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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7장 계몽주의 2: 계몽 철학자들의 세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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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7장 계몽주의 2: 계몽 철학자들의 세계

새샘 2025. 5. 17. 19:44
계몽주의 사상가들
    몽테스키외 남작
    볼테르
    데이비드 흄
    장 자크 루소
    기욤 토마스 프랑수아 레날
    드니 디드로
    애덤 스미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1689~1755년
1694~1778
1711~1776
1712~1778
1713~1796
1713~1784
1723~1790
1759~1797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주요 저작들
    볼테르 ≪철학 서간≫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디드로 ≪백과전서≫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에밀≫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애덤 스미스 ≪국부론
    레날 ≪두 인도에서의 유럽인의 식민지 및 통상의 철학적·정치적 역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에 대한 옹호
         1734년
         1748
    1751~1772

         1762년

         1762

         1764

         1776
         1770년
         1792년

 

 

계몽사상啓蒙思想 Enlightenment thought은 남부 및 동부 유럽뿐만 아니라 신세계의 유럽 식민지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 유럽적인 것이었다,

영국의 사상가들이 핵심적인 그것도 대표적인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가장 폭넓게 읽힌 일부 계몽주의 서적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된 투쟁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이런 이유로 계몽 사상가들은 그들이 어디에 살았든 간에 종종 프랑스어로 '필로소프(계몽철학자) philosophes(영어 philosophers)'라고 불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흄 David Hume과 독일의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를 제외하고는 어떤 계몽 사상가도 고도로 독창적인 추상적 사상가라는 의미에서의 철학자는 아니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계몽 사상가들은 이해하기 힘들어 보일지도 모르는 표현 형식을 피했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의 명료성과 문체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계몽 철학자는 단순히 '자유로운 사상가'를 뜻했다.

그것은 자신의 의견이 어떤 형태의 종교나 신조의 제약에 방해받지 않은 사람의 의미했다.

 

 

○볼테르

 

볼테르(출처-LICENTIA POETICA https://licentiapoetica.com/voltaires-later-writings-and-reforms-7ffded855210)

 

당시 가장 유명한 계몽 철학자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çois-Marie Arouet(1694~1778)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볼테르 Voltaire였다.

2세기 전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1466~1536)가 그리스도교 휴머니즘 Christian humanism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볼테르는 사실상 매우 다양한 문학적 형식으로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논평하면서 계몽주의의 화신이 되었다.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은 볼테르는 매우 일찍부터 무척 명민하고 신랄한 작가로 떠올랐다.

남을 성나게 만드는 그의 취향 때문에 그는 명예훼손으로 바스티유 Bastille에 투옥되기도 했으며 영국으로 일시 추방되기도 했다.

영국에 있는 3년 동안 볼테르는 영국의 정치 제도, 문화, 과학에 대한 예찬자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뉴턴 Newton, 베이컨 Bacon, 로크 Locke의 사상에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볼테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프랑스에 뉴턴의 연구를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는 점이고, 보다 더 데카르트적 프랑스 Cartesian France에 영국의 경험론과 과학적 방법을 알리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1734년의 귀국 이후 출간된 볼테르의 ≪철학 서간 또는 영국에 관한 편지 Lettres philosophiques ou Lettres sur les anglais(영어 Philosophical Letters or Letters on the English)≫는 즉각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볼테르는 종교와 정치적 자유에 관해 비교의 방법으로 글을 썼다.

영국의 문화와 정치에 대한 볼테르의 찬양은 프랑스와 유럽 대륙의 다른 절대주의 국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되었다.

그는 영국인의 열린 마음과 경험주의, 예컨대 영국의 과학자에 대한 존경과 연구를 위한 지원을 칭송했다.

그는 영국 귀족정의 상대적인 취약함을 영국이 정치적으로 건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로 생각했다.

볼테르는 영국인이 프랑스인과는 달리 상업과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썼다.

영국의 세금 체제는 합리적이며 프랑스처럼 재정을 파탄시키는 특권층에 대한 복잡한 세금 면제도 없었다고 전했다.

또한 영국 하원은 중간계급을 대표했고, 프랑스의 절대주의와는 달리 영국 정부에 대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전횡적인 권력을 견제했다.

볼테르는 자신의 저서 가운데 한층 더 선동적인 구절에서 영국에서는 폭력 혁명이 실제로 정치적 중용과 안정을 창출했다고 주장했다.

"전횡적인 권력의 우상은 피의 바다에 빠져죽었다.······ 영국 국민은 왕들에게 저항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억제하는데 성공한 세계에서 유일한 국민이다."

영국의 유명한 모든 미덕 가운데 종교적 관용이 가장 크게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볼테르는 영국이 상이한 종교를 지닌 시민을 조화롭고 생산적인 문화로 결합시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볼테르는 영국의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

예컨대 영국의 가톨릭교도, 비국교도, 유대인은 평등한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관용' 정책은 프로테스탄트교도(개신교도) Protestant에 대한 루이 14세의 Louis XIV(재위 1643~1715)의 불관용 정책과 대비되었다.

낭트 칙령 Édit de Nantes(영어 Edict of Nantes)(1685)의 철회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교도의 시민권을 박탈했고 장 칼라스 Jean Calas와 그 밖의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볼테르의 유명한 투쟁 구호는 "파렴치한을 분쇄하라! Écrasez l'infâme!(영어 Crush the infamous!)"였는데, '파렴치한'이란 말은 모든 형태의 억압, 광신주의, 편협함 따위를 뜻했다.

그는 자신의 한 적대자에게 시민적 자유의 제1원리로 종종 인용되는 다음과 같을 글을 써 보냈다.

"나는 당신의 말을 한 마디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목숨을 걸고 당신의 발언권을 옹호할 것이다."

볼테르는 온갖 종류의 불관용 중에서도 종교적 편협성을 가장 혐오했고 열정적으로 종교적 협잡, 기적에 대한 믿음, 미신 따위를 비난했다.

"미신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광신이 사라지며, 광신이 사라지는 만큼 비참한 상태 또한 없어진다."

그는 종교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교한 의식, 음식에 대한 율법, 상투적인 기도 따위와 같은 교리와 막강한 교회 관료제로부터 자신이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던 도덕성을 구하고자 했다.

그는 상식과 단순함을 주장했고, 이것이 인간성에서의 선함을 발휘하게 하고 안정적인 권위를 확립시켜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법이 단순해질수록 치안판사들은 더 많은 존경을 받게 되고, 종교가 단순해질수록 성직자들을 더 많이 존경하게 될 것이다. 종교는 단순해질 수 있다. 계몽된 사람들이 응보자이자 보족자인 유일신을 공표하게 될 때 그 누구도 웃지 않을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따를 것이다."

 

볼테르는 자신을 비평가라고 밝혔는데, 이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프랑스와 다른 나라에서 추방당했으며 그의 저서들은 금서가 되거나 불태워졌다.

하지만 그의 희곡이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한 프랑스 국왕은 그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볼테르는 자신을 베를린 Berlin에 있는 궁정으로 초대한 프로이센 Prussia의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재위 1740~1786), 러시아 Russia에 도입했을지도 모를 개혁에 대해 서신을 교환한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재위 1762~1796)를 포함해 주목할 만한 국제적인 팬 fan(애호가)을 거느리고 있었다.

볼테르는 자신을 '금수품禁輸品'이라고 묘사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파리 Paris로 금의환양한 지 몇 달 뒤인 1778년 그가 사망했을 때 그는 아마도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였다.

 

 

○몽테스키외

 

몽테스키외(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B%AA%BD%ED%85%8C%EC%8A%A4%ED%82%A4%EC%99%B8)

 

몽테스키외 Montesquieu(1689~1755)는 계몽사상가 가운데서 매우 특이한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몽테스키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영지뿐만 아니라 국가 관직을 물려받았으며, 보르도 고등법원의 치안판사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볼테르와 같은 명문장가나 선동가는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신중한 법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익명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Amsterdam에서 출간된 풍자 소설인 ≪페르시아인의 편지 Lettres persanes≫(영어 Persian Letters)(1721)를 썼다.

이 소설은 파리를 방문한 두 명의 페르시아인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방문객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기묘한 종교적 미신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프랑스 궁정의 풍습을 튀르키예 후궁들의 풍습과 비교하고 프랑스의 절대주의를 자신들의 전제주의나 정부 권한의 남용에 비유했다.

 

몽테스키외의 심도 깊은 학술적 저작인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영어 On the spirit of the laws)≫(1748)은 계몽주의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비교역사 사회학이라고 부르게 될 학문의 초석을 놓았으며, 주도면밀한 경험론적 접근 면에서 매우 뉴턴적이었다.

몽테스키외는 법을 형성한 구조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상이한 환경, 역사, 종교적 전통이 결합해 그렇게 다양한 정부 제도들을 만들어냈는가?

상이한 정부 형태란 무엇인가?

어떤 정신이 각 정부 형태의 특징을 이루며, 그 정부들 각각의 덕목과 결점은 무엇인가?

몽테스키외는 국가를 세 가지로 분류할 것을 제안했다.

첫 번째는 다수가 지배하는 공화정이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그 다수가 엘리트 귀족정이든지 인민이든지는 상관없었다.

두 번째 형태는 단일한 권력이 법에 따라 통치하는 군주정이었다.

몽테스키외가 가장 중요한 부정적 사례로 든 세 번째 전제정은 유일한 통치자가 부패와 변덕을 일삼으며 법이나 다른 권력의 견제를 받지 않고 통치하는 것이었다.

공화정의 혼 또는 정신은 덕德 virtue이었고, 군주정은 명예, 그리고 어떤 시민도 안전함을 느낄 수 없고 처벌만이 능사인 전제정의 혼 또는 정신은 두려움이었다.

이러한 주장이 추상적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책에서 프랑스 군주정에 대해 두 개의 장을 할애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조국이 전제 정치를 향해 위태롭게 흘러가는 것을 본 대로 상세하게 설명했다.

몽테스키외는 다른 계몽 사상가들처럼 영국의 체제와 행정·입법·사법 간의 권력 분산과 균형에 대해 감탄했다.

이러한 영국의 체제는 그 어떤 단일한 통치 집단이나 개인의 절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계몽주의 정치이론가와 지배 엘리트의 구성원들, 특히 1787년 미국 헌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몽테스키외가 '견제와 균형'을 이상적으로 만든 것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디드로와 ≪백과전서≫

 

디드로(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93%9C%EB%8B%88_%EB%94%94%EB%93%9C%EB%A1%9C)

 

볼테르와 몽테스키외의 저작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주제와 양식을 대표한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출판물은 집단적인 모험이었던 ≪백과전서 Enclclopédie≫(영어 Encyclopedia)였다.

≪백과전서≫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철학, 과학, 전문지식을 망라하고 이를 유포시키고자 출간된 것이었다.

순수한 의도에서 보면 ≪백과전서≫는 계몽 사상가들의 목적을 가장 웅장하게 천명한 것이었다.

이 책은 과학적 분석이 어떻게 사고의 거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이 책은 전통과 제도를 광범위하게 다시 생각해보며 인류에게 행복과 진보를 가져다주는 과업에 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모험을 배후에서 인도했던 인물이 드니 디드Denis Diderot(1713~1784)였다.

디드로는 뉴턴주의적 수학자인 장 르 롱 달랑베르 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1717~1783)와 볼테르와 몽테스키외를 포함한 뛰어난 문필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백과전서≫는 1751년에서 1772년 사이에 나뉘어 간행되었고, 완간될 무렵에는 모두 17권의 대형 책자와 11권의 도판으로 출간되었다.

공동의 사업 계획인 ≪백과전서≫는 '인류人類의 당黨 the Party of Humanity'이라는 계몽 사상가들의 이미지를 창출하는데 기여다.

 

≪백과전서≫는 '사고방식 전반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디드로는 과학과 기술에서 이룩한 최근 업적을 설명하는 항목들을 담당했다.

그는 이 항목들에서 기계가 작동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새로운 산업의 공정을 도판으로 예증했다.

이들 항목의 요점은 일상생활에서 과학의 적용이 어떻게 진보를 촉진시키고 인간이 처해 있는 온갖 유형의 비참한 상태를 줄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디드로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학, 세금, 노예무역 따위에 관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는 사회 질서의 토대에 관한 문제에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했다.

하지만 검열 때문에 반종교적인 항목에 대한 공개적인 집필은 힘들었다.

따라서 디드로는 완곡한 방식으로 종교를 조롱했다.

예를 들어 성체성사 항목을 찾으면 독자들은 "식인 풍습 cannibalism 항목을 보라" 같은 간결한 앞뒤 참조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식의 조롱 때문에 처음 간행된 몇 권의 ≪백과전서≫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정부는 ≪백과전서≫의 간행 허가를 철회했다,

프랑스 정부는 1759년 ≪백과전서≫의 저자들이 "국교를 파괴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도덕의 타락을 고무시키기 위해" 무신론을 의미하는 "유물론을 선동하려고 획책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러한 금지와 꽤 비싼 책값에도 불구하고 ≪백과전서≫는 매우 잘 팔렸다.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귀족, 정부 관리, 부유한 상인, 소수의 고위 성직자 따위와 같은 엘리트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엘리트층은 해외 식민지를 포함해서 유럽 전역에 걸쳐 널리 퍼져 있었다.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들은 국가 및 교회와 다투기는 했지만 정치적 안정과 개혁을 모색했다.

몽테스키외는 그 출신과 지위를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계몽된 귀족정이 개혁을 위한 압력을 행사하고 전제적인 국왕에 대항해 자유를 수호하기를 희망했다.

귀족이 자신의 편협한 특정 이해관계만 대표할 것이라고 확신한 볼테르는 계몽 군주가 지도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했다.

그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고, 그 어느 누구도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광범위하게 읽히는 그들의 저작은 체제 전복적인 것이었다.

절대주의와 좀 더 폭넓게는 전제적인 권력에 대한 그들의 풍자는 신랄했다.

1760년대 무렵 전제 정치에 대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의 비판은 유럽 전역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기존 체제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마련해주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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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1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