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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4: 러시아, 미국, 캐나다에서의 국가 건설 1-러시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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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4: 러시아, 미국, 캐나다에서의 국가 건설 1-러시아

새샘 2026. 4. 29. 23:27

국가주의(내셔널리즘 nationalism)와 국가 건설이라는 도전은 러시아 Russia, 미국 USA, 캐나다 Canada에도 다가왔다.

세 나라 모두에서 국가 건설은 영토 및 경제적 팽창, 새로운 사람들의 편입,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에서는 농노제와 노예제라는 엄청난 문제들과 씨름해야 하는 일이 수반되었다.

 

 

○러시아의 영토, 국가 그리고 농노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사진(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2%B0%EB%93%9C%EB%A5%B4_2%EC%84%B8)

 

1649년에 법적으로 공식화된 러시아에서의 농노제는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II(영어 Catherine II)(또는 예카테리나 대제 Catherine the Great)(재위 1762~1796) 치하에서 러시아의 지식인 계급인 인텔리겐치아 intelligentsia로부터 커다란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1789년 이후 그리고 특히 1848년 이후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자 이 문제는 한층 더 절실해졌다.

농노제의 폐지는 러시아를 근대 국가로 건설하려는 좀 더 거대한 과제(프로젝트 project)의 일부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많은 논의의 주제였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사상 학파가 등장했다.

'친슬라브주의자' 또는 낭만적 국가주의자(내셔널리스트 nationalist)는 러시아의 뚜렷한 특징을 보존하고자 했다.

그들은 서구의 세속주의, 도시적 상업주의, 부르주아 bourgeois(자본가) 문화 따위를 거부하면서 전통적인 러시아 문화와 농민공동체를 이상화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구화론자'는 러시아가 유럽의 과학, 기술, 교육 분야에서의 발전을 채택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그들은 이러한 발전이 서구 자유주의와 개인적 자유를 보호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믿었다.

두 집단은 모두 농노제 폐지에 동의했다.

하지만 러시아 귀족은 농노 해방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영주들에게 '자신의' 농노에 대한 손실을 어떻게 보상해줄 것인가와 해방된 농노가 전면적인 토지 재분배 없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난마처럼 뒤얽힌 논쟁 역시 농노제 해방 문제의 진전을 막았다.

크림 전쟁(1853~1856)이 이러한 난국을 해결했다.

크림 전쟁으로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재위 1855~1881)는 농노 해방 문제를 밀어붙였다.

농노제의 지속이 국력을 서서히 약화시키고 크림 전쟁에서 패배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한 가운데 농노제가 폭력적인 갈등을 계속 촉발시킬 것이라고 설득당한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칙령으로 농노제를 종식시켰다.

 

1861년의 농노 해방 칙령은 당찬 개혁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칙령으로 인한 변화는 제한적이었다.

이 칙령은 약 2,200만 명의 농노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하고 그들이 일했던 토지 일부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주었다.

그것은 또한 국가가 지주들에게 그들이 양도한 재산에 대해 보상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규모 지주들은 자신의 보상금 지급 청구를 엄청나게 부풀렸고, 자신을 위해 가장 수익성 좋은 토지의 상당 부분을 존속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농민에게 부여된 토지는 종종 토질이 좋지 않았고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도 충분하지 못했다.

더욱이 새로이 해방된 농노는 자신의 토지에 대한 할부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 토지는 사실 농민에게 개별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할부금을 징수했던 마을 공동체에게 부여된 것이었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의 농촌 생활의 유형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토지 할부금 체제는 농민을 독립 자영농이 아니라 이전 주인들의 농업 노동자로서 마을에 묶어두었다.

 

러시아는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영토도 확장했다.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는 동부와 남부에 압박을 가했다.

러시아는 이전의 비단길(실크로드 Silk Road)을 따라 독립한 몇몇 이슬람 Islam 왕국들을 침공해 정복했고, 자연 자원을 찾기 위해 시베리아 Siberia로 팽창했다.

러시아 외교는 중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상업적 양보를 억지로 받아냈다.

이것은 결국 러시아가 1860년 시베리아에 블라디보스토크 Vladivostok 시를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러시아의 인종적·민족적·종교적 차이들은 통치 행위를 위축시켰다.

대부분의 경우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영토 사람들을 동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민족적 특수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렇게 이질적인 사람들을 통치하는데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는 실용적인 대응인데도 말이다.

국가가 새로 획득한 영토 사람들에게 러시아 문화를 강요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 결과는 참담했다.

19세기의 차르 tsar(제정 러시아의 황제 칭호) 또는 나중에 소련이 휘두른 권력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강력한 지방분권 세력은 완전한 통일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한 덩어리인 방대한 제국이 되었지만 결코 하나의 국가를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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