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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고고학이 풀어내는 우리 역사

새샘 2025. 9. 26. 21:20

○노벨상 수상 쾌거로 이어진 작은 뼛조각의 비밀

 

앞서 살펴본 선민의식이나 북방계 기원, 순혈주의 따위는 인간의 오랜 역사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런데 최근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한 가지 요소가 더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DNA다.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과학원 유전자연구소 앞의 동상(출처-출처자료1)

 

위 사진은 러시아 Russia 노보시비르스크 Novosibirsk 과학원 유전학연구소 앞에 설치된 동상이다.

유전자 연구를 위해 희생된 시험용 쥐를 추모하는 뜻으로 DNA를 뜨개질하듯 뜨고 있는 쥐를 만들었다.

 

고고학에서 고대 인류를 파악하기 위해 DNA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약 30년 전인 1980년대부터다.

최초의 연구는 이집트 Egypt 미라를 분석한 실험이었다.

막 DNA가 연구되면서 사람들의 혈연과 계통을 추정하는 방법도 개발되었다.

여기에 스웨덴 Sweden의 생물학자 스반테 파보 Svante Erik Pääbo(1955~ )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85년에 파보는 이집트의 5,000년 된 미라의 피부조직에서 유전자를 추출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발견한 방법은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파보는 자신의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이후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s(Homo neanderthalensis)과 같은 시기에 시베리아 Siberia에 살았던 데니소바인 Denisovans(Denisova hominins)의 존재를 밝히는데 성공했다.

특히 데니소바인은 필자가 유학했던 시베리아과학원에서 흔적을 찾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데니소바 동굴을 조사하던 중에 발견된 어린 소녀의 손톱만 한 뼛조각에서 DNA를 추출했다.

이 업적으로 파보는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고고학이라는 규모가 작은 학문임에도 그 성과가 노벨상으로 이어질 만큼 DNA의 연구가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고대 사람뼈에서 DNA를 추출하는 방법은 모계를 밝혀내는 미토콘드리아 DNA mitochondrial DNA(mDNA 또는 mtDNA),  부계를 밝히는 Y 염색체(Y chromosome) 분석, 성별을 밝히는 아멜로제닌 유전자 검사 amelogenin gene analysis와 같은 세 가지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앞의 두 가지다.

보통 DNA는 세포의 핵 안에 들어있으며, 생물이 죽어 썩기 시작하면 세포막이 해체되면서 그 안에 있던 DNA 역시 팝콘 popcorn처럼 터져서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 DNA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세포소기관 cell organelle(세포 안에 들어 있는 특정한 기능을 가진 막 구조물)의 하나인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로서 이 DNA를 미토콘드리아 DNA라고 부른다.

어머니에게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잘 남아 있으므로, 이를 분석하면 모계를 파악할 수 있다.

부계 쪽은 남자에게만 있는 Y 염색체를 분석해 알아낸다.

대부분의 연구는 비용 문제로 미토콘드리아 연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Y 염색체 분석은 최근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아쉽게도 어느 쪽이든 모계 또는 부계 중 하나만을 알아낼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이 뼈에서 시료를 채취해 연구하는 모습(출처-출처자료1)

 

바로 위 사진은 뼈에서 시료를 채취해 연구하는 과정을 찍은 모습이다.

모든 연구원은 마치 코로나 검체를 채취하듯 방호복을 입고 PCR(polymerase charin reaction 중합효소연쇄반응: 표적 핵산을 증폭시켜 다량의 핵산을 추출하는 검사법) 검사를 시행한다.

검사 과정에서 실수로 검사자의 머리카락이나 눈썹이 들어가면 결과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을뿐더러 극미량으로 남아 있는 고대 DNA를 아깝게 버리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DNA를 추출할 때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먼저 표면에 묻은 먼지를 포함한 오염물을 제거한다.

그다음 극미량만 남아 있는 표적 DNA를 추출해 PCR 검사를 통해 증폭시킴으로써 표적 DNA를 대량으로 얻는다.

이렇게 얻은 표적 DNA 즉  유전자 gene의 염기서열을 분석하는데 이를 DNA 또는 유전자 염기서열결정 DNA(gene) sequencing이라고 부른다.

DNA에서는 유전자에 따라 나타나는 염기서열과 나타나지 않는 염기서열이 있기 때문에 서로 가까운 인척관계일수록 염기서열 역시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를 근거로 특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염기서열을 파악한다.

유적에서 발견된 뼈는 겉이 이미 상한 경우가 많아서 주로 안쪽의 골수 뼈세포에서 DNA를 추출한다.

 

이러한 DNA 연구는 전 세계에서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발표되는 인간의 조상에 대한 유전자 실험 결과는 바로 이렇게 나온 것이다.

이런 내용은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해 염기서열 유사도의 퍼센트 비율을 보는 방법이 가장 흔하며, 문제는 연구할 때마다 고대 인류 비율이 다르게 나온다는 것이다.

워낙 DNA 시료의 개수와 양이 적다 보니 정확한 결괏값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료 개수와 양이 더 많아진다면 다양한 결괏값을 얻을 수 있어 점점 더 평균값에 수렴하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DNA를 찾는 데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는 고대인의 사람뼈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DNA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뼈가 출토되어야 하고, 뼈의 상태가 좋아야 하지만, 한국 땅은 산성도가 높아 뼈가 거의 삭아서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시기적으로 가까운 조선시대 사람의 뼈만 일부 발견될 뿐 청동기시대나 선사시대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어쩌다 발굴되는 사람뼈도 그 개수와 양이 너무 적어 정확한 결과를 얻기가 어렵다.

1960~1970년대에 환동해 지역인 두만강 건너 러시아 연해주에 위치한 악마문 동굴 Chertovy vorota이라고 하는 곳에서 사람뼈가 나온 적이 있다.

선사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동굴에 부장附葬(합장合葬: 여러 사람의 시체를 한 무덤에 묻음)했는데, 동굴은 대부분 석회질로 이루어져 있어 비슷한 성분인 화석이나 뼈가 잘 보존된다.

덕분에 기적적으로 사람뼈가 발견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두 점의 뼈를 분석하자 엉뚱하게도 각각 베트남과 북극해와 관련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또 한번은 약 10년 전, 정선 아우라지 지역을 개발하면서 약 3,000년 전의 사람뼈가 발견되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다.

그곳에서 발견된 뼈는 예상외로 현대 영국인과 서로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아마도 실험 과정에서 오염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진짜 원인은 알 수가 없다.

오염이 아니더라도 이와 같은 연구는 시료마다 결과가 다르게 도출된다.

몇 가지 시료만으로 섣불리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 이유다.

이것은 마치 여론조사에서 표본집단이 많아야 더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 몇만 년 동안 우리가 분석할 수 있는 DNA 표본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비유하면 혼잡한 종로의 지하철역에서 어떤 사람 한 명을 무작위로 잡아서 그 사람의 주소를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한 명의 고향을 밝혔다고 역을 거쳐 간 몇천 명의 고향을 밝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사가 반복되면서 표본의 수가 쌓이면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매번 연구가 나올 때마다 일희일비하거나 쉽게 단정하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 언론에서 한국인의 기원, 고고학적 인류 분석 같은 기사를 보더라도 하나의 사례로 판단할 뿐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결론을 내린 채로 한반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까?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조상일까?

 

이제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한반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 빠르게는 80만 년 전까지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만 년 전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은 정설이다.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 Homo erectus, 호모 사피엔스(슬기사람) Homo sapiens와 같은 현생 인류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다른 인류가 몇 번의 멸종을 거쳐 다시 등장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빙하기 전 구석기시대 사람과 지금 우리는 같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석기시대 사람은 우리의 선조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전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빙하기가 되면서 대륙이 극적으로(드라마틱하게 dramatic) 변화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동아시아만은 예외였다.

적어도 2만 년~1만 5,000년 전부터 꾸준하게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그 증거는 바로 토기다.

 

우리는 토기가 주로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배웠다.

그런데 고고학계에서는 최근에 토기의 기원을 후기 구석기시대부터라고 밝힌 것이다.

이로써 빙하기가 끝날 무렵부터 한국과 주변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 여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한국을 둘러싼 일본, 만주, 중국,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1만 5,000년 전의 구석기시대 유적이 잘 남아 있는데 비해, 남한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북한 지역은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고, 또 해수면이 바뀌면서 유적이 바다에 잠겼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세계적으로 고고학 유적이 많이 발견된 지역 중 하나인 남한에서 후기 구석기인들의 유적만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은 학계에서 논란거리다.

어쩌면 당시 남한의 기후가 변화해 일부 주민이 북한이나 만주로 이동했다가 다시 남한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과거에는 지금과 같은 국경이 없었고, 몇천 년의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몇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한국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일대는 안정적인 상황에서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 근처에서 살던 사람들이 계속 한반도인이 근간이 된 셈이다.

 

 

(왼)빗살무늬토기와 (오른)민무늬토기(출처-출처자료1)

 

위 사진의 두 유물은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櫛文土器: 표면에 빗살 같은 줄이 새겨지거나 그어져 있는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민무늬토기(무문토기無文土器: 청동기시대에 사용한 표면에 무늬가 없는 토기)다.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에,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다.

놀랍게도 더 나중에 만든 민무늬토기가 빗살무늬토기보다 투박하다.

그렇다면 빗살무늬토기를 만든 신석기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일각에서는 신석기인들이 모두 사라지거나 이주한 뒤 북쪽에서 내려온 청동기인들이 한반도에 터를 잡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약 3,500년 전에 처음 시작되었는데, 그때 청동기를 가지고 있던 북방 민족은 두 가지 경로를 따라 한반도로 들어왔다.

하나는 만주에서 서쪽으로 들어오는 경로, 다른 하나는 환동해 지역을 통한 경로였다.

서쪽과 동쪽 사이에 산맥이 존재하기 때문에 갈라져서 들어온 것이다.

문제는 청동기 문명이 처음 들어올 때 빗살무기토기를 만들던 신석기인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들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을까? 싸웠을까? 아니면 그들을 환대했을까?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사실 신석기인들은 청동기 문명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서서히 멸망하고 있었다.

발견되는 유적이나 유물을 살펴보면 약 4,000년 전부터 사라지고 있었음이 보인다.

기후가 악화되면서 인간이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석기시대의 집터 유적(출처-출처자료1)

 

위 신석기시대의 유적을 보자.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약 5,000~4,000년 전부터 정착민들이 집 자리를 버리는 모습이 발견된다.

한곳에 정착해서 오랫동안 살지 않고 떠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만큼 기후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식량 문제도 발생했을 것이다.

그 결과 신석기인들이 인구가 감소하고, 와중에 청동기인들이 내려오면서 척박한 기후에 더 잘 적응할 수 있게 되어 한반도에 정착해서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기원이라는 것은 핏줄이 아니라 적응이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결국 후손을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다.

그럼 그들이 기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원은 순수하고 우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환경에 적응했나를 가늠하는 기준일 뿐이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처음에 밭농사를 짓다가 나중에 논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신석기시대의 주민들보다 더 견고한 마을을 이루어 협력했고 기술을 발전시켜 본격적으로 농경사회에 진입했다.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신석기인들과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 또는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빗살무늬토기를 만들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평야가 아니라 식량을 얻기 쉬운 바닷가 쪽으로 이동해서 살았을 수도 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조개무지(패총貝塚)는 현대에 당시의 시대상을 연구하는 보물창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조개무지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더 이상 바닷가에서 조개를 먹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조개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먹은 흔적도 없다.

이는 어로생활이 완전히 끝았음을 뜻한다.

 

청동기시대에는 수렵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탄탄한 경제 공동체가 생겨났다.

쌀농사는 힘을 모으면 모을수록 수확량이 늘어난다.

이들은 완벽하게 자신들의 문화를 한쪽으로 통일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일 민족, 문화 공동체라고 말하는 데는 이런 영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서로 결속을 다지기 위해 협력하다 보니 우리와 타인, 안과 밖을 구분하는 강력한 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일본

 

야요이문화 유입 전후 일본의 주민 변화에 대한 도식도(출처-출처자료1)

 

그렇다면 한반도 주변 다른 나라는 어땠을까?

일본의 신석기시대는 서기전 1만 3000년 전부터 서기전 300년까지로 대표적인 유물인 새끼줄 무늬 장식의 토기에 빗대 조몬(승문縄文) 토기문화라고 불린다.

조몬은 바로 '새끼 무늬'(새끼 승繩, 무늬 문文)라는 뜻이다.

 

서기전 2900년에서 서기전 2500년 사이에는 도래인渡來仁(물을 건너온 사람)이라 불리는 한반도계의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들은 마을을 만들고 쌀농사를 하던 사람들로 '야요이(미생彌/生) 문화'라고 분류되었다.

일본도 남한처럼 쌀농사라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면서 거스를 수 없는 문화의 흐름에 올라탔다.

 

하지만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신석기시대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일본 열도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이다.

일본 열도의 북쪽에 위치한 도호쿠(동북東北)와 홋카이도(북해도北海道) 지역까지는 야요이문화가 닿지 않았다.

도쿄(동경東京)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관동関東) 지방에서도 야요이문화가 조몬문화와 섞여 색깔이 뚜렷하지 않았다.

하물며 홋카이도는 거리라는 지리적 제약은 물론 추운 기후 때문에 쌀농사를 짓고 살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야요이문화의 쌀농사와 공동체 문화가 정착할 수 없었다.

 

홋카이도 지역에서는 지금도 원주민인 아니누인アイヌ(영어 Ainu)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는 조몬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규슈(구주九州) 남부 지역에는 조개를 채취해 설던 사람들도 여전히 거주하는데, 이들은 고훈(고분古墳)시대부터 내려오는 문신(이레즈미 入れ墨 Irezumi )이나 이빨을 뽑아서 검게 만드는 풍습(발치拔齒) 따위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신화를 보아도 일본 북쪽의 아이누인과 남쪽의 규슈 해안가 사람들은 비슷한 요소가 많다.

한마디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일본과 같은 사회에서는 남한과는 달리 이전의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농경사회의 주변에서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지형적인 차이는 일종의 '모서리 효과'가 작용한 것이다.

러시아워의 지하철로 비유해보자.

지하철이 매우 붐비는 역에 정차하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물밀듯이 밀려 들어온다.

그러면 원래 있었단 사람들은 화차의 양쪽 모서리로 물리게 된다.

즉, 모서리에 있는 사람들은 차량이 붐비기 전에 탄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 열도도 마찬가지였다.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있는 교성리 고인돌(출처-출처자료1)

 

한국은 일본에 비해 국토 모양이 균일하므로 청동기시대 쌀농사로의 이행은 모든 지역이 거의 예외 없이 한 번에 진행되었다.

다도해의 중심인 신안과 진도, 완도 같은 지역에서도 조개무지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농경사회에서 만든 고인돌만이 남았다.

 

한국은 늘 이처럼 시로운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지난 100여 년 남짓한 기간에 조선이 망하고 근대화되면서 한국의 과거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심지어 한국인의 신체 또한 비약적으로 서구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기본적으로 식습관을 비롯한 자체적인 문화의 영향이 더 컸다.

 

한국은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전 세계적인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도 상당히 재빨랐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인 특성상 새로운 문화로 재편되는 과정이 매우 신속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빗살무늬토기에서 청동기시대로 바뀌는 과정 또한 크게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3,500년 전쯤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청동기시대 물결은 한반도 곳곳에 전파되었다.

그들은 민무늬토기라는 그릇을 만들었고 농사를 기반으로 마을을 형성했고 고인돌을 만들며 한반도의 구석구석을 자신들이 가져온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재편했다.

그 결과 빗살무늬토기의 흔적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급변한 이유는 거주할 수 없는 지역이 적고 서로 밀접하게 엮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한동한 학자들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주민들이 만주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주민교체론'을 주장해왔다.

그런 방식의 이주 또는 정복을 증명하려면 사람뼈나 사람뼈의 DNA를 분석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청동기시대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빗살무늬토기를 만든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즉, 어떤 원인으로 이미 살기가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렇게 몇백 년이 흐르고 만주에서 새로운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내려와 정착했다면 남아 있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고고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정답을 찾아가고 있다.

정말 빗살무늬토기를 만들던 사람들의 생활풍습이나 언어는 한반도에 전혀 남아 있지 않을까?

그 50년 묵은 질문 역시 우리가 해결할 과제일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21세기 북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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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9. 2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