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책가도 본문
"여가가 없을 때는 책가도를 보며 생각했다"
궁중 장식화에는 기본적인 도상圖像(미술 작품에 나타난 인물이나 형상)이 몇 가지 있었지만 그것이 궁중을 장식하는 그림의 전부는 아니었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산수화나 화조화도 있었고, 시대의 취미 변화에 따라 새로운 소재가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정조는 문예부흥기의 계몽군주답게 미술문화에서도 획기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국정을 자문할 수 있는 학술기관으로 규장각을 설치하고 이곳에 도화서 화원과는 별도의 차비대령화원을 두어 보좌하게 했다.
그리고 정조시대에는 단원 김홍도 같은 뛰어난 화가가 있어 시대의 회화적 요청에 훌륭히 응함으로써 풍성한 미술문화를 이룩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타난 그림이 <책가도冊架圖>다.
책가도는 서가에 책이 가득 놓인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책거리병풍'이라고도 한다.
책가도는 정조 이래로 크게 유행했다.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1815년)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정조는 화공에게 명하여 책가도를 그리게 하여 자리 뒤에 붙여두시고 업무가 복잡하여 여가가 없을 때는 이 그림을 보며 마음을 책과 노닐게 했다."
그리고 정조 때 문인인 이규상李奎象은 ≪일몽고一夢稿≫에서 단원 김홍도를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당시 화원의 그림은 새로이 서양의 사면척량화법四面尺量畵法(투시도법)을 본받고 있는데 이런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는 한쪽 눈을 감고 바라보면 그려진 기물들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우뚝 서지 아니함이 없다. 세속에서 이를 가리켜 책가도라고 하며 반드시 채색을 했다. 한 시대 귀인貴人 중에 이런 그림으로 장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김홍도는 이러한 재주에 매우 뛰어났다."
책가도가 얼마나 유행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나 그 전래 과정은 분명치 않다.
다만 자금성紫禁城 삼희당三希堂[청나라 건륭제의 서재로서 '세 가지 희귀한 보배가 있는 집(3권의 서첩)'이란 뜻]의 벽면 장식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서양 투시도법이 가미된 것으로 보아 중국 북경을 통해 전래된 새로운 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 유래와 관계없이 이를 회화적으로 다양하게 구현한 것은 김홍도 같은 조선 후기의 화원들이었다.
책가도의 도상은 정조가 뜻한 본래 취지대로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가의 모습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키 큰 8곡 병풍에 책만 가득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단조로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절제미가 강조된 대단히 감동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이것이 민가에서 유행하면서 책 이외에도 전적典籍(문자나 기호 등에 의해 전달되는 모든 기록정보)과 함께 옥필통, 옥도장, 찻잔, 자명종 등 귀한 문방구와 산호로 만든 붓걸이를 비롯한 진귀한 장식품들이 그려졌다.
구성도 멋지고 묘사도 정확하다.
가히 한 시대에 인기를 얻을 만한 그림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장식품을 많이 채우는 바람에 잡다한 느낌을 주어 원래 책가도가 지닌 정중함은 떨어지기도 했다.
책가도에는 화가의 낙관이 없다.
그런 중 화원 가운데 순조 때 장한종張漢宗과 철종 때 이형록李亨祿은 책가도 속 돌도장에 자신의 이름을 살짝 새겨 넣어 재치 있게 화가의 이름을 밝히기도 했다.
화가들의 재치들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5. 2. 1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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