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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9장 산업혁명과 19세기 사회 4: 산업화의 사회적 결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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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9장 산업혁명과 19세기 사회 4: 산업화의 사회적 결과

새샘 2025. 10. 15. 11:17

산업혁명의 한 가지 요인이었던 인구 증가는 그 자체만으로 다룰 가치가 있다.

어쨌든 19세기는 유럽 인구사에서 전환점이었다.

유럽 전체 인구는 1800년에 2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고 1850년까지 2억 7,40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1900년까지 4억 1,400만 명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약 4억 8,000만 명이었다(같은 기간에 세계 인구는 약 9억 명에서 16억 명으로 증가했다).

비교적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던 영국 UK에서는 인구가 1,600만 명에서 2,700만 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농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구가 증가했다.

러시아 Russia에서는 같은 기간 인구가 3,900만 명에서 6,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인구

 

역사가들은 이런 인구 폭발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일부 역사가들은 세균의 주기적인 창궐은 어떤 치명적인 질병의 전염성을 덜하게 만든다고 추측한다.

1796년 이후로 천연두에 대한 에드워드 제너 Edward Jenner(1749~1823)의 백신 기법이 점진적으로 효능을 발휘했고 이 질병을 덜 치명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비록 19세기의 후반에서야 가시화되었지만, 위생 상태의 개선은 콜레라를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각국 정부도 자국민의 삶을 측정하고 향상시키는데 한층 더 유능해졌고 한결 더 결의에 찼다.

영양가가 높은 값싼 식품—무엇보다도 특히 감자—과 철도로 식료품을 저렴하게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은 많은 유럽 인구가 더 나은 영양을 섭취하게 만들어서 허약해져 병에 걸릴 확률을 줄여주었다.

그러나 사망률과 기대수명에서의 진정한 변화는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벽두에 일어났다.

1880년 베를린 Berlin 시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은 30세에 지나지 않았고 인근의 농촌 지역은 43세였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19세기의 인구 증가를 사망률의 하락보다는 오히려 출산율의 증가 탓으로 돌린다.

남성과 여성 모두 이전보다 일찍 결혼했고, 이것은 출산력(여성 1인당 생애 동안 낳는 자녀 수)과 가족 규모를 증가시켰다.

농민은 더 젊은 나이에 가정을 꾸리는 경향이 있었다.

농촌에서의 제조업 확산은 시골의 연인이 토지를 상속받기 이전이라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결혼 연령이 낮아졌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결혼했다.

인구 증가는 젊고 출산 가능한 사람들의 수를 증가시키면서 그 자체의 역동성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전체 인구 대비 출산율을 상당히 증가시키고 있었다.

 

 

○토지에서의 생활: 농민층

 

서구가 한층 더 산업적인 성장을 할 때조차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땅에 의존해서 살았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가혹했다.

유럽에서 보잘것없는 출신의 농부를 일컫는 농민은 여전히 씨뿌리기와 거두기에 대부분을 손으로 했다.

몇백만 개의 손바닥만 한 농장은 기껏해야 그저 생계를 이어가는 정도였고 각 가정은 수지를 맞추기 위해 직조하고 실을 자으며 칼을 만들고 버터 butter를 팔았다.

풍년에 전체 가족의 하루 평균 식사량은 모두 합쳐 900~1,360그램의 빵이 고작이었다(하루 총 열량이 3,000칼로리 정도).

여러 측면에서 유럽의 많은 지역 농춘 주민의 생활수준은 19세기 전반기에 악화되었고, 이는 1840년에 상당한 정치적 중요성을 지닌다.

늘어나는 인구는 토지에 더 많은 압력을 가했다.

농민이 자기 땅에서 근근이 먹고살던 지역에서 소규모 토지 보유와 부채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시장의 불확실성은 날씨와 수확의 불가측성과 혼합되었다.

19세기에 걸쳐 약 3,700만 명의 사람들(대다수가 농민이었다)이 유럽을 떠났는데, 이는 농촌 생활의 냉혹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토지가 풍부하고 저렴한 곳에 정착했다.

그 대다수는 미국 USA에 정착했고 다른 사람들은 남아메리카 South America,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 뉴질랜드 New Zealand 및 오스트레일리아 Australia에서 시베리아 Siberia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했다.

많은 경우에 각국 정부는 과잉 인구를 해소하기 위해 이주를 권장했다.

 

19세기에 기근, 빈곤, 인구 따위의 가장 비극적 결합은 1845~1849년의 아일랜드 대기근 Great Famine(Great Hunger)이었다.

신세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감자는 근본적으로 옥수수와 곡물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보다 많은 영양을 제공해주면서 유럽 농민의 음식물을 변화시켰다.

감자는 또한 매우 촘촘하게 자랐는데, 그것은 한 줌 땅뙈기로 근근이 먹고사는 농민에게는 엄청난 이점이었다.

아일랜드 Ireland보다 감자가 더 중요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일랜드는 기후와 토양이 곡물을 재배하기 힘들게 만들었고 인구 과잉과 빈곤이 증가하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1845년에 그리고 다시 1846년과 1847년에 치명적으로 균류(곰팡이)가 감자 농사를 망쳤을 때 당장 대체할 식량이 없었다.

최소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굶주림, 마을과 과밀한 구빈원에 퍼진 부패한 식품으로 인한 이질이나 열병 따위로 죽었다.

이 대기근 이전에 몇십만 명의 아일랜드인—신세계로 향한 자발적인 이주의 3분의 1—이 이미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로 갔다.

1845년 이후 10년 동안 150만 명이 아일랜드를 영구히 떠났다.

감자마름병은 독일 Germany, 스코틀랜드 Scotland, 네덜란드 Netherlands에도 타격을 주었지만 아일랜드에 비하여 덜한 편이었다.

유럽은 몇세기 동안 치명적인 기근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 비극적인 아일랜드 기근은 많은 사람들이 기아란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할 때 뒤늦게 일어났으며, 19세기의 시골이 흉작과 식량 결핍에 얼마나 취약한 채로 남아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토지에서의 변화는 부분적으로 각국 정부의 성격 여하에 좌우되었다.

상업화된 농업에 좀 더 공감하는 정부는 토지의 양도와 재조직을 용이하게 해주는 입법을 통과시켰다.

그러한 정부는 소농을 정리하고 규모가 더 크고 한층 효율적인 생산 단지의 증대를 장려했다.

영국에서는 황무지를 제외한 농촌 지역의 반 이상이 1,000에이커 acre(1에이커는 약 1,200평 정도로 4,046제곱미터 정도)가 넘는 농지들로 구성되었다.

에스파냐 España에서는 대규모 상업적 농업의 운이 정치 체제의 변화에 따라 부침했는데, 1820년 자유주의 정당이 집권하면서 토지의 자유로운 양도를 장려하는 법이 제정되었다가 1832년 절대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폐지되고 말았다.

러시아에서는 농토가 광대한 권역으로 나뉘어 경작되었는데, 일부 대지주들은 50만 에이커 이상을 소유했다.

1860년대의 농노 해방 이전까지 지주들은 종속적인 농민에게 일주일에 며칠 정도의 노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농노제는 지주나 농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농업이나 토지 관리기법을 향상시키기 위한 유인책을 주지 않았다.

 

몇십만 명의 남녀와 어린이를 몇세대 동안 특정 영지에 묶어둔 유럽 농노제는 토지를 자유로이 사고팔기 힘들게 만들었고 농업의 상업화와 통합에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그 반대 또한 사실이었다.

프랑스 France에서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토지 판매와 시골에 남아 있던 상속법의 수혜자들이었던 농민 토지 보유자들은 소규모 농토를 계속 경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는 1840년대에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농업 불황을 훨씬 덜 겪었고, 시골에서 도시로의 이주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더뎠으며, 프랑스를 떠나 다른 나라로 향한 농민의 수도 훨씬 더 적었다.

 

산업화는 다양한 형태로 시골에 다가왔다.

발달된 통신망은 농촌 사람들에게 다른 곳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과 기회에 대해 좀 더 예리한 인식을 갖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그들의 삶에 전례 없을 정도로 개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제 중앙 정부의 관료제가 농민에 대한 징세와 그 자제들을 군대로 징집하는 일을 한결 쉽게 만들어주었다.

일부 농촌 가내 산업들은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과의 직접적인 경쟁에 직면했는데, 이는 특히 민들이 겨울을 나는 동안 일거리가 줄어들거나 분업 비율이 더 낮아지고 가계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뜻했다.

경제의 다른 부문에서 산업은 모든 지역을 소규모 작업장과 노동자의 집에서 신발, 셔츠 shirts, 리본 ribbon, 나이프 knife 및 포크 fork 따위를 만드는 생산자로 만들면서 시골로 퍼져나갔다.

시장에서의 변화는 번영을 선도할 수 있거나 또는 전 지역을 아사 직전으로 몰고 갈 수 있었다.

 

농촌의 취약성은 종종 정치적 폭력으로 나타났다.

농촌의 반란은 19세기 초에 일상적인 것이었다.

1820년대 말 영국 남부에서는 소농과 일용 노동자가 세력을 규합해서 새로운 농업 자본주의의 상징인 탈곡기 도입에 항거해 창고와 건초 더미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복면을 하거나 변장을 하고 어두운 밤을 틈타 자신들의 신비스런 지도자인 '캡틴 스윙 Captain Swing'의 기치 아래 말을 달렸다.

그들의 습격이 있기 전에 영국 켄트 주 County of Kent의 대농장주에게는 다음과 같은 익명의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탈곡기를 끌어내라. 아니면 당장 불을 질러 버리겠다. 우리는 5,000명(상당히 부풀린 숫자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남서부에서는 농민들이 밤에 변장을 하고 숲에서 나무를 그러모으는 것을 금했던 지방 당국자들을 공격했다.

숲의 나무는 새로운 용광로에 필요했기 때문에 농민의 전통적인 부러진 나뭇가지 줍기 권리는 종말을 고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이와 비슷한 농촌의 소요사태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지주에 대항하고 교회에 대한 십일조나 세금에 저항하며 관습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법에 반대하고 둔감한 정부에 대항한 반란이 비일비재했다.

러시아에서는 계속된 흉작과 착취에 대한 반발로 농노 반란이 여러 차례 있었다.

 

많은 구경꾼들은 19세기의 도시를 위험한 소란의 온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골에서의 상황과 빈번한 농촌 저항의 급격한 재연은 정부에게는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로 남아 있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1840년대에 농촌의 정치는 폭발했다.

농민은 농토의 빈민이었고 많은 채무를 졌으며 불안정하게 시장에 의존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농촌의 비참함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력은 정부를 독재적이고 무관심하거나 무능한 완전한 정치적 실패작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시의 풍경

 

도시의 성장은 19세기 사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이며 중요한 문화적 여운을 지닌 것이었다.

앞서 본 것처럼 19세기에 걸쳐 유럽의 전체 인구는 2배로 늘어났다.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율은 3배로 증가—좀 더 정확하게는 도시 인구가 6배 증가했다.

산업화처럼 도시화는 대체로 유럽의 북서부에서 남동부로 이동했지만, 그것은 자원, 노동, 수송이라는 매우 특정한 수요를 따라갔다.

광산 및 제조업에서와 새로이 건설된 철도 노선을 따라 (맨체스터 Manchester, 버밍엄 Birmingham, 에센 Essen 같은) 도시들이 때때로 무인지경에서 불쑥 솟아난 것처럼 보였다.

산업화는 폴란드 Poland 단치히 Danzig(그단스크 Gdańsk), 프랑스 르아브르 Le Havre, 네덜란드 로테르담 Rotterdam 같은 항구 도시들의 규모를 팽창시켰다.

동시대인에게 가장 놀라운 일은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의 매우 급속한 팽창이었다.

때때로 도시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다.

1750년과 1850년 사이에 (유럽 최대 도시인) 런던 London 인구는 67만 6,000명에서 230만 명으로 증가했다.

파리 Paris의 인구는 56만 명에서 130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1841년에서 1846년 사이에만 12만 명의 새 주민이 늘어났다.

파리와 마찬가지로 급속하게 팽창하는 철도 세계의 중심지가 된 베를린은 19세기 전반기 동안에만 규모가 약 3배 정도 증가했다.

그러한 급속한 팽창은 거의 필연적으로 무계획한 것이었고 무절제한 성장과 인구 증가의 압력이 결합되어 도시의 여명기에 새로운 사회 문제들을 초래했다.

 

19세기의 거의 모든 도시들은 혼잡했고 건강에 해로웠으며 대개 중세에 건설된 기반시설은 새로운 인구와 산업의 수요에 따른 부담으로 혹사당했다.

인구 증가에 비해 건축은 특히 도시의 농도계급 지구에서 훨씬 뒤처져 있었다.

오래된 도시이든 신흥 도시이든 간에 대부분의 도시에서 노동자들은 시골에 남겨둔 가족과 떨어져 일시적인 하숙집에서 살았으며, 극빈 노동자들은 채광이나 하수도가 전혀 없는 초라한 지하실 방이나 다락방에 살았다.

영국에서 결코 최악의 경우라고는 할 수 없는 하더스필드 Huddersfield 공장 지대의 환경을 조사했던 지역위원회는 포장 도로, 하수도, 또는 배수관이 갖추어지지 않은 광범위한 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온갖 쓰레기와 오물이 길 위에 그대로 버려져 썩고 있으며, 웅덩이에 고인 물은 늘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거 환경은 열악하고 지저분할 수밖에 없으며, 질병이 발생하면 전체 주민의 건강이 위협받게 된다."

 

각국 정부는 대재앙을 불러올 전염병의 확산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점차 일련의 조치를 취해나갔다.

빈민가를 헐어냄으로써 도시에서 최악의 빈민가를 일소하고, 상하수도를 갖추어 위생 조건을 개선하려는 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850년에 이르도록 이러한 계획은 추진은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유럽의 그 어느 도시보다 나은 급수시설을 갖추었다는 파리만 하더라고 1인당 연간 목욕 횟수는 두 번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런던에서는 25만 개나 되는 가정용 분뇨 구덩이가 수거되지 못했고, 맨체스터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화장실을 갖춘 주택은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19세기의 산업과 환경

 

찰스 디킨스 소설 '어려운 시절 Hard Times' 겉표지(출처-https://ridibooks.com/books/805026150?srsltid=AfmBOopgsy1x_CaTamRNgxdbxGT6eSi_h366Nc_dF7yUVOuv0TuJudEl)

 

산업혁명과 더불어 근대의 수많은 환경 변화가 시작되었다.

신흥 도시보다 이런 변화가 더 많이 눈에 띄는 곳은 없었다.

영국 찰스 디킨스 Charles John Huffam Dickens(1812~1870)의 소설 ≪어려운 시절 Hard Times≫에 나오는 허구의 도시 '코크타운 Coketown'의 숨 막히는 공기와 오염된 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는 당연히 잘 알려져 있다.

 

"그곳은 붉은 벽돌, 아니 만약 연기와 재가 그것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붉은색이었을 벽돌로 된 도시였다.······ 그곳은 기계와 높은 굴뚝의 도시였다. 그 굴뚝에서는 끝없이 뱀 같은 연기가 영원히 계속해서 결코 그 똬리를 풀지 않은 채 뿜어져 나왔다. 그 도시는 그 안에 검정색 운하와 더러운 냄새가 나는 염료로 자줏빛으로 흐르는 강과 하루 종일 덜커덩거리고 떨려대는 창문으로 가득 찬 많은 건물 더미가 있었다."

 

나무를 때는 제조업과 가정에서의 난방은 장기간 하늘을 뒤덮는 연기를 토해냈지만, 새로운 산업 활동의 집중과 석탄으로의 변천은 공기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가정에서도 일찍 석탄으로 바꾸었던 런던에서는 특히 공장, 철도, 가정용 굴뚝 따위에서 나오는 연기가 도시 전체를 무겁게 드리웠다.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는 런던의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오염이 있었다.

영국 전역에 걸쳐 공기 오염은 영국인의 사망에서 25퍼센트를 차지했던 기관지염과 결핵을 일으키면서 건강에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석탄 사용량이 많고 산업화된 북아메리카(특히 피츠버그 Pittsburgh)와 중부 유럽의 지역들은 오염이 집중된 또 다른 지역이었다.

특히 독일 루르 Ruhr(독일어 Ruhrgebiet) 지방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공기가 가장 오염된 곳이었다.

 

산업 폐기물과 인간 배설물로 오염된 유독한 물은 도시 지역에서 두 번째로 심각한 환경적 위험 요소였다.

런던과 파리는 비록 하숫물이 템스 강 River Thames과 센 강 Seine River으로 흘러들기는 했지만 도시의 하수 체계를 건설했다.

콜레라 cholera·티푸스 typhus·결핵은 적합한 하수시설이나 맑은 물이 없는 지역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자연의 방식이었다.

중부 유럽의 산업 심장부를 관통하고 루르 지방을 가로질러 흐르는 라인 강 Rhine River은 석탄 채굴, 제철 공장, 화학 산업에서 나오는 유기퇴적물로 가득 찼다.

19세기 말 몇 차례의 콜레라 발병으로 자극받은 주요 도시들은 정수된 물을 상수도로 공급했다.

그러나 공기, 강, 토지의 상황은 최소한 20세기 중반까지 계속 악화되었다.

 

 

○도시에서의 성性

 

19세기의 도시에서는 매춘이 성행했다.

사실 매춘은 19세기 도시 경제의 소립자 microsome를 제공했다.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Austria 수도 빈 Wien의 매춘부 수는 1만 5,000면으로 추정된다.

매춘이 허가받은 직종이었던 파리에서는 5만 명이었고, 런던은 8만 명에 달했다.

1850년대의 런던 신문은 매춘부와 고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하세계의 정교한 계급제도의 목록을 보도했다.

이 목록에는 하숙집을 운영했던 야바위꾼 짠돌이 Swindling Sal 같은 이름의 사업가, 거리에서 매춘부의 거래를 관리하는 포주와 기둥서방, 부유한 상류 중간계급 애인의 보호를 누리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프리마돈나 prima donna'와 부유층 상대 창녀들(courtesans)이 포함되었다.

그 애인들은 그녀들을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로 한층 더 존경받는 상류 사회의 언저리로 옮겨갈 수 있게 해주었다.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뒤마 Alexandre Dumas(1802~1870)의 소설 ≪춘희椿姫 La Dame aux Camélias(동백꽃 여인)≫와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opera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의 여주인공은 이런 여성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매춘부는 부유층 상대 창녀가 아니라 남성 노동계급이 압도적으로 많은 도시의 항구 지구나 하숙집에서 장시간 위험하게 일하는 여성(과 일부 남성)이었다.

대부분의 매춘부는 도시에 갓 도착한 젊은 여성이거나 실업 기간 동안 여떻게든 살려고 애쓰는 일하는 여성들이었다.

 

 

○사회 문제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19세기의 혁명들(20장 참조)을 배경으로 19세기의 새로운 '충격'인 도시들과 이 도시들의 팽창하는 대중은 절박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유럽 전역에 걸쳐 정치 지도자, 사회과학자, 공중보건 관리들은 범죄 행위, 상수도 공급, 하수도, 매춘, 결핵 및 콜레라, 알코올 중독, 보육, 임금, 실업 따위에 관한 몇천 종의 보고서를 발행했고, 그중 다수는 몇 권 분량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급진주의자와 개혁가는 이 모든 문제를 '사회 문제'라는 광범위한 범위로 분류했다.

개혁가들과 도처에서 들리는 불만의 소리에 압력을 받은 각국 정부는 불만이 혁명으로 비화하기 전에 이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느꼈다.

각국 정부는 최초의 사회공학을 통해 그렇게 했다.

이 사회공학에는 경찰력, 보건, 하수도 및 새로운 상수도 공급, 접종, 초등학교,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공장법, (구제받는 조건의 개요를 정하는) 구빈법, 새로운 도시 규제 및 도시 계획 따위가 포함되었다.

이를테면 파리 중심부는 19세기에 거의 전적으로 재설계되었다.

북적대고 중세풍을 띠고 혁명이 일어날 만한 빈민 주택지구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시장도 다시 지어졌으며, 거리도 넓어지고 조명으로 밝아졌다(21장 참조).

1820년부터 계속해서 사회 문제는 유럽에 먹구름처럼 드리워졌고, 이 문제는 1848년 혁명(21장 참조)의 배경 중 일부를 형성했다.

초기 사회과학의 조사와 연구는 프랑스의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1799~1850), 영국의 찰스 디킨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 Victor-Marie Hugo(1802~1885) 같은 소설가들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위고는 소설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에서 파리의 하수도를 도시 생활방식의 일반 조건을 위한 중심 은유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위고와 디킨스는 모두 빈민, 청소년 비행, 아동 노동 따위를 가엾이 여겨 글을 썼다.

혁명은 그들의 마음에서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프랑스 작가인 발자크는 빈민을 거의 동정하지 않았지만 근대적 삶의 타락에 대해 동료 작가들과 관점을 공유했다.

그의 ≪인간희극 La Comédie humaine≫(1829~1855)은 ≪외제니 그랑데 Eugénie Grandet≫, ≪고리오 영감 Le Père Goriot≫, ≪잃어버린 환상 Illusions Perdues≫, 고귀하면서도 천한 매춘부 Splendeurs et misères des courtisanes≫ 따우위를 포함한 95편의 소설과 이야기로 구성된 연작이었다.

발자크는 무정하고 과시적인 청년과 로맨틱한 밀애 장면 이면에 있는 냉정한 계산에 관한 자신의 관찰을 곱씹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당대의 개탄스러운 물질주의와 절망으로 여긴 것의 은유로서 매춘을 이용한 유일한 작가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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