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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9장 산업혁명과 19세기 사회 5: 중산층, 19장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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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9장 산업혁명과 19세기 사회 5: 중산층, 19장 결론

새샘 2025. 10. 29. 23:57

◎중산층

 

중세 유럽 중산층을 소재로 한 발자크 소설 '고리오 영감' 겉표지(출처-교보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81771)

 

프랑스 France 작가인 발자크 Honoré de Balzac(1799~1850)의 소설들은 19세기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중산층中産層 middle class 사회에 대한 포괄적인 묘사를 목적으로 했다.

이 소설들은 모든 직업의 주인공, 예컨대 언론인, 부유층 상대 창녀, 소도시 시장, 공장 소유주, 상점 직원, 학생 따위로 채워졌다.

발자크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주장은 명확하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변화와 산업화의 사회적 변화가 (발자크가 그리워한) 이전의 귀족사회를 (그가 경멸한) 물질주의적 신흥 중간계급으로 대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는 서열, 지위, 특권 따위로 표현되었던 예전의 계급제도는 부 또는 사회계급에 입각한 계층 매기기로 무너지고 말았다고 믿었다.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1818~1883)가 가장 좋아한 소설가가 발자크였다는 것은—발자크는 지독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발자크의 취지는 다른 많은 작가들에게 되풀이되어 나타났다.

영국 UK 작가 찰스 디킨스 Charles John Huffam Dickens(1812~1870)에게서는 중산층의 주인공이 자주 냉혹하고 엄격하며 우둔한 인물로 나타났고, 프랑스 미술가 오노레 도미에 Honoré Daumier(1808~1879)가 그린 19세기 초 법률가들의 유명한 풍자화는 권력과 거만함을 묘사한 진정한 초상이었으며,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 William Makepeace Thackeray(1811~1863)에게는 파노라마적 panoramic(전경사진적全景寫眞的) 작품 ≪허영의 시장 Vanity Fair≫으로 나타났다.

새커리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이렇게 통렬하게 관찰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현금 ready-moneny 사회이다. 우리는 은행가와 도시의 높은 양반들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그가 당신에게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 호주머니에 21실링짜리 금화를 짤랑거리고 있다."

문학 작품들은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는데, 작품 속 주인공이 작가의 관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은 여전히 놀라운 사회사적 세부 묘사와 통찰력의 원천을 제공한다.

한층 두드러진 중산층의 모습과 그들의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권력—이는 일부 작가들이 한탄한 점이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환호한 것이기도 하다 이 19세기 사회의 기본적인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중산층이었는가?(이 사회집단에 대한 또 다른 용어인 '부르주아지 bourgeoisie'는 본래 '도시 bourg' 거주자'를 뜻했다.)

중산층은 직업이나 소득에서 동질적인 단일체는 아니었다.

중산층 서열 안에서의 이동은 종종 한 세대 또는 두 세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서 중산층으로의 이동은 거의 드물었다.

중산층의 성공 사례는 대부준 중산층 내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농장주, 숙련 수공업자, 전문 직업인의 자제들에 해당된다.

지위 상승은 교육을 받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노동자의 자녀에게 교육은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이 드는 사치였다.

프랑스 혁명의 업적인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열린 출세의 길이 주로 뜻했던 것은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중산층 청년들을 위해 개방된 직업이었다.

시험 제도는 정부 관료 사회에서 중요한 승진 경로였다.

 

중산층에서 토지 귀족사회로의 진입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영국에서는 이들 계급 사이의 유동성이 유럽 대륙에서보다 좀 더 쉬웠다.

부유한 상층 중산층의 자제가 종종 그랬듯이 엘리트 학교 및 대학에 입학할 경우 그리고 정계 입문을 위해 상업 및 산업계를 떠날 경우 실제로 상향 이동할 수도 있었다.

리버풀 Liverpool 상인의 아들인 윌리엄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1809~1898)은 이튼 Eaton 기숙 사립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 University of Oxford라는 최상급의 학교를 다녔으며, 그렌빌 Grenville이라는 귀족 가문의 친척과 결혼했고, 결국 영국 총리 Prime Minister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글래드스턴은 영국에서조차 규범상 하나의 예외였고 대부분 상향 이동은 그리 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유럽 중산층은 지성과 박력과 일에 대한 진지한 헌신으로 출세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버텨나갔다.

영국인 새뮤얼 스마일스 Samuel Smiles(1812~1904)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자조론 Self-Help≫(1859)이라는 출세 입문서를 통해 중산층에게 소중한 복음을 전파했다.

스마일스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조 정신은 개인의 진정한 성장의 뿌리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국민적 활력과 힘의 진정한 원천이 된다."

또한 스마일스가 암시했듯이, 성공한 사람은 중산층의 체면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치권력과 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중산층의 요구는 자신들이 이전의 귀족계급과 상당히 다르지만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는 우월한 새로운 공적이 있는 사회적 엘리트층과 국가의 미래에 대한 정당한 관리인을 구성한다는 주장에 의존했다.

따라서 중산층의 체면은 규약처럼 많은 가치를 뜻했다.

그것은 가족을 책임지고 부양하고 도박과 채무를 피하는 재정적 독립을 뜻했다.

그것은 귀족적 특권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장점과 특징 그리고 귀족의 재산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것을 암시했다.

존경받는 중산층 신사들은 부유할 수도 있지만 눈에 띄는 소비, 사치스런 의복, 여성화되는 것, 그리고 귀족계급과 관련된 멋쟁이 행태 따위를 피하면서 수수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했다.

우리는 이것이 사회적 실제가 아니라 포부와 규약이었다고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중산층의 자아의식과 세계관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사생활과 중산층의 정체성

 

가족과 가정은 중산층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세기 소설에서 결혼으로 또는 결혼을 통해 신분 이동과 지위를 추구하는 남녀보다 더 일상적인 주제는 거의 없었다.

가족은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오리 실도 엉키지 아니함이란 뜻으로, 질서가 정연하여 조금도 흐트러지지 아니함)하게 실제적인 목적에 기여했다.

예컨대 아들, 조카, 사촌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되었을 때 가족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부인들은 회계를 관리했고, 장인丈人(아내의 아버지)들은 사업적 연계, 신용, 상속 따위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중산층의 사고에서 가족의 역할은 이런 실제적인 고려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가족은 한층 더 넓은 세계관의 일부였다.

반듯한 가족은 사업과 세상의 혼란과는 대조적인 요소를 제공해 주었고,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연속성과 전통을 마련해 주었다.

 

 

성 인지와 가정의례

 

중산층 가족이나 가정의 획일적인 형태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훌륭한 가정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와 그런 가정 안에서 널리 보급되어야 하는 의례, 계급제도, 높은 기품 따위에 관해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조언 편람, 시, 중산층 잡지 따위에 따르면 아내와 어머니는 자신의 배우자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았던 생활의 '분리된 영역'을 차지했다.

1847년 영국 시인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 Alfred Lord Tennyson(1809~1892)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남성에게는 밭과 여성에게는 화로를, 남성에게는 검과 여성에게는 바늘을······ 그렇지 않으면 혼란뿐일세."

이런 규범은 청소년에게도 적용되었다.

남자애들은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여자애들은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분리된 영역'이라는 19세기 관념은 법에 성문화된 훨씬 오래 지속된 가장의 권위라는 전통과 연관해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유럽 전역에 걸쳐 법은 여성을 남편의 권위에 종속시켰다.

1815년 이후 다른 나라들의 본보기가 된 나폴레옹 법전은 여성, 어린이, 정신병자를 한데 묶어 법적으로 무능력자로 분류했다.

영국에서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모든 재산권을 남편에게 양도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Austria에서 미혼 여성은 어느 정도의 법적 독립을 누렸지만 법은 보통 이들에게 부친을 '봉양'하도록 했다.

19세기의 성性 인지認知(성性 평등平等, 젠더 gender) 관계는 이런 법적 불평등에 기초했다.

하지만 분리된 영역이라는 사상이나 신조는 남녀의 영역이 서로 보완적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중산층의 글들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영적 평등에 대한 언급으로 채워져 있었고, 중산층 사람들은 부인이 '동반자'와 '내조자'인 결혼 생활에 대해 자랑스럽게 기술했다.

 

수많은 중산층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귀족적 관습과 반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반대되는 자신들의 가치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들은 중산층의 혼인이 귀족계급의 명가名家를 세우고자 목적한 것도 아니고 권력과 특권을 축적하기 위해 맺어진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혼인은 상호 존경과 책임 분할에 입각한 것이었다.

훌륭한 중산층 여성은 보통 여성의 운명이었던 끊임없는 노역에서 벗어났다.

빅토리아 시대 Victorian era(재위 1837~1901) 영국에서 '집안의 천사 angel in the house'라고 불렀던 중산층 여성은 자녀의 도덕 교육에 책임이 있었다.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는 것은 고상한 인품이 요구되는 벅찬 일이었다.

때때로 '가정의례家庭儀禮 cult of domesticity'라고 불렀던 이런 믿음은 여성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의 사고에서 중심적인 것이었다.

가정생활은 그 속에서의 여성 역할 확대와 더불어 새로운 의미가 주입되었다.

어느 젊은 여성은 여성 교육에 관한 대중 서적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이 채우고 있는 영역은 얼마나 중요한가! 여성은 그 영역을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되어야만 하는가! 이 점에서 나는 여성의 영역이 남성의 것보다 훨씬 더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19세기 초는 여성성女性性 femininity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를 불러왔다.

이러한 재평가의 근원에는 19세기 초의 종교와 사회를 교화하려는 노력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주로 프랑스 혁명 및 산업혁명으로 인한 무질서에 대항해 사회를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중산층 여성들은 주부로서 집안을 부드럽고 조화롭게 돌아가도록 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계산서들을 관리하고 하인들의 활동을 감독했다.

최소한 한 명의 하인을 두는 것이 중산층의 지위를 보여주는 표시였다.

그리고 좀 더 부유한 가정에서는 여자 가정교사와 유모가 아이들을 돌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애의 관점을 이상화했다.

하지만 중산층은 한 명의 여자 가정교사와 다섯 명의 하인을 둔 좋은 집에 사는 은행가에서 한 명의 하인만을 둔 마을의 목사에 이르기까지 부에 따른 많은 등급을 포함했다.

더욱이 집안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아마포와 의복은 만들어 입거나 수선해야 했다.

부자만 수돗물의 호사를 누렸고 그 밖의 사람들은 요리, 세탁, 청소 따위를 하기 위해 물을 길어다 데워야 했다.

석탄으로 난방을 하고 등유로 조명을 하는 일에는 청소하는 시간과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했다.

'집안의 천사'가 문화적 이상이었다면,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여성이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집 밖에서 생활비를 벌 별다른 선택권이 거의 없었다.

미혼 여성은 말동무나 가정교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영국 소설가 샬롯 브론테 Charlotte Brontë(1816~1855)의 여주인공 제인 에어 Jane Eyre가 그랬고, 그들은 까다로운 고용주와의 결혼으로 '구출될' 때까지 대체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여성의 도덕적 본성에 관한 19세기의 확신은 정치적 지도력에 대한 중산층의 갈망과 결합되어 중산층 부인들에게 자발적으로 자선사업이나 사회개혁을 위한 운동을 수행하도록 권장했다.

영국과 미국 USA에서 여성은 대영제국 안에서 노예무역과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 운동 중 다수는 사회악의 박멸과 도덕 향상에 헌신한 종교 조직 특히 프로테스탄트교(개신교) Protestantism에 활력을 주었다.

유럽 전역에 걸쳐 학교와 병원에서 빈민의 상태를 개선하고 금주에 찬성하며 매춘에 반대하고 공장 노동시간 입법을 위한 광범위한 운동은 종종 여성이 주도했다.

1850년대 러시아 Russia의 크림 반도 Crimean peninsula에서 싸우는 영국 군인들을 간호하기 위해 갔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1820~1910)은 그런 여성 중 가장 유명한 여성으로 남아 있다.

사회적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나이팅게일의 결심은 여성에게 여성 '고유의' 영역이라는 관습적인 개념에 도전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당대에 유명한, 다른 측면에서 악명 높은 인물은 본명이 아망딘 오로르 뒤펭 뒤드방 Amantine Lucile Aurore Dupin이었던 프랑스 여성 소설가 조르주 상드 George Sand(1804~1876)이었다.

상드는 남성처럼 옷을 입고 시가를 피웠으며, 그녀의 소설은 종종 관습과 불행한 결혼으로 인해 좌절된 독립적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1837년 영국 왕위에 오른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재위 1837~1901)은 도덕적인 정직함과 가사에 충실한 동시대 여성의 덕목을 반영하는 근엄한 공적 이미지 image(심상心象/心像)를 심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궁정은 분에 넘치지 않게 아주 적당해서, 그녀의 숙부로서 기사도 방식으로 한 세대 전에 상류층 생활방식을 규정했던 조지 4세 George IV(재위 1820~1830)의 궁정과 대조를 이루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오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각료들과 애국적이고 덕망이 매우 높은 남편 색스-코버그 Saxe-Coburg 출신의 앨버트 공 Prince Albert을 위해 이를 자제했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통치한 여왕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중산층에게 가장 친숙한 특성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산층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기질을 '빅토리아적 Victoria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 인지에 대한 19세기의 생각들은 여성성뿐만 아니라 남성성男性性 masculinity에도 충격을 주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이후 곧바로 남성은 수수하고 실용적인 옷을 입기 시작했고 이전에는 귀족적 남성성의 자부심이었던 가발, 주름 장식이 달린 옷깃, 착 달라붙는 짧은 바지를 사내답지 못하거나 멋 부리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열정 없음': 성 인지와 성욕

 

성욕性慾 sexual desire에 관한 빅토리아 시대의 생각은 19세기 문화의 여러 특색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사실상 걱정거리, 내숭, 무지와 동의어가 되어왔다.

영국의 한 어머니는 딸에게 신혼 초야에 관해 조언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뒤돌아 누워서 대영제국을 생각하려무나."

피아노의 다리를 덮어 가리는 에티켓도 분명히 필요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거리와 금지사항 중 많은 것은 희화화戲畫化된(어떤 인물의 외모나 성격, 또는 사건이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거나 풍자된) 것이었다.

좀 더 최근에 역사가들은 에티켓 책과 결혼 지침서에 나타난 가르침과 규범 중에서 남성과 여성의 실제 믿음이 어떠했는가를 풀어보려고 노력해왔다.

중요한 것은 역사가들이 각각의 책을 그 자체의 견지에서 이해하고자 해왔다는 것이다.

성욕에 관한 믿음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분리된 영역과 관련된 신념을 따랐다.

실제로 남성과 여성에 관한 19세기 생각의 뚜렷한 측면 중 하나는 그들이 자연에 관한 과학적 논의에 얼마나 의존했는가 하는 것이다.

확실히 남녀 각각의 성에 고유한 특정한 성격이 있다는 것을 강화하기 위해 도덕규범과 과학적 방법이 결합되었다.

남성과 여성은 상이한 사회적 역할이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그들이 신체에 근거해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1798~1857)는 다음과 같이 훌륭한 사례를 제시한다.

"생물학적 철학은 우리에게 동물계 전체를 통해 특정한 형태가 유지된다면 신체적이고 도덕적인 급격한 차이들은 성별을 구별해준다고 가르친다."

콩트는 또한 생물학적 차이에 내포된 뜻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너무나 많이 회자되는 성별의 평등은 모든 사회적 존재와 공존할 수 없다.······인간 가족의 경제는 우리의 대뇌 유기체의 완전한 변화 없이는 뒤집어질 수 없다."

여성은 고등교육에 적합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들의 뇌가 더 작거나 신체가 허약하기 때문이었다.

"28일 중 15일이나 20일(거의 항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은 환자일 뿐만 아니라 부상당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사랑의 영원한 상처로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다."

유명한 프랑스 작가 쥘 미슐레 Jules Michelet(1798~1874)는 여성의 생리에 대해 이렇게 썼다.

 

과학자와 의사들은 여성의 도덕적 우월성이 글자 그대로 성적 감정의 부재나 '열정 없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자와 의사들은 남성의 성욕을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자연적인 것으로서 해소되어야만 하는 제어하기 어려운 힘이라고 간주했다.

많은 정부들이 매춘을 합법화하고 규제했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그 이유는 매춘이 남성의 성욕을 위한 배출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매춘에 대한 규제에는 매춘 여성에 대한 강제적인 성병 검사도 포함되었다.

의사들은 여성의 성욕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않았지만 영국인 의사 윌리엄 액턴 William Acton(1813~1875)은 여성이 남성과 서로 다르게 기능한다고 주장하는 의사들과 다음과 같이 뜻을 같이했다.

 

"나는 이 주제에 관해 풍부한 증거를 확보하고 비교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내가 탐구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나는 여성 대다수가 (사회를 위해서는 행복하게도) 어떤 종류의 성적 감정으로 인해 그리 크게 고통 받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남성이 습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여성은 단지 예외적으로만 느낀다."

 

19세기의 다른 남녀들처럼 액턴 또한 성욕에 관한 한층 개방적인 표현은 남우세스러우며(남세스러우며: 남에게 놀림과 비웃음을 받을 듯하며) 노동계급의 여성은 덜 '여성답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믿음은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과 의학에 관해 상당히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이 사람들의 사사로운 생활을 필연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

성욕이 관련된 한에서 사회학자나 의사들의 주장보다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에 더 큰 문제는 믿을만한 피임법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금욕과 체외사정이 임신을 방지하는 유일한 공통적 기법이었다.

이런 방법의 효능도 제한적이었는데, 1880년대까지도 의사들은 계속해서 여성이 생리기간 동안과 전후로 한 시기에 가장 임신하기 쉽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산파와 매춘부들은 다른 방식의 피임과 인공 임신중절(이 방법은 모두 위험하고 가장 비효과적이었다)에 대해 알았고, 일부 중산층 여성들도 확실히 똑같이 했지만, 그런 정보는 존경받을 만한 중산층이 이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성교는 빈번한 임신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위험과 직접 연관되었다.

영국에서 100건의 출산 중 1건은 산모의 죽음으로 끝났다.

여성 한 명이 일생 동안 여덟 번에서 열 번 임신할 수도 있던 시대에 이것은 정신이 번쩍 드는 수치였다.

그런 위험은 사회계급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부유하고 더 나은 보살핌을 받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중산층 여성의 일기와 편지들이 기쁘면서도 걱정스러운 출산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아홉 명의 자녀를 출산한 빅토리아 여왕도 출산은 결혼의 '어두운 측면'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취법을 이용한 선구자이기도 했다나!

 

 

중산층의 공적 생활

 

중산층의 공적 생활은 글자 그대로 19세기의 풍경을 바꾸어놓았다.

중산층의 주택과 가구는 물질적 안정의 강력한 상징이었다.

견고하게 세워지고 온갖 장식을 갖춘 주택은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재력과 사회적 명망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지방 도시에서 그들의 주택은 흔히 독립 구조로 세워진 빌라 villa(별장식 주택)들이었다.

런던 London, 파리 Paris, 베를린 Berlin 또는 빈 Wien(영어 비엔나 Vienna)에서 주택들은 줄지어 늘어선 5층 내지 6층짜리 타운하우스 townhouse(공동 정원에 저층으로 건축된 공동주택)나 대규모 아파트 apartment였다.

주택들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오랜 세월 동안 버틸 수 있도록 지어졌다.

방에는 가구, 예술품, 융단, 벽걸이 따위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방들의 크기, 가구의 우아함, 하인들의 숫자 따위는 모두 당사자의 수입 규모에 달려 있었다.

은행원이 은행 간부만큼 우아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기준과 열망을 공유했다.

그리고 이런 공통의 가치들이 물질적 생활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동일한 계급으로 묶어주는 데 기여했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그들은 점차 분리되었다.

중산층은 산업화로 인한 불쾌한 광경과 악취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다.

통상 도시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들의 거주지는 바람의 주된 진행 방향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산업공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곳은 주로 자신들이 야기한 혼잡에서의 피난처였던 것이다.

상당수가 19세기 동안에 건축된 도시 중심의 공공건물들은 발전과 번영의 상징으로 찬양받았다.

귀족계급의 구성원이 특히 중부 유럽에서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중산층은 점차 도시의 일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흥 산업도시들에 시청, 증권거래소, 박물관, 오페라 공연장, 야외 음악당, 백화점 따위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세운 것도 신흥 중산층의 도시 지도자들이었다.

어느 역사가는 이 건물들을 '산업시대의 새로운 대성당들'이라고 불렀다.

이 건물들은 공동체의 가치와 공공의 문화를 나타내고자 의도한 것이었으며 사회적 변화의 기념물이었다.

 

교외도 마찬가지로 변화했다.

철도의 발달은 음악회, 공원, 온천 따위로의 소풍을 인기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철도는 가족들에게 상대적으로 적당한 비용으로 산이나 바닷가로 일주일에서 2주일이 걸리는 장기간의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경마장, 광천수 온천, 해수욕장 방갈로 bungalow(산기슭이나 호숫가 같은 곳에 지어 여름철에 훈련용, 피서용으로 쓰는 산막, 별장 따위의 작은 집) 따위를 제공하는 새로운 리조트 resort가 문을 열었다.

대중 관광은 20세기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친숙해진 1870년대와 1880년대의 인상파 그림들은 19세기에 극적으로 새로웠던 무언가, 즉 중산층의 여가는 새로운 영역을 증언해준다.

 

 

노동계급의 생활

 

중산층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 역시 다양한 하위 집단과 범주로 나뉘어졌다.

이 경우에 기준이 되는 것은 기술 숙련도, 임금, 성별, 작업 장소 따위였다.

노동자들이 어디에서 일하고, 어디에 살며, 무엇보다도 얼마나 버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들의 경험이란 것도 천차만별이었다.

숙련 섬유 노동자는 단순 육체노동자와는 판이한 삶을 누렸는데, 다시 말해 단순 육체노동자들이 근근이 먹고살았던 것에 비해 이들은 버젓한 삶을 누리며 필요한 의식주를 구비할 여유가 있었다.

 

미숙련 노동자층으로부터 숙련 노동자층으로의 사회적 이동은, 미숙련 노동자들이나 그 자녀들이 초보적인 교육만 받는다 하더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가족의 변변치 못한 수입에 보탬이 되도록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은 교육을 사치로 여기고 있었다.

숙련 노동자에서 미숙련 노동자로의 변동 또한 일어났는데, 예를 들면 직조기의 도입 같은 기술상의 변화로 말미암아 높은 임금을 받던 숙련 노동자들이 미숙련 노동자 및 영세민 계층으로 전락했다.

 

노동계급의 주택은 비위생적이었고 제대로 정비되지도 않았다.

오래된 도시에서는 이전에 한 가구가 살던 단독 주택이 자주 가구당 방 하나씩 돌아가는 아파트로 개조되었다.

새로운 공장제 수공업 중심지에는 매연을 내뿜는 공장 옆에 자그마한 주택들이 늘어섰는데, 서로 등을 대고 다닥다닥 맞붙어 지어져서 뒤뜰 공간은 아예 없을뿐더러 통풍도 되지 않았다.

북적대는 것은 흔해 빠진 일이었다.

1840년대를 기술한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영국의 북부 섬유산업 중심지인 리즈 Leeds에서는 보통 노동자의 주택이 14제곱미터(5평)에도 못 미쳤으며 "대부분의 경우 집들은 밤낮으로 사람들로 꽉 들어차서 거의 질식할 정도였다."

 

중산층도 해야 했던 일이긴 했지만 가정에서의 일상적인 일은 빈민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빈민 가족은 모든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생존 체계망(네트워크 network)으로 남아 있었다.

주부는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에 더해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이 버는 매우 적은 돈으로 가족을 재우고 먹이며 입혀야 했다.

훌륭한 아내는 힘든 시기에도 수지를 맞춰가며 살 능력이 있어야 했다.

노동하는 여성의 일상생활은 방 한 개 내지 두 개가 있는 북적대고 환기가 되지 않고 조명도 흐릿한 아파트에서 물을 길어와 끓이고 요리하며 세탁하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포함했다.

가족들은 식품 조달을 돕기 위해 자기 집 마당에 의존할 수도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시장에 가서 상했거나 거의 다 썩었거나 또는 위험한 이물질이 배합된 값싼 것들로 음식을 장만했다.

우유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포름알데히드 formaldehyde가 첨가되었다.

설탕에는 쌀가루가 혼합되었다.

코코아 cocoa에는 고운 갈색 흙이 섞였다.

 

 

산업혁명 시대의 여성 노동자

 

19세기에 노동하는 여성보다 더 큰 대중의 걱정과 강렬한 항의를 불러일으킨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동시대인은 북적거리고 눅눅한 작업장에서의 '무차별적인 남녀의 뒤섞임'에 대해 크게 염려했다.

19세기 작가들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작해 그들이 여성 노동의 경제적·도덕적 잔혹함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기록했다.

예컨대 거리를 뛰어다니도록 방치된 어린이들, 공장이나 광산에서 사고를 당한 어린 아이들, 석탄을 운반하는 임신부나 작업장에서 남성과 나란히 노동하는 여성 따위가 잔혹함으로 기록되었다.

 

여성 노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산업화는 여성 노동을 한층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여성과 어린이는 섬유산업과 같은 대다수 근대적 산업의 일부 분야에서 노동력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을 덜 받았고 문제를 덜 일으킬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제조업자들은 여성에게 문호가 개방된 다른 일자리와 비교해서 나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이웃 마을에서 여성 공장 일손을 고용하고자 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공장을 위해 '가난하면서도 적합한 가족들'을 찾기 위해 구빈법 시행 관리들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은 10~11세에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일단 자녀를 갖게 되면 그들은 자녀들을 유모에게 맡기거나, 공장으로 데리고 오거나 아니면 집에서 삯일(시간이 아니라 품삯으로 수당을 받는)을 하면서 계속 임금을 벌었다.

이 시대 동안에 노동 저항이 일어나게 된 공통적 원인 중 하나는 남성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일자리에 여성 노동자가 도입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여전히 공장에서 일하지 않았으며 성 인지에 따른 노동 분화도 눈에 띄게 바뀌지 않은 채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은 집이나 '착취작업장 sweatshop'이라고 부르는 매우 열악하고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거나 불법적인 근로 조건을 갖춘 혼잡한 작업장에서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이 낮은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했다.

그 임금은 작업시간이 아니라 작업량에 근거한 것으로서, 얼마나 많은 셔츠를 바느질하고 성냥갑을 풀칠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대다수의 젊은 미혼 여성은 낮은 임금을 받는 가정의 하녀로 일했는데, 많은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남자 주인이나 그 아들과의 강압적인 성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하녀는 숙식을 제공받았다.

미혼 여성이 단순히 자신의 임금만으로 살아갈 수 없던 시기에 도시에 막 도착한 젊은 여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 선택에는 곧바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결혼, 많은 경우 종종 매춘의 중심지였던 하숙집에서 방 한 칸 임대하기, 하녀로 일하기나 누군가와 동거하기 따위였다.

여성이 집안일을 위해 필요한 돈과 시간을 어떻게 균형을 맞추는가는 자녀들의 수와 연령에 따라 달랐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매우 어릴 때 실제로 십중팔구 일을 더 많이 했는데, 먹여야 할 입이 더 많았고 자녀들이 돈을 벌기에는 아직 어렸기 때문이었다.

 

노동계급 여성의 빈곤, 사생활의 부재, 그리고 특별한 취약성 따위가 이들의 성생활을 중산층 여성의 성생활과 매우 다르게 만들었다.

사생아의 출산은 1750년과 1850년 사이에 극적으로 증가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in Germany에서 1700년대 초에 2퍼센트이던 사생아 출산율이 1850년에는 25퍼센트에 달했다.

1840년 프랑스의 보르도 Bordeaux in France에서는 출생 신고된 젖먹이(영아嬰兒)의 3분의 1이 사생아였다.

이러한 사생아 출산율의 증가 이유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가족의 유대를 더욱 약화시키는 한층 더 큰 이동성과 도시화, 젊은 남녀에게 부여된 더 많은 기회 그리고 경제적 취약성 따위를 들 수 있다.

혼전 성행위는 전前 산업시대 촌락에서 용인된 관행이었지만, 촌락 생활을 지배하는 사회적 통제 때문에 거의 언제나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훨씬 더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장 마을이나 상업적 도시의 환경에서는 이러한 통제가 훨씬 약했다.

초기 산업시대의 경제적 불확실성은 취직 가능성에 기반을 둔 청년 노동자의 결혼 약속이 이행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뜻했다.

경제적 취약성은 많은 미혼 여성들을 출산으로 이어지는 일시적인 관계와 계속되는 빈곤과 자포자기의 악순환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시골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도 이런 일시적인 관계 중 상당수가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졌다는 것, 즉 사생아의 부모들이 나중에 결혼했음을 보여주었다.

19세기의 작가들은 도시에서 평판이 안 좋은 '위험한 계급들'의 성생활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극화했다.

그들 중 몇몇은 사생아, 매춘 따위를 노동계급의 도덕적 나약함 탓으로 돌렸고, 다른 작가들은 산업화로 야기된 체계적 변화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양쪽 모두 가족의 붕괴와 전통적인 도덕의 파괴를 과장해서 서술했다.

노동계급의 가족은 다음과 같은 성 인지 역할과 성적 태도를 전파했다.

즉, 소녀는 당연히 일을 해야 했고, 딸은 돈 버는 일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나이 어린 형제를 돌볼 책임이 있으며, 성생활은 생식의 실태이고, 산파는 절망적인 소녀 산모를 도울 수 있으며, 결혼은 존경할 만함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 따위였다.

이런 기대와 규약을 중산층 여성이 지닌 그것들과 구별하는 깊이 갈라진 틈을 19세기 계급 정체성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였다.

 

 

별개의 삶: '계급' 의식

 

공장 생활의 새로운 요구 사항은 공통적 경험과 난관을 만들어냈다.

공장제는 개별적이라기보다는 표준적인 작업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숙련 노동자들에게는 왕년에 누리던 기술에 대한 긍지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많은 노동자들은 선배들을 특정한 직종이나 장소에 결속시켜주었던 길드 guild와 정식 도제 생활이라는 든든한 보호막이 자신들에게서 떨어져 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러한 제도는 19세기 전반기에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불법화되거나 각종 입번으로 상당히 위축되었다.

공장의 작업시간은 길었다.

1850년 이전에는 보통 하루 12~14시간이었다.

직물 공장은 통풍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자재의 미세한 띠끌(미세먼지)이 노동자의 폐속으로 들어갔다.

기계에는 안전시설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민첩하리라는 이유에서 동력 부분의 아래와 주위에서 청소하게끔 고용된 아동 노동자들은 더더욱 위험에 처해 있었다.

1840년대 영국 의사들은 조사를 통해 특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장시간의 공장 노동과 가혹한 작업 여건으로 발병한 희생자들을 분류해놓았다.

척추가 굽어지는 증상과 기타 뼈대의 기형이 기계 앞에서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장시간 서 있는 데서 야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공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광산에서도 일어났다.

1841년 영국의 광산에는 5만 명 이상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지하 갱차坑車(광차鑛車: 캐낸 광석을 실어 나르는 뚜껑 없는 화차)나 수갱垂坑/竪坑('수직 갱도'의 준말)으로 석탄을 운반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가장 어린 아이들은 주로 12시간 내내 광산의 통풍 조절용 문짝을 작동시키는 일에 배치되었다.

이 아이들이 장시간 작업으로 잠에 곯아떨어져 전체 작업 인부들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공장들은 또한 새로운 일상적 일과 규율을 부과했다.

이전 시대의 숙련공은 극히 적은 보수로 매우 장시간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배정하고 작업 과정을 계획하면서, 그리고 자택에 있는 작업장에 있다가 자그마한 뒷마당으로 갔다가 마음대로 작업장을 들락거리면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태에서 노동을 했다.

그런데 공장에서는 모든 '일손'이 호루라기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규율을 익혀야 했다.

공장은 효율적 가동을 위해 모든 노동자들이 동시에 일을 시작하고 끝낼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시계를 볼 줄 몰랐을뿐더러 시계를 갖고 있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아무도 기계의 냉혹한 작동 속도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생산 증대를 위해 공장제는 제조 공정을 각각 일정한 시간이 할당된 분업 단계들로 편성하는 것을 권장했다.

그것은 자신의 속도에 따라 작업을 완수하는데 익숙해진 노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기술 혁신이었다.

노동자들은 기계 자체를 자신들의 삶을 뒤바꿔놓고 자신을 산업 노예로 묶어놓은 폭군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840년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급진적 노동계급의 노래는 그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왕이 있네, 그것도 무자비한 왕이

시인이 꿈꾸는 왕은 아니라네

폭군이 망했네, 백인 노예들은 잘 알지

그 잔혹한 왕은 증기蒸氣라네"

 

노동계급 삶의 뚜렷한 특징은 실업, 질병, 위험한 작업에서의 사고, 가정 문제, 식품 가격의 폭등 따위에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직종에서 높은 비율을 보였던 주기적인 실업 때문에 규칙적인 임금을 받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공산품 시장은 소규모였고 불안정해서 주기적인 경제 불황을 야기했다.

그래서 경제 불황이 다가오면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신을 부양하기 위한 아무런 실업 보험제도 없이 해고되곤 했다.

산업화 초기 몇십 년 동안은 몇 차례의 심각한 농업 불황과 경제 위기로 점철되었다.

1840년대 위기가 있던 몇 년 동안 영국 산업도시 노동인구의 절반이 실업자였다.

1840년대 파리에서는 8만 5천 명이 구호救護(재해나 재난 따위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 보호함)로 살아갔다.

각 가정은 푼돈 벌이 일자리에서 일하거나, 소유물을 전당잡히거나, 동네 와인 상점과 식료 잡화점에서 외상을 지는 방식으로 살아갔다.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노동계급의 삶은 노동자의 자조협회, 우애협회, 초기 사회주의 조직 따위가 우후죽순으로 창설되는데 일조했다.

그것은 또한 경제 위기가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다양한 경험들이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중산층과는 다르면서 반대된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작업장에서의 변화는 그것이 기계 및 공장 노동의 도입, 능률 촉진, 저임금 노동과의 도급 계약, 또는 길드 보호의 상실이든 아니든 큰 그림의 일부였다.

급속하게 팽창하는 19세기 도시들에서의 사회적 분리 또한 노동계급이 별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계급적 차이는 매우 광범위한 일상의 경험과 믿음, 즉 일, 사생활, 자녀에 대한 기대, 남녀의 역할, 존경받을 만함의 정의 따위에서 깊이 새겨진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이 모든 상이한 경험은 '계급 class'이라는 단어에 구체적이고도 특정한 의미를 주었다.

 

 

◎19장 결론

 

1800년과 1900년 사이에 유럽 인구는 두 배로 늘어났고, 유럽의 국민총생산 GNP도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성장에 관한 놀라운 통계수치조차도 유럽의 경제, 정치, 문화가 얼마나 크게 변모했는가를 암시해주는 수준일 뿐이다.

산업혁명은 세계사에서 전환점 중 하나였다.

그것은 하룻밤에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균일하게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1900년에도 농업은 여전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는 분야였다.

광대하게 뻗어 있는 유럽의 마을과 농장은 실질적으로 산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지주들은 여전히 자신이 신흥 엘리트층과 권력을 공유해야만 했을 때조차도 엄청난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변화는 어떤 면으로든 엄청난 것이었다.

그 변화는 지구 곳곳에 미쳤으며 보통사람들의 사생활에 스며들었다.

가족구조도 변했다.

산업은 유럽의 풍경을 바꾸어놓았으며 심지어 한층 더 근본적인 것으로서 환경에 대한 인류의 관계도 변화시켰다.

이어지는 다른 장들에서 보겠지만 통신·수송·경제에서의 혁명적 변화는 국민국가와 관료제의 팽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경제적 부상浮上(훨씬 좋은 위치로 올라섬) 또한 점차 산업화되는 서구를 향해 저울추를 기울게 하면서 전 지구적 세력 균형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경제 발전은 새로운 가치의 척도가 되었고 기술은 진보의 척도가 되었다.

서구는 점차 선진 산업 경제를 이룩한 국가들로 연상되거나 규정되었다.

 

산업화는 새로운 종류의 빈곤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부를 창출했다.

산업화는 또한 사회집단 사이의 불균형에 대해 예리한 깨달음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러한 불균형은 18세기에는 출생, 서열 또는 특권의 관점에서 서술되었으나, 19세기에는 점차 계급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의 숭배자와 비판자는 이구동성으로 '계급사회'를 말하고, 새로운 계급적 정체성은 당대의 또 다른 핵심적 특징이었다.

그 정체성은 인구가 늘어나면서 과밀해진 신흥 도시의 노동계급 지역, 일상의 노동 경험, 체면이라는 새로운 개념, 그리고 중산층 가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정치적 사건들에서 또렷해질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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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2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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