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현재 심사정 '하마선인도' 본문
"고독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춤"

낙엽 지는 소리가 쿵하고 가슴을 친다.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듯 고독에 금이 간다.
가을은 마음 놓고 고독해도 좋은 계절이다.
누구나 고독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다.
화가에게 고독은 창작의 발전소 같은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감이기보다 고독이다.
먹물보다 진한 고독의 결실이 작품이다.
그래서 작품을 대할 때면, 작품보다 화가의 삶이 더 궁금할 때가 있다.
작품 이름을 보면서 감상의 실마리를 찾거나 화가의 주변 사람을 통해 고독의 주인을 상상한다.
감상자는 작품을 응시하며 화가와 교감하고, 때로는 위안을 받는다.
예로부터 고독은 예술가의 필요조건이었다.
조선시대에 고독을 뼛속까지 화가 가운데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있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전망 없는 삶'을 살면서, 그는 붓 한 자루로 힘겨운 생을 지탱했다.
<하마선인도蝦蟆仙人圖>는 심사정의 고독의 심연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작품에는 '유해섬劉海蟾'이라는 선인仙人(신선神仙)이 회색 누더기 옷을 걸치고, 두꺼비(하마)와 천진天眞스럽게 놀고 있다.
심사정은 감히 조정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그림에서만큼은 선인처럼 자유로웠다.
화가에게는 타고난 재능 외에 성장 배경도 중요하고, 나름의 관점과 사상도 있어야 한다.
또 중요한 덕목으로 끈기와 인내도 필요하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실한 자세가 성취의 요건이다.
심사정은 역적 가문의 자손이었다.
아예 출세 길이 막혔다.
세상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어린 시절 겸재 정선에게 배운 그림밖에 없었다.
날마다 그림을 그렸다.
그의 묘지명처럼 "하루라도 붓을 쥐지 않는 날이 없었다".
성실한 자세가 오늘날의 그를 있게 했다.
심사정은 산수와 화조, 도석인물道釋人物(동양화에 나타나는 여러 신선, 부처, 고승 따위의 인물)을 비롯한 다방면에 두각을 보였다.
중국의 대표작을 자신만의 기법으로 해석하며 많은 방작倣作(원작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자기만의 독창성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남겼다.
그 과정에서 개성적인 그림 양식(스타일 style)을 만들었고, 진경산수화의 유행 속에서도 꿋꿋하게 남종문인화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역적의 자손인 그에게 드러내놓고 작품을 주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난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다행히 몇몇 아는 사람(지인知人)들이 곁에 있었다.
시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과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 ,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와 같은 일급 예술가들과 마음을 나누었다.
그들은 심사정이 자존감을 잃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게 해준 버팀목이었다.
심사정은 도석인물화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도석인물화는 내면의 수양을 주시하는 선禪사상과 엄격한 자기수련을 통해 불로장생을 이루는 신선사상을 주제(모티프 motif)로 한 그림이다.
선종의 초대선사인 달마達磨/達摩, 자연에 귀의하여 대나무를 벗 삼아 자유를 누린 죽림칠현竹林七賢(중국 진晉나라 초기에 노자와 장자의 무위 사상을 숭상하여 죽림에 모여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 포대화상布袋和尙(8세기 당나라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에서 태어나 916년에 사망한 전설적인 승려) 따위가 주요 도석인물들이다.
<하마선인도>는 유해섬의 중국 고사를 작품화한 것이다.
유해섬은 중국 오대五代(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907~979)의 후량後梁 사람으로, 출세가 보장된 재상 자리를 내려놓고 속세를 하산하여 도道의 경지에 든 선인이다.
유해섬의 호는 '해섬자海蟾子'로, 곁에는 두꺼비가 수호신처럼 함께 한다.
세 발 달린 두꺼비는 한자로 '섬蟾' 도는 '하마蝦蟆'라고 하며, 유해섬과 두꺼비를 묶어서 '유해희섬劉海戱蟾' 또는 '하마선인蝦蟆仙人'이라고 한다.
<하마선인도>는 대개 유해섬이 두꺼비와 노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도 그렇다.
붓질이 호방하고 시원스럽다.
활달한 먹선과 자유로운 갈필渴筆(그림을 그릴 때 쓰는, 빳빳한 털로 만든 붓)은 짙은 먹의 번짐 효과로 작품에 깊이를 더한다.
화면을 압도하는 선인의 짓궂은 표정과 자세는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인 화가의 내면인 듯 자유롭다.
선인이 동전을 엮어 맨 긴 줄을 보이며 웃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고, 부릅뜬 눈은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듯하다.
엉거주춤하게 굽힌 어깨와 벌린 다리는 갈필로 대충 그린 것 같지만 전체적인 형상이 살아 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넘친다.
짙은 먹색의 옷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활짝 펼쳤다.
깡마른 맨발에는 걸림이 없다.
세 발 달린 두꺼비도 신나게 춤을 춘다.
물아일체物我一體(외물과 자아,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하나가 됨)의 경지다.
심사정은 고독했지만 불우한 환경에 굴하지 않았다.
작품을 팔아 생계를 잇고, 뛰어난 작품으로 캄캄한 운명에 보란 듯이 복수했다.
기량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작품들은 절대 고독이 피워낸 아름다운 꽃이었다.
고독에는 예고편이 없다.
선선한 바람에도 고독할 수 있고, 식은 커피잔의 온기 없는 감촉에서도 고독을 느낄 수 있다.
고독은 작품 감상에도 필요하다.
감상은 고독과 함께 깊어진다.
가을에는 고독 아닌 것이 없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2019. 계명대학교 출판부
2. 구글 관련 자료
2025. 10. 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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