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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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단발령망금강'

새샘 2025. 11. 18. 11:54

"11월에 금강산을 그리워하다"

 

이인문, 단발령 망금강, 조선 후기, 종이에 수묵, 23x45cm, 개인(출처-출처자료1)

 

산은 블랙홀 black hole이다.

필자는 날마다 아침이면 블랙홀로 빠져든다.

햇살 가득 품은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면 낙엽이 우수수 진다.

순한 소리가 귓속에 쌓인다.

자연의 합창이다.

그 소리에 북받쳐 나무를 감싸 안는다.

눈을 감고 자연의 온기를 느낀다.

행복한 느낌이 가득찬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는다.

 

천을산 정상에 서면, 저 멀리 팔공산이 병풍처럼 서 있다.

서봉을 지나 정상에서 갓바위로 뻗은 팔공산이 거인처럼 누워 있다.

필자는 기지개를 켜며 팔공산의 정기를 받는다.

순간 필자는 산이 된다.

 

화가는 절경을 찾아 떠난다.

직접 자연을 체험하고 그 느낌을 오롯이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서다.

화가에게 여행은 생생한 현장학습이자 체험학습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여행 붐 boom이 일면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우리나라에 실재하는 경관의 사생寫生에 주력하는 화풍)가 유행한다.

화가들이 실제 자연을 보고 그 감동을 표현한 것이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선호한 여행지는 단연 금강산이었다.

화가라면 한번쯤 금강산을 둘러보며 그린 그림으로 화첩을 제작하는 꿈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1745~1824)의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이 좋다.

왠지 금강산을 대하는 화가의 비장함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당장이라도 금강산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여행은 화가에게 영감과 활력을 충전시켜준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11월은 자연을 느끼기에 좋은 시절이다.

나무는 원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울긋불긋해진다.

산도 나무의 화려한 색상에 맞춰 계절의 옷을 갈아입는다.

높푸른 하늘은 붉게 물든 산을 더욱 선명하게 연출한다.

그런데 단풍은 일제히 타올랐다가 금방 스러진다.

11월이 더 아름다운 것은 바로 낙엽이 있어서이다.

흩날리는 낙엽 따라 마음은 한없이 평온해진다.

 

조선시대 후기, 우리 것을 찾으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이 활발하던 때에 이인문은 화원화가로 활동했다.

단원 김홍도과 동갑으로 당대 유명한 이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갈고닦았다.

예술적 기량이 집약된 걸작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가 상징하듯 그는 산수화의 대가였다.

진경산수화가 유행할 때,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선보이며 독창적인 화풍으로 화단을 풍성하게 했다.

 

현존하는 웅장한 금강산 그림이 많지만 <단발령망금강>처럼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작품은 드물다.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 화면 구성부터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지명 또한 의미심장하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로 태어난 마의태자가 삭발을 하고 출가했다는 전설 때문에 '단발령斷髮嶺'이다.

그래서일까.

누구나 이 고개에 올라서면 장엄한 금강산 풍경 앞에 저절로 머리를 깎고 귀의하고픈 생각이 들 것만 같다.

단발령에서 본 금강산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유람선처럼 보인다.

안개의 바다를 떠다니는 거대한 자연이 행운의 선물이라도 전해줄 것만 같다.

 

<단발령망금강>은 금강산이 흙산(토산土山)의 그릇 속에 보석처럼 반짝이며 소복이 담겨 있는 모습이다.

앞쪽의 단발령 고개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지팡이를 짚고 도포자락을 걷어 올린 나그네는 먼 길을 온 탓인지 자세가 구부정하다.

반면에 걸음을 재촉하며 금강산으로 향하는 두 사람은 마음이 급하다.

안개는 속세와 내세를 경계 지으며, 아득히 먼 풍경을 죽순처럼 돋워낸다.

단발령은 마치 속세에서 내세로 들어가는 '불이문不二門' 같다.

소나무와 언덕 사이에 안개로 길을 열어 두었다.

 

화면 한가운데 흙산은 물기를 가득 먹인 붓으로 미점米點(동양화에서, 수목이나 산수 따위를 그릴 때 가로로 찍는 작은 점)을 찍어서 표현했다.

토산에는 비경이 안겨 있다.

안개는 여백의 미를 조성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나그네들이 휴식을 취할 만한 소나무가 있고 잡풀이 듬성듬성 나 있다.

안개 속에 떠 있는 금강산은 미지의 세계처럼 장중하다.

화면 오른쪽 위에 '단발령망금강'이란 제목이 있고, 왼쪽 아래에는 이인문의 낙관이 있다.

그림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구성이 강렬하다.

 

이인문은 산수화로 이상세계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호에서 느낄 수 있듯이 '고송古松'과 '유수流水'를 바라보는 도인처럼 그는 자연에 귀의하고자 했다.

중국과 우리의 화풍을 절묘하게 활용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선구자였다.

 

지금은 비록 금강산에 갈 수는 없지만 집 근처에 있는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가을의 운치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산에 가려면 많은 경비와 발품을 팔아야 했지만 지금은 마음만 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산은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직접 찾아가서 온몸으로 호흡하는 것이 제일이다.

떠나보면 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2019. 계명대학교 출판부

2. 구글 관련 자료

 

2025. 11. 1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