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가짜 고고학, 그 위험한 유혹 본문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고대 외계인이 남겼다는 주장은 우리 주변에서 널리 퍼져 있다.
서양에서도 그레이엄 핸콕 Graham Hancock이나 폰 프란케 처럼 우주인과 고대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대중적인 인기와 경제적인 성공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인터넷의 성장에 이어 유튜브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이런 고대 문명을 믿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지금도 고대 문명은 외계인이 만들었다면서 신기한 자료(예컨대 이집트 Egypt의 헬리콥터형 모형, 나스카 Nasca의 비행기, 팔렝케 Palenque의 석관 따위)를 필자에게 보여주면서 의견을 묻는 사람을 만나면 참 난감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게 고고학이다.
필자도 20여 년 전만 해도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와 같은 구석기시대에 발달된 제사의 흔적이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고고학자를 궁지窮地(딜레마 dilemma)에 빠뜨리는 것은 고대에 발달된 문명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외계인이나 UFO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나타난 외계인의 증거나 미확인 비행체가 없는데 어떻게 비교를 한다는 것인가?
외계인설은 사실 믿음의 영역이지 고고학의 영역이라 보기 어렵다.
외계인 창조설의 근거는 "이렇게 발달된 기술을 고대의 인간이 알 리 없다"와 "이제까지 발견된 모든 유물은 인간의 과거를 파악하는 데에 크게 무리가 없이 완벽하게 밝혀졌다"는 잘못된 전제이다.
모두 고고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과연 우리가 밝혀낸 고대인의 모습은 실제의 몇 퍼센트 정도일까?
지금도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고, 더 많은 유적이 아직 땅속에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통념이 바뀌는 발견은 이어질 것이고, 그것이 날마다 새로운 자료가 등장하는 고고학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예상치 못한 발견이 곧바로 외계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외계인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대부분 몇십 년 전에 조사된 단편적인 근거만을 가지고 주장할 따름이며, 최근까지 발굴되고 연구된 조사 성과를 참고하지 않는다.
○그 많던 UFO는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보면 고대 문명을 외계인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1960~1980년대에 주로 등장했다.
이 시기는 바로 현대사회가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s, 미확인 비행물체)에 고도로 집착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필자도 어릴 때부터 UFO나 외계인의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고, 청소년이 읽는 거의 모든 잡지나 신문에서 UFO의 이야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미국 로스웰 공군기지 Roswell Air Center in USA의 우주인 촬영물을 비롯해서 우주인을 만나거나 생체실험에 이용되었다는 체험담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하게도 21세기에 탐지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모든 사람이 손에 고성능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smartphone 시대에 들어서 UFO의 이야기는 거의 사라졌다.
미확인 비행물체가 지나갔다면 수많은 사진으로 남겨지고 SNS(Social Network Service, 누리 소통망 서비스)에 퍼질 텐데, 정작 제대로 된 UFO나 우주인의 발견 사례는 거의 없다.
가끔 UFO의 사진을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도대체 그 많던 UFO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UFO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냉전과 핵폭탄의 공포가 엄습하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매카시즘 McCarthyism(1950~1954년의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 횡행하고, 핵폭탄으로 세계가 멸망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여기에 미국과 소련 사이의 극단적인 우주 경쟁이 더해지며 UFO 현상을 부추겼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고작 6년 만인 1959년에 소련蘇聯(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USSR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Yuri Alekseyevich Gagarin(1934~1968)은 우주로 날아갔다.
여기에 맞서서 엄청난 인력과 자본을 투자한 미국도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9년에 아폴로 11호 Apollo 11를 달에 착륙시켰다.
세계 인류의 대부분이 가난과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美蘇 양국은 자존심을 걸고 우주에 천문학적 자본을 투자하며 무한 경쟁을 했다.
UFO 현상은 이러한 돈을 우주 공간에 퍼붓는 정책에 대한 국민적인 반발을 막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UFO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냉전이 끝나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정보가 대폭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클릭으로 비행기나 인공위성의 궤도가 알수 있는 것과 같은 새로운 기술과 정보에 대한 지식이 무제한적으로 제공되면서 비밀스러운 UFO가 설 땅이 없어진 것이다.
○UFO와 고대문명이라는 자극적인 맛
고대 문명 창조론이 등장한 시점은 이렇게 UFO 현상이 유행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은 원래 외계 어디에선가 날아온 외계인이 대신 만든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 극히 일부의 증거를 오해해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대서양에 가라앉았다고 하는 아틀란티스 Atlantis 대륙의 이야기는 플라톤 Platon(영어 Plato)이 이집트의 신관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들어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기 위한 우화에 불과하다.
해마다 누리집(포털 portal)의 제목에 '아틀란티스 발견'이라거나 '고대 문명의 유물에서 우주선 발견' 같은 자극적인 제목이 등장하지만 정작 뚜렷하게 발견된 유물은 없다.
대부분 비슷한 유적이나 유물을 견강부회牽強附會(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하는 식이다.
예컨대 대서양 주변에서 해상 속에서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발견되면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형국인 것이다.
비유하면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조선시대 유물만 발견되면 '이순신 장군의 유물 발견'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발견'가운데는 고고학자가 보기에 황당한 것이 많다.
아틀란티스의 후보로 얼마 전에 '사하라의 눈'이라는 자연지질 형상이 떠올랐다.
사막 속에서 지름 40킬로미터 크기의 소용돌이 같은 형상의 구조물이 발견되어 그 자체로도 보는 사람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주변에 어떠한 인간의 유물도 없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물의 형태가 원형 고리라는 이유만으로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튀르키예 아라라트산 Ararat Mountain in Türkiye에서 발견되었다는 '노아의 방주方舟 Noah's Ark'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아라라트산 위에 자연적으로 마치 배 모야의 타원형으로 형성된 자연적인 암석이 노아의 방주로 기착하고 남은 흔적이라고 믿는다.
과연 나무로 만든 배가 어떻게 그 형태 그대로 암석화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와 탐험가가 노아의 방주에서 '흔적'을 발굴했고, 튀르키예와 이란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고학자가 정식으로 조사한 적은 없다.

외계인의 흔적으로 드는 또 다른 증거로는 마야문명 Maya civilization의 멕시코 팔렝케 유적 Palenque ruins in Mexico에서 발견된 석관石棺(돌관)이 있다.
팔렝케의 석관은 서기 683년에 죽은 마야 팔랑케 Maya city of Palenque를 다스리던 파칼 대왕 King Pakal이 묻혀 있는 아주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이다.
파칼 대왕의 옥玉 가면과 화려한 황금유물로 마치 신라의 황남대총에 비견할 만한 유적인지라 고대 문명의 강의 시간에 반드시 등장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런데 이 파칼 대왕이 묻혀 있는 석판의 뚜껑에는 왕의 모습이 새겨졌는데 마치 복잡한 기계로 가득 찬 좁은 우주선에 사람아 앉아서 조종하는 듯한 모습이다.
굳이 비교하면 팔렝케 석관과 비슷한 우주선의 모습은 갓 우주로 날아가기 시작했던 1960~1970년대의 초기 우주선과 흡사하지만, 만약 몇십 광년 떨어진 지역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기술의 우주인이 있다면 이런 원시적인 우주선을 운전했을 리 없지 않을까?
○내 머릿속의 외계인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유물은 세계 곳곳에 넘쳐난다.
예컨대 알타이의 카라콜 유적 Karakol ruins in Altai에서 3,800년 전 샤먼 shaman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무덤의 석판石板(돌판)에는 마치 파충류의 머리를 하고 우주복을 입은 듯한 모습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심상心象(이미지 image)은 2000년대에 들어서 수많은 공동체(커뮤니티 community)에서 나돌았다.

필자 역시 보는 순간 1980년대 중반에 보았던 미국 드라마 drama <V>에서 보았던 파충류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 떠올랐다.
그런데 만약 필자가 그런 방송매체를 접하지 않았다면 외계인이 떠올랐을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외계인 모습은 지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생물의 심상이 조합된 것이다.
흔히 외계인 머리라고 하는 길쭉한 머리 형태는 '편두扁頭(납작머리) artificial cranial deformation'라고 해서 몇천 년 동안 인간이 만들어낸 풍습의 일환이다.
이 편두가 외계인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 계급사회가 되면서 지배 계층이나 제사장이 자신의 선민의식選民意識(한 사회에서 남달리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잘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자를 자처하고 머리 형태를 특이하게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도 왕이나 귀족을 하늘이 내린 신분으로 생각하고 신격화하는 나라가 남아 있다.
하물며 고대에는 자신을 별이나 태양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자처하고 의식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인간 몇천 년의 풍습이 20세기 후반 우주비행 기술이 발달하며 외계인설로 바뀐 것이다.
○외계인은 필요 없다
지금도 수많은 고고학 유물이 발견되며 문명에 대한 우리의 상식은 바뀌고 있다.
다만 그러한 발견이 공인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까지 토기는 신석기시대에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일본과 러시아 Russia 연해주沿海州 지역(프리모리예 Primorye 지방)에서 1만 년 전 구석기시대 토기들이 나오더니, 최근 중국 양쯔강 Yangtze River(장강长江/長江, 양자강扬子江/揚子江) 남쪽 셴런둥(선인동仙人洞) 유적에서 2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토기가 미국과 공동 연구로 밝혀졌다.
이제 구석기시대에도 토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식이 되고 있다.
또한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 Göbekli Tepe ruins in Türkiye에서 발견된 거대하고 찬란한 신전도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약 1만 2,000년 전에 만들어졌음은 이미 학계에서 널리 공인되었다.
바야흐로 우리가 생각하는 고대 문명에 대한 통설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으며, 몇십 년 동안의 꾸준한 연구와 교차검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구석기시대의 토기는 이미 1960년대 이후 50여 년 동안 국제적인 논쟁과 연구가 이어졌고,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발견을 위해서는 30년 동안의 연구가 필요했다.
이런 신중함이 없이 한두 개의 증거를 들어 전혀 새로운 고대사를 주장하고 기존 학계를 불신한다면 마치 한 알만 먹으면 불치병을 고친다는 사이비 약 광고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UFO와 달리 고대 문명의 연구는 단순한 호기심 거리를 넘어서 역사 인식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고대 문명은 언제나 사람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 고대 문명의 진실을 얻는 과정에서는 최대한 그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제대로 된 근거가 없이 고대사에 제기하는 허황된 주장은 결국 유행 지난 UFO 현상처럼 시들이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고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우리의 상식은 깨지고 있다.
고대 유적들을 실체도 없는 외계인에 억지로 연결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의 과거는 매력적이다.
○미라 저주의 진실
1. 1922년에 이집트 투탕카멘왕 King Tutankhamun of Egypt의 미라를 발굴한 직후 발굴에 연관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2. 몽골 Mongolia(몽고蒙古) 정부가 칭기즈칸 Genghis Khan(성길사한成吉思汗)의 무덤을 은폐하는 이유는 대칸(대한大汗: 제국을 통치하는 군주의 칭호)이 노해서 몽골에 재앙을 내리기 때문이다.
3. 러시아 알타이 Altai in Russia에서 얼음공주 미라를 발굴하자 신의 분노를 사서 큰 지진이 발생했다. 그래서 전시된 미라는 샤먼이 허락한 날에만 공개된다.
몇 가지 흔히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도는 대표적인 고고학 관련 이야기의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짐작했겠지만 대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사람들이 미스터리 mystery(신비)만 좋아해서 그렇지 고고학과 관련된 여러 도시 괴담에 대해서는 사실 많은 책이 출판되었고 약간만 검색하면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3번의 뒷부분은 놀랍게도 사실이다.
실제로 알타이 정부가 관할하는 박물관에 보존된 알타이의 미라가 처한 현실은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이 어떻게 유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2,400년 전 유목민족의 샤먼

도대체 '얼음공주 (Siberian) Ice Maiden(또는 Princess of Ukok/Altai Princess)'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알타이공화국 Republic of Altai에서 지역 정부 차원에서 숭배를 받는 미라의 실체는 무엇일까?
여기에 신비로운 이야기가 끼어들 틈은 사실 없었다.
그녀의 살아생전 역할과 사인 따위에 관한 많은 사실이 이미 고고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1993년에 2,500년 전 시베리아 Siberia의 한가운데 알타이의 초원에서 유목민의 삶을 달래주던 여성 샤먼(사제司祭, 제사장祭司長)의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는 고대 초원지역의 삶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었다.
이 여성 미라는 '알타이의 공주 Altai Princess'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95년에는 한국에서도 전시된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일반인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이 미라는 공주가 아니었고, 그 삶도 그리 녹록지 않았다.
고고학이 밝혀낸 그녀의 삶은 무척이나 힘들고 외로웠던 것 같다.
거친 유목 전사들 사이에서 외롭게 살면서 신탁神託(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는 일)을 내리고 점을 쳤지만, 몸은 지치고 병들어서 20대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 크지 않은 무덤에 묻혔고 그나마도 다른 고분과 달리 따로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무덤은 다른 유목민의 무덤과 달리 전사의 유물도 별로 없었으며 여러 약초와 의식용 유물과 함께 묻혔다.
이 미라는 발굴 당시에 얼음 속에서 발견되었고, 고고학자의 신속한 조치로 큰 손상이 없이 3,400킬로미터나 떨어진 모스크바 Moscow의 미라연구소로 이송되었다.
보존 처리가 끝난 미라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MRI 조사를 통해 그녀의 지병과 사인이 밝혀졌다.
이 여성 샤먼은 어려서부터 골수염을 앓았고, 사망 당시 유방암 4기였는데 낙상을 했는지 몸의 곳곳에 심한 외과적 손상도 발견되었다.
골수염은 주로 무릎관절에 생기는데, 관절을 통해 세균 감염이 지속되기 때문에 통증도 심하고 고치기도 거의 어렵다.
평생 말을 타고 다녀야 하는 기마민족의 고질병이다.
유방암으로 몇 년 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고, 죽기 3~5개월 전에는 낙상사고를 입어 오른쪽 어깨와 골반뼈가 손상되는 외상을 입었다.
○과학이 복원한 고대 미라
이렇듯 알타이 샤먼은 어려서부터 골수염을 심하게 앓으며 혼자 살 수밖에 없었고, 대신에 집안의 가업을 이어받아 의례를 주재하고 신과 맞닿는 삶을 살아갔다.
유목민의 자제로 산다는 것은 그들과 똑같이 험난한 산을 따라 유목생활을 해야함을 뜻한다.
평생을 떠도는 유목민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야 비로소 이동을 멈출 수 있었다.
알타이의 샤먼도 죽기 전까지 힘든 몸을 이끌고 계속 유목을 하며 함께 다녀야 했다.
우코크 Ukok 미라의 무덤에는 대마 씨, 고수, 쿠릴차茶 Kuril tea(물싸리), 멘톨 menthol(박하뇌) 향이 강한 지지포라 Ziziphora interrupta와 같은 다양한 약초도 함께 발견되었다.
평소 의식에 사용하는 환각, 진통, 향균 효과가 나는 이들 약초로 고통을 달랬음을 말해준다.
남아 있는 갈비뼈의 골절 상태로 볼 때 고원지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낙상 사고를 입고 그 해 겨울에 결국 세상을 떠났음이 밝혀졌다.
그녀가 묻힌 우코크 고원 Ukok Plateau은 겨울 목초지로 해발 2,400미터가 넘는 높은 곳이다.
알타이의 샤먼이 몇 달 동안 누워서 투병 끝에 숨을 거두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예언했던 여사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땅이 녹아 무덤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며 그녀의 모습을 온전히 하려고 염습殮襲(시신을 씻긴 뒤 수의를 갈아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을 했다.
기본 원리는 이집트 Egypt의 미라를 만드는 법과 비슷하여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갈고리로 머리 속의 뇌수를 뽑아냈다.
그리고 빈 자리는 부패를 막는 약초들로 채우고 다시 꿰매서 원형을 유지시켰다.
피부에도 부패를 막는 약초를 바르고 시신이 베었던 베개와 주변에는 고수풀 같은 강한 향과 항균 작용을 하는 풀로 덮었다.
얼었던 땅이 녹는 기간인 6월이 되자 사람들은 샤먼을 위한 마지막 축제를 준비했다.
양지바른 언덕 위의 땅속 얼음을 깨어 그녀의 무덤을 만들고 그녀가 평소에 입었던 옷과 화려한 머리장식을 갖추어서 통나무 관에 넣었고, 저승에서도 똑같이 살기를 바라며 그녀가 살아생전 천막의 벽에 걸었던 펠트 felt(양털이나 그 밖의 짐승의 털에 습기·열·압력을 가하여 만든 천)와 각종 집기를 넣었다.
관의 옆에는 생명의 원천인 우유를 담은 토기와 저승에 가서 먼저 간 친척들과 잔치를 벌이기 위한 양고기 요리를 넣은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천상에 올라갈 말들을 화려하게 치장하여 무덤 위에 순장殉葬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병이나 아픔이 없는 저승에서 푸른 목초지와 여러 약초가 피어 있는 초원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알타이 미라의 저주인가, 미신인가?
무덤에 묻힌 2,400년 전의 사람을 이렇게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미라 상태로 완벽하게 발견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그 자료를 몇십 년 동안 현대 과학기술의 힘으로 분석한 고고학자들의 노력 덕이다.
하지만 이렇게 알타이의 미라가 세계적인 발견품이 되자 사람들은 마치 이집트의 투탕카멘왕의 발굴에서 그랬듯이 '미라의 저주'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미라가 발굴된 지 10년 뒤인 2003년과 약 20년 뒤인 2012년에 실제로 우코크 고원 근처에서 진도 7의 큰 지진이 일어났다.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 Novosibirsk에 있는 시베리아과학원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보존·전시 중이던 미라는 결국 2012년에 알타이공화국에 반환되었다.
그 이후 알타이의 얼음공주 미라는 알타이공화국의 고로노알타이스크 Gorno-Altaysk에 있는 박물관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사실 문화재 속지주의(문화재는 발견된 곳에서 보존하도록 함)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다만 이후 알타이공화국은 수많은 천재지변과 그에 따른 피해를 알타이 미라의 저주로 돌렸다.
2016년에도 강진이 발생하고 2020년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창궐할 때도 어김없이 그녀에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샤먼은 그녀가 발굴된 곳을 찾아가서 위령제를 지냈다.
문제는 이러한 미라의 저주에 대한 우려를 개인이 아니라 지역 정부 차원에서 벌인다는 것이다.
지역 언론은 땅속에서 안식을 취하던 고대 샤먼을 깨워서 그녀가 노했다면서 미라를 다시 묻어야 한다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조상인 얼음공주의 안식을 방해했으니 나라에 조만간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알타이의 샤먼이 경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항의는 일부 받아들여져서 박물관에 있는 미라는 샤먼이 정한 길일에만 공개되고 있다.
미라를 원래 발굴된 지역에서 전시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과거 유목민의 생활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단순히 미신 때문에 재매장될 상황에 처하는 건 비극이다.
사실 현재 알타이인은 13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몽골시대의 한 부족이었던 오이라트족 Oirats이 기반이다.
이들이 우코크 고원 지역으로 이주한 건 파지릭문화 Pazyryk culture 이후에 흉노匈奴, 투르크 Turk, 몽골 Mongol 시대를 거치고 난 직후이다.
파지릭문화로부터 2,000년 가까이 지난 뒤이며 알타이인은 형질적으로도 전형적인 몽골로이드(황색 인종) Mongoloid에 가깝다.
반면에 알타이의 미라는 여러 계통이 섞여 있지만 대체로 이란 Iran 계통과 토착 몽골로이드 혼혈로 보고 있다.
어쨌거나 알타이의 미라는 알타이인과 직접적인 관계는 거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진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야 했고, 미라가 여기에 동원된 것이었다.
사실 알타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이집트를 비롯하여 미라가 등장하면 수많은 음모론과 저주가 등장한다.
그런 저주를 믿는 것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유튜브나 황색언론 yellow journalism(언론 윤리를 저버린 채 지나치게 자극적, 편향적, 선정적인 기사를 주로 작성하는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콘텐츠 contents(꾸림정보)가 선호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보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
여전히 고고학자는 전체 사회에서 극히 소수여서 그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의 목적은 과거 사람의 삶을 밝혀내는 것이다.
겉보기엔 흉해도 과거 인간의 삶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는 미라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유물이다.
저주 같은 이야기에 현혹되기보다 미라가 알려주는 생생한 삶이 우리 눈앞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김영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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