비싼 사치품을 멀리하도록 했다.
그는 개인적 식도락食道樂(여러 가지 음식을 두루 맛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일)에 국가 재원을 낭비하는 것을 너무도 꺼려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귀족의 식사 자리에 불청객으로 불쑥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절대주의의 활동무대는 궁전이 아니라 자신이 아끼는 군대와 그 군대를 유지하는 국가의 관직을 몸소 감독했던 사무실이었다.
 
무뚝뚝하고 상상력이 빈곤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도 아들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만은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군대보다 플루트 flute에 더 열심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경멸했던 아버지와는 반대로 프랑스 문화를 찬양했다.
젊은 날 프리드리히 2세가 반항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18세였던 1730년에 한 친구와 함께 궁정을 뛰쳐나와 도망을 쳤다.
두 사람은 곧 붙잡혀 왕 앞에 끌려왔고 왕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친구를 처형해 버렸다.
프리드리히 2세는 무서운 교훈을 얻었다.
이후 그는 음악과 문학에 대한 사랑을 결코 잊지 않았지만 왕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국가의 첫 번째 공복'이라는 자신의 이미지에 맞게 생활했으며,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the Great'이라는 역사적 칭호를 얻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만들었고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은 프로이센을 주요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740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부왕이 결코 전투에 투입한 적이 없었던 군대를 동원해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 지방을 점령해버렸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에 대해 아무런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부유하면서도 방어가 매우 취약한 그곳을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점령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에 대해 반격을 가했고 영국과 헝가리가 지원했지만 슐레지엔을 되찾을 수 없었다.
초기의 성공에 고무된 프리드리히 대왕은 나머지 통치 기간을 슐레지엔에서 자신이 획득한 것을 공고히 하면서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 사이에 있는 폴란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는데 보냈다.
부단한 외교적 노력과 빈번한 전쟁을 통해 프리드리히 대왕은 1786년 무렵 프로이센을 서로 연결된 막강한 영방領邦 왕국(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으로 변모시키는데 성공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의 적들에 대항해 국내의 연합전선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정책에 대한 융커 계급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출신보다는 능력으로 공무원을 선발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대와 확대되는 행정에 필요한 인력의 충원을 귀족에 의존했다.
놀랍게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략은 적중했다.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럽에서 가장 고도로 전문적이고 효율적인 관료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국내 정책에서도 융커 계급이 민감해 하는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동시대인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Joseph II와 마찬가지로 계몽적인 절대 군주였다.
그는 기소된 범죄자에 대한 고문과 재판관에 대한 뇌물 공여를 금지시키고 초등학교 제도를 수립하는 등의 사회 개혁을 감독했다.
그는 강력한 반反유대주의자였지만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권장했으며, 심지어 이슬람 교인의 수가 이슬람 사원을 채울 정도로 충분하다면 베를린에 기꺼이 사원을 세워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왕령지王領地(임금의 권한이 미치는 지역)에서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농민에 대한 강제 부역을 줄여주었으며,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장기 임차를 허용했다.
그는 과학적 임업과 새로운 작물의 경작을 장려했으며, 슐레지엔에 새로운 토지를 개간하고 그 땅을 경작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고, 전쟁으로 농경지가 폐허가 되었을 때 농민에게 새로운 가축과 농기구를 공급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개혁을 결코 귀족의 영지까지 확대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경우 프리드리히 대왕이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집단을 소외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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