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흐의 4원칙 본문
로베르트 코흐 Robert Koch(1843~1910)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고향 소녀 엠마 프라츠 Emma Fraazt에게 청혼했다.
도시 생활이 싫었던 그녀는 코흐가 시골에서 의사 생활을 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했다.
무료한 시골 의사 생활을 하며 코흐는 작은 실험실을 만들어 개인 연구를 했는데, 시골 생활을 선뜻 받아들인 남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낀 아내가 현미경을 선물했다.
그것은 인류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탄저병炭疽病 anthrax'이란 질환이 있다.
흙 속에서 번식하는 탄저균 Bacillus anthracis이라는 세균이 동물이나 동물을 기르는 사람에게 옮는 병이다.
피부 감염이 되면 피부가 까맣게 썩는 듯 변하는 증상이 특징이다.
이 병에 걸린 동물은 대부분 혈액의 심한 염증인 패혈증으로 하루이틀 만에 죽고 만다.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데, 이를 이용해 탄저균이 생물테러 bioterrorism에 이용되기도 했다.
막대기 모양의 탄저균 자체는 쉽게 파괴되는 경향이 있지만, 탄저균이 똘똘 뭉쳐 내생포자 endospore 상태로 변신하면 아주 극한환경에서도 장기간 살아남아 내생포자 상태로 동물에게 옮겨가고, 동물의 몸 안에서 다시 활동성 탄저균으로 발아되면서 치명적인 패혈증을 일으킨다.
현미경을 선물 받은 코흐가 살던 지역에도 탄저병이 유행해 많은 동물과 동물을 사육하는 축산업자들이 죽어갔다.
코흐는 탄저병을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기존의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았다.
주로 수의사들의 연구였다.
수의사들은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의 혈액에서 막대기 모양의 미생물을 발견했으나 이것이 질병의 원인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막대기 모양의 세균을 '막대균(간균桿菌) bacillus 또는 rod 또는 rod-form bacteria'이라 부른다.
코흐도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니 역시 막대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을 실험용 쥐에게 주사했다.
주사를 맞은 쥐는 하루 만에 탄저병 증상을 보이며 죽었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만으로 막대균이 탄저병을 일으킨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막대균 이외에 다른 혈액 성분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코흐는 막대균만 따라 분리해 키우기로 했다.
이처럼 미생물을 실험실의 일정한 배양 용기에서 따로 키우는 것을 '배양培養 culture'이라 한다.
시행착오 끝에 탄저균을 배양하는데 성공한 코흐는 배양한 균을 다시 실험동물에 주입해 탄저병이 발생한 것을 확인했다.
코흐는 추가 연구를 통해 탄저균이 외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해 잘 죽지만, 그것들이 내생포자로 변하면 저항력이 강해져 장기간 땅속에 숨어 있다가 다시 동물을 감염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코흐는 탄저병의 원인균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탄저병을 예방하려면 죽은 동물의 사체를 불태우거나 아주 깊은 곳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화려하게 미생물학계에 데뷔 début했다.
그리고 1876년 유명한 '코흐의 4원칙 Koch's postulates'을 발표했다.
그는 어떤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임을 주장하려면 다음 4가지 규칙에 모두 맞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코흐의 4원칙 -
1. 병원균이 환자(또는 병든 동물)에게서 발견되어야 한다.
2. 병원균만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3. 분리한 병원균을 실험동물에 접종하면 같은 병이 생겨야 하다.
4. 같은 병이 생긴 실험동물에게도 같은 병원균이 발견되면서 분리되어야 한다.
코흐가 탄저균과 탄저병이 자신이 주장한 4원칙에 완전히 들어맞음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질병과 미생물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규명되었음을 뜻한다.
시골에 있는 한 의사의 빈틈없는 논리적 연구 결과에 의료계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코흐는 더 이상 시골 마을에 묻혀 있을 평범한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1880년 베를린 Berlin에 있는 정부 기관인 제국보건국 The Imperial Health Office의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882년에는 고위 간부직인 내각 고문관 Geheimer Regierungsrat으로 승진하였다.
1885년 베를린대학교 Berlin University 의과대학 Faculty of Medicine 교수 및 위생연구소 Hygienic Institute 소장이 되어 대학에서 일하다가 1891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왕립 프로이센 감염병연구소 Royal Prussian Institute for Infectious Diseases(현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 Robert Koch Institute)의 소장이 되었다.
이 연구소는 1887년 설립된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 Institut Pasteur와 라이벌 rival 관계를 형성하며 선의의 경쟁을 했으며, 한 차원 높은 본격적인 미생물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코흐는 병원균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미생물이 더 잘 보이도록 염색하는 방법과, 그것을 현미경에 연결한 사진기를 통해 촬영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미생물 사진이 논문에 첨부되면서 여러 학자들이 발견한 것을 서로 정확히 볼 수 있게 되어 미생물학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코흐는 병원균을 분리, 배양하는 도구인 '배양 배지 culture medium'를 개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연구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율리우스 페트리 Julius Richard Petri라는 연구원이 만든 '페트리 접시 Petri dish'는 지금도 과학 실험실에서 많이 보는 납작한 유리 접시 또는 플라스틱 접시다.
뚜껑을 닫을 수 있는 접시여서 코흐는 좁은 실험실에서 많은 세균을 오염 걱정 없이 관찰하고 배양할 수 있었다.
연구원의 아내가 그녀의 할머니가 만든 젤리 jelly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했을 때 코흐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우뭇가사리를 삶아 만든 우무(한천寒天) agar를 페트리 접시에 붓고 딱딱하게 굳혀 만든 '우무배지(한천배지寒天培地)'가 그 결과물이었다.
여기에 미생물을 발라놓으면 그 안에서 미생물이 무럭무럭 자랐으며, 굳은 고체 배지여서 흘러내리지 않아 보관하기도 간편했다.
이로써 현재까지 사용하는 완벽한 세균 배양 용기가 만들어졌다.
탄저균에 이은 코흐의 다음 미션 mission은 '결핵結核 tuberculosis'이었다.
당시 결핵 환자들은 몸이 계속 약해지면서 창백해지다가 이유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갔다.
청진기聽診器 stethoscope를 발명했던 의학자 라에네크 René Laennec도 결핵으로 사망했을 정도였다.
결핵보다 더 무서운 병이었던 천연두天然痘 smallpox가 제너 Edward Jenner에 의해 예방 백신 접종으로 사망자가 줄어들면서 결핵은 1800년대 사망 1위의 질환이 되었다.
교통이 발달하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의 그들의 비참한 주거 환경은 결핵이 전염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결핵을 치료하려면 일단 원인이 되는 병원균을 찾아야 했다.
코흐는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결핵균 Mycobaterium tuberculosis을 발견하기 위한 염색 재료와 페트리 접시에서 배양할 수 있는 배지의 성분을 찾아냈고, 마침내 자신의 4원칙에 들어맞는 결핵 원인균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쁜 공기, 유전, 영양실조가 아닌 작은 미생물이 결핵의 원인임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코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1882년 3월 24일 발표했는데, 이날은 미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시작된 날이자 '세계 결핵의 날
World Tuberculosis Day(World TB Day)'이 되었다.
코흐는 이 업적으로 19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코흐의 다음 목표는 '콜레라 cholera'였다.
존 스노 John Snow가 원인을 찾아 런던 London 거리를 배회했던 그 콜레라다.
콜레라는 콜레라균 Vibrio cholerae에 의해 죽을 만큼 심한 설사가 유발되는 전염성 질환이다.
코흐는 콜레라가 유행하는 인도 India에 가서 원인균인 비브리오균 Vibrio을 분리해냈다.
코흐가 작은 세균이 콜레라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을 때 막스 폰 페텐코퍼 Max von Pettenkofer(1818~1901)라는 동료 학자가 강하게 반발한 사건이 있었다.
페텐코퍼는 작은 미생물이 몸 안으로 들어가 콜레라가 생긴다는 코흐의 이론에 동의할 수 없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병에 든 콜레라균을 직접 마시기까지 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설사만 약간 했을 뿐 멀쩡했다.
그렇다고 페텐코퍼의 에피소드가 단지 새로운 의학적 발견을 폄하하려는 기존 의학자들의 모습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페텐코퍼는 평생 동안 공중위생 public health을 개선하기 위해 싸워온 학자로서 코흐의 발견이 질병의 원인을 단지 세균으로만 한정한다는 데 반대했던 것이다.
그가 강조한 공중위생(신선한 공기와 깨끗한 물)이나 인체 저항력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콜레라균을 마신 페테코퍼가 멀쩡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덕분에 세균 이론이 널리 인정받는 데 약간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세균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해도 그에 대한 치료제가 없었기 때문에 어차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페니실린 penicillin은 1940년대에 개발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콜레라균을 마신 페텐코퍼의 제자들은 몹시 고생했다고 한다.
페텐코퍼는 제자들을 보면서 요즘 젊은 애들은 몸이 약하다고 생각했을까?
결핵은 코흐에게 큰 영광을 가져다준 질병이지만 아쉽게도 위기를 선사하기도 했다.
코흐 연구소와 연구 경쟁을 하던 파스퇴르 연구소가 코흐가 처음 발견한 탄저균의 백신을 먼저 만들어내자 마음이 급해진 것이 원인이었다.
파스퇴르가 기자들을 불러 탄저균 백신 공개 검증을 받았던 사실은 앞서 살펴보았다.
코흐는 결핵 치료제를 먼저 찾아냄으로써 상황을 역전시키고 싶었다.
코흐는 글리세린 glycerin(또는 글리세롤 glycerol)이라는 화학물질에 녹인 결핵균 배양액이 실험동물의 결핵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그 물질은 결핵균을 죽이지 못하고 단지 결핵에 감염된 조직을 통째로 파괴한 것이었음이 밝혀졌지만, 하루빨리 성과를 내어 명성을 되찾고 싶었던 당시의 코흐는 이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자세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코흐의 결핵 치료제가 1890년 세상에 공개되었다.
세계적인 의학자 코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결핵 치료제를 발견했다고 발표하자 의학계는 열광했다.
수많은 환자들과 의사들이 그의 결핵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갈색의 투명한 치료제의 이름은 '투베르쿨린 tuberculin'이었다.
불안한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해에 시행된 투베르쿨린 임상실험은 대실패로 끝났다.
투베르쿨린을 접종받은 환자들은 증상이 전혀 호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여기저기서 이상 반응만 보고되었으며, 심지어 약물 투여 후 사망한 환자도 있었다.
거기에 코흐의 사생활 문제가 불거져 사회적인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현미경을 사준 조강지처와 이혼한 코흐가 젊은 여성과 재혼한 것이다.
그런데도 코흐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는 실패한 치료제인 투베르쿨린이 치료에는 효과가 없지만 결핵 진단에 효과가 있음을 밝혀냈다.
결핵 백신 vaccine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싶었던 코흐의 꿈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점차 이루어졌다.
1906년 칼메트 Albert Leon Calmett와 게랑 Camile Guérin이 공동으로 결핵 백신을 만들었다.
백신의 이름은 연구자의 이름을 따서 BCG(Bacille Calmett-Guérin 칼메트-게랑 막대균) 백신이 되었다.
평생을 미생물 연구에 바친 로베르트 코흐는 1910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베를린의 왕립 프로이센 감염병연구소는 이름을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로 바꿔 인류에 대한 그의 공헌을 기념했다.
1676년 네덜란드의 렌즈 수리공이었던 레벤후크 Antoni van Leeuwenhoek가 구식 현미경으로 처음 발견한 지 200년이 지나도록 미생물의 역할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들이지 감염을 일으킨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1800년대 이후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Ignaz Semmelweis,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 조지프 리스터 Joseph Lister라는 걸출한 의학 과학자들과 로베르트 코흐에 의해 마침내 미생물이 병을 일으킨다는 세균설細菌說 germ theory이 증명되었다.
이제 의사는 환자들이 왜 감염병이 걸렸는지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였을까?
청결이 강조되면서 손 씻기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원칙이 되었고, 권위 있는 의사의 상징이었던 피 묻은 가운과 턱수염은 점차 사라졌다.
의학자들은 세균이라는 질병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의학자들의 목표는 예방접종이 아닌 직접적으로 세균을 공격하는 것이 되었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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